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속씨식물(속씨식물과의 식물)에서 발견되는 생식 구조이다. 꽃은 성장 중인 꽃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영양 기관, 즉 꽃받침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이 꽃잎은 꽃가루 매개자와 배우체(배우자)를 생성하는 생식 기관을 유인하며, 이는 꽃 피는 식물에서 배우체를 생성한다. 정자를 생성하는 수배우체(male gametophytes)는 꽃밥에서 생성된 꽃가루 안에 들어 있다. 암배우체(female gametophytes)는 난소에서 생성된 난자 내에 들어 있다.
대부분의 꽃식물은 서로 다른 꽃 사이에 꽃가루를 옮기기 위해 벌, 나방, 나비와 같은 동물에 의존하며, 밝은 색의 눈에 띄는 꽃잎, 매력적인 향기, 그리고 수분 매개자의 식량 공급원인꽃꿀생산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이러한 수분매개자를 유인하도록 진화해 왔다.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꽃 피는 식물은 수분매개자와 함께 진화하여 서로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즉 식물의 경우 번식 수단에 상호 의존하게 되었다. 수분 매개자의 경우에는 음식의 원천이다.
오늘은 꽃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꽃의 향기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이야기다. 향기가 없는 꽃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당태종의 모욕적인 선물 어느 날 신라 조정에 당태종이 보냈다는 선물이 배달되었다. 홍색 · 자색. 백색의 세 가지 색깔의 꽃 그림 한 폭과 꽃씨 석 되였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 궁중의 여인들도 그림에 그려진 꽃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림의 꽃을 처음 보기는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그 꽃이 향기 없는 꽃이라고 단정했다.
"활짝 핀 꽃에 향기가 없다면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하들의 물음에 여왕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이다."
여왕의 표강진역사학술세미나 ‘강진사람들 도를 사모하다’가 지난달 28일 강진아트홀에서 열렸다.정엔 알 수 없는 그늘이 서렸다. 궁중 나인들은 그 꽃씨를 대궐 뜰 안에 심고 꽃이 피기만을 기다렸다. "정말 이 꽃에 향기가 없을까?" , "설마 그런 꽃이 있을라고?"
궁녀들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에게도 결과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난 여왕이라 해도 실물도 아닌 그림만으로 그런 장담을 하니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얼마 후 당 태종이 선물한 꽃씨는 대궐 뜰 안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꽃으로 피어났다.
"어? 정말 향기가 없네?" 성미 급한 한 궁녀가 쪼르르 달려가 꽃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어 다른 궁녀들도 하나둘씩 꽃밭으로 모여들었다. "신기한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전에 이 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입소문을 듣고 직접 사실을 확인해본 대신들이 여왕에게 물었다. 여왕은 쓸쓸한 표정으로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홀로 시는 과인을 희롱한 것이오." 이상이 선덕여왕 하면 떠오르는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에서 따온 것으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삼국유사>는 당태종이 꽃씨를 선물한 게 선덕여왕 재위 기간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는 달리 <삼국사기>는 그것이 진평왕 때의 일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 이야기는 상황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한다. 만약 <삼국유사>에 나온 것처럼 선덕여왕 재위 기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여왕의 말처럼 당태종이 점잖지 못한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진평왕 때 선물을 보낸 것이라면 여왕의 총명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통치한 경우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을 들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세 명의 여왕이 모두 신라의 왕이었다. 모계사회도 아닌 봉건시대에 여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도 선덕여왕 보다는 50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치 앞을 못 보는 게 인생이라 했다. 당태종은 자신의 후궁인 무측천이 아들과 놀아나는 것도 부족해 훗날 제국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당 태종은 틈만나면 여왕의 통치하에 있는 신라를 모욕한다. 그는 선덕여왕 즉위 후에 이런 몰상식한 선물을 보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 필자들이 그것을 진평왕 재위 기간으로 왜곡해서 전했다면 여왕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고나 할까. 이것은 선덕여왕 사후 <신라 본기>에 언급된 사관의 말을 통해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천자가 아니라 복희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다. 여치와 무조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정치를 행하였으나, 역사서에 저는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 황후 여 씨나 측천황후 무씨라고 썼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은 굳세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커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 운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삼국사기> 가 쓰여진 것은 선덕여왕이 죽은 지 근 600년의 세월 이 흐른 뒤였다. 이때도 마치 여왕이 통치했기 때문에 나라가 백척간두에라도 내걸린 듯이 표현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분위기를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성골남진聖骨南盡, <삼국유사>는 이때 성골 출신 남자가 바닥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여왕이 후사를 잇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당시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버렸다.
여왕의 탄생
여왕의 탄생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딸만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훗날의 선덕여왕인 덕만공주였고 셋째는 서동요에 등장하는 선화공주였다. 덕만공주는 빼어난 미모에 성품이 너그럽고 영특한 데가 있어 어려 서부터 궁중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여왕의 자리에오 를 수 있었던 건이런 개인적 내력과는 전혀 무관한 이유에서였다. 진평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의 왕실계보는 모두 성골 출신들이 차 지하고 있었다. 성골이란 부모 양쪽이 순수한 왕족 출신인 신라 최 고의 가문을 뜻한다. 문제는 진평왕을 끝으로 신라에는 더 이상 성골 출신의 남자가 남 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화백회의는 진평왕의 차기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 에 빠졌다. 왕권을 진골 출신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면 여왕을 세우 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왕의 친인척 가운데서도 순수한 성골 출신 남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백회의가 난항을 거듭하던 끝에 내린 결론 은 진평왕의 맏딸인 덕만공주를 신라의 새 군주로 옹립하자는 것이 었다. 이렇게 해서 신라 제27대 왕이 된 선덕여왕은 성조황고聖祖皇姑, 성 스러운 임금 할머니라는 뜻로 불리며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화백회의가 이런 거창한 왕명을 붙여준 것은 진평왕 대에 이르러 대폭 강화된 왕권 성장의 결과였다. 성골출신 왕족들의 드높은 자부심과는 달리 선덕여왕은 물론 그다음의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라 왕실은 이웃 나라의 조롱거리였다. 백제군과 고구려군은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옥문지'나 '여근곡'을 택해 기습공격을 해오곤 했다.
이는 신라를 여왕의 나라라고 깔보고 남성의 힘으로써 기선을 제압한다는 유치한 심리적 전술이었다. 신라는 여왕에게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신통력이 있는 것처럼 과장하여 대내외적으로 신격화시켰다. 일례로 경주 남천 영묘사 옥문곡에 백제군사 5백 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여왕이 미리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소문을 대대적으로 퍼뜨렸다. 실제로 백제군이 이 부근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백제본기> 의자 왕8년 648년 조에 나와 있기는 하나 여왕에게 그런 신통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신라는 영묘사란 절에 대해서도 여왕이 하룻밤 사이에 귀신들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라 주장할 만큼 여왕 신격화에 몰두해 있었다. 물론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왕은 평소 자신이 죽을 날짜와 시간까지 예언했고 훗날 그 예언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문무왕은 여왕이 죽은 지 10년째 되던 해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이 일을 두고도 당시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적중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왕은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도림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 신하들에게는 경주 남산 남쪽이라고만 대답했다. