결혼은 연애의 결말이 아니라
성숙한 사랑의 또 다른 시작
우리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한 심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지녔는지의 여부로 측량할 수 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측근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어 주위에 사람이 없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동물도 자기에게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지능을 가진 사람이면 더욱 호오에 있어 명확하다. 즉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
프랑스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프랑스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삼촌에게 거둬진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삼촌의 집에서 어린시절을 외롭게 보냈고, 13세에 캔터베리의 왕립 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에서 요양하던 중 1891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청강생으로 1년간 자유로운 유학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삼촌의 권유로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뒤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의과대학을 졸업, 의사면허를 취득했지만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 작가로 활동했다. 다만 작가의 길을 걷기로 한 후 초창기 10년은 그에게 불행한 시기였다. 여러 편의 소설과 희극을 썼지만 이렇다 할 히트작은 없었다. 생활고로 돈을 위해 작품을 쓰기도 했던 그는 1907년 발표한 오스카 와일드풍의 코미디 희곡 '프레드릭 부인'이 성공하면서 경제적, 정신적 여유를 얻게 됐다. 1912년부터는 희극 집필을 그만두고 장편 소설 '인간의 굴레'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직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인간의 굴레'는 작가의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으로 대표적 걸작이다. 그 외에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당시만 해도 극히 일부에게 인정받던 폭풍의 언덕을 높이 평가하며 언론 여기저기에 크게 다루면서 이런 명작이 묻혀지다니 이건 죄악이라고 한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 소설은 재평가되고 영국 문학에서 전설이 되었다. 또한 당시 알려지지 못한 모비딕도 엄청 높게 평가하여 여기저기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모비 딕에 밀려보이긴 해도, 몸이 쓴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 또한 영문학 최고걸작 50에 들어가는 불후의 명작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몸도 서구 영문학 연구가들에게 대문호로 인정받고 연구 중이다.대표작은 폴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한 '달과 6펜스'.엘리자베스 2세에게 명예 훈위(CH) 칭호를 받았다. 그후 1965년에프랑스 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중적이고 평이한 문체로 작품을 썼지만, 정교한 플롯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과 어리석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한편,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에 대해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왜 프러포즈는 늘 남자가 먼저 여자에게 해야 할까?, 왜 여자는 늘 프러포즈를 기다려야 하는가. 여자가 먼저 멋지게 하면 어떨까?
왜 그땐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돌아간다면 제대로 물어보고 싶다.
"우리의 연애는 끝난 거니? 너는 나를 이제 사랑하지 않는 거니?"
왜 그땐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같은 사랑에 관한 두 가지 기억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그를 차가운 남자로, 그는 나를 귀찮은 여자로 기억했다.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는 단벌 신사보다 더 단출했다. 사랑했던 이유보다 헤어진 이유가 별로 없을 때 비참하다. 이별에 있어 도망치기 선수 같은 내가 5년간 사권 연인에게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고서는 몇 번이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꾸 그를 찾아가는 구질구질한 내가 너무 싫었다. 그를 만나지 못할 땐 한참을 걸었다. 매일 밤 퇴근하고 걸어서 갔다.
더이상 길을 몰라 갈 수가 없을 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내가 걷던 거리, 세 시간.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사랑의 길이구나.' 나는 더이상 갈 수도 갈 곳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힘든 일이 생기면 걷는 습관이 생겼다. 걷고 또 걷고 한참을 걷다가 더이상 갈 수 없을 때 다시 돌아온다. 길을 잃기 전에 돌아올 수 있는 만큼만 걷는다. 뒤늦게 알고 보니 나는 그의 상황을 잘 몰랐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법에 대해 몰랐다. 나만 힘들다고 징징댔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힘든지, 누가 그를 힘들게 하는지, 무엇이 그를 얼마나 절망적으로 만드는지, 그를 안아주는 법도 다독여주는 법도 몰랐다. 그때 나는 어렸고, 두려 움 많은 사랑 속에 있었다. 모든 사랑은 비현실적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랑 어디 있을까? '영원히 너만 사랑해' 라든가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믿어본 사람은 안다. 그 말이 얼마나 유리같이 잘 깨지는지, 사랑은 예상하지도 못한 순간에 산산조각나고 만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 같은 연애법밖에 몰랐기에 나는 늘 상대방의 청혼을 기다렸다.
청혼을 하면 결혼을 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사랑이 안 정권에 접어드는 결론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청혼하지 않는 그를 멍한 눈으로 자주 바라보았다. 연애의 결론과 답을 모조리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날 나에게 느닷없이 '넌 나랑 반드시, 기필코 결혼하게 될 거야!'라고 사귀기도 전에 강력하게 주장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도마뱀 같은 나에게 꼬리를 다시 가져다 붙여주는 남자였다. 미쳤냐고 반문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라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확신을 하고 밀고 나가야 결혼이 성사되지, 둘 다 머뭇거리다가는 평생을 못 한다고."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자신 있게 밀어붙이는 그를 믿고 결혼했다. '아무도 내게 청혼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나 역시 '아무도 완벽히 끝까 지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말과 같다. 나는 결국 상대가 힘들건, 상황이 좋지 않건 간에 상황이나 이유를 핑계 삼지 않고 끝까지 사랑했던 사 람과 결혼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감독 팀 버튼Tim Burton의 영화 <빅 피쉬 Big Fish>(2003)에는 이런 멋진 대사가 나온다.
"살면서 그 물고기처럼 손에 넣기 힘든 여자를 얻는 방법은 단 하나.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주는 거야." <축복 받는 젊은 부부>라는 제목의 그림 속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신랑 신부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건하게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미래를 약속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 결국 결혼이라는 것은 그림 속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곳을 향해 앉아 있는 것처럼 매일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같은 꿈을 바라보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평행선처럼 떨어져 있다가도 길목에서 만나 다시 한곳을 바라보는, 영원히 의절하지 않는 친구처럼 말이다.
남편을 위해 서슴지 않고 모델이 되어주었다
부모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이 작품은 화가 파스칼 다냥 부브레 Pascal Dagnan-Bouveret,1852-1929
의 아내가 직접 모델이 되어준 그림이다. 파스칼 다냥 부브레는 친구였던 크루트의 사촌인 마리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 세계에서 아내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아내로 인해 그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그녀 역시 화가인 남편을 위해 서슴지 않고 모델이 되어주었다. 많은 화가의 부인들이 헌신적이었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은 화가의 부인을 만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사진관에서의 결혼 파티>에서는 결혼을 한 커플이 스튜디오에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식 날은 신부의 정신이 밖으로 외출 나가는 날이다. 뾰족한 구두를 신고,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사람들과 끝없이 인사를 하고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웃어야 하는데 그 웃음 덕분에 얼굴 근육이 마비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지 않았을까? 친척으로 보이는 지인들이 커플을 둘러싸고 있다. 큰조카로 보이는 꼬마는 가장 예쁜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으니 더 홍분했으리라. 공주같이 예쁜 드레스를 입은 이모를 보고 신기해서 한참을 구경하고 까르르 웃다가 숨기를 여러 번 하는 지칠 줄 모르는 꼬마의 장난 덕분에 신부는 한시름 놓고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어린 조카는 오늘의 행사가 끝나기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아빠한테 기대서 징징 엄살을 부린다. 집에도 가고 싶고, 졸리기도 한 데 아무리 해도 오늘의 잔치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결혼식 날의 나와 우리 가족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다. 현대의 결혼식에 비해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신부와 신랑의 꼭 잡은 팔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부인은 신랑의 팔을 꽉 붙잡고 서 있다. 앞으로의 인생을 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과, 하이힐로 인한 당장의 피로함을 이 남자에게 기대어 내 체중을 덜고 싶은 마음. 여자는 늘 이렇게 두 마음으로 살아간다. 낭만적으로 인생을 내다보는 마음, 그리고 오늘 당장의 현실을 계산하는 마음. 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화가였던 파스칼 다냥 부브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청소년 시기에 아버지가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외조부모 와 살면서 외가에서 지냈다. 다행히 그가 화가로 성장하도록 후원해준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프랑스의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에서 공부했다.
처음엔 카바넬 Alexandre Cabanel 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다가 이후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장 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의 화실에서 사진을 활용하여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이미 22세 때부터 그림이 판매되었으며 살롱에 전시하기 시작했으니 그는 다른 화가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그가 아 버지를 따라 가지 않고 예술의 도시인 프랑스에 남았던 것이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만약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갔더라면 그의 화풍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고, 어 쩌면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부모 없이 홀로 프랑스에 남아 그림에 전념했던 그에게 외조부모는 고마운 은인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성인 '부브레'를 자신의 이름에 덧붙였는데 자신을 키워준 외조부모님을 향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중 아내가 모델이 되었던 그림들을 보면, 한 사람의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할 때 배우자의 역할이 화가가 지닌 미술 재료들보다 중요하게 느껴진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재료보다 더 큰 힘은 화 가를 믿어주는 부인의 사랑과 신뢰였으리라. 끝까지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랑이 우리를 결혼이라는 문에 입장하게 만든다. 흔한 얘기지만 결혼은 연애의 결말이 아니라, 성숙한 사랑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요즘 자주 느낀다. 결혼을 원하거나 결혼할 나이인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거나 하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처럼 도마뱀 꼬리 같은 연애만은 제발 하지 말라고.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도망가지 말라고.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인생,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났다면 후회 없이 사랑하고, 표현하라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 보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던 연애에 있어서만큼 은 미련도 후회도 덜 남는 법이다. 그러니 언제 올지 모르는 로또 복권 같은 청혼만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내 사랑에 진심으로 충실할 필요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두 사람이 서로를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린왕자 생떼쥐페리)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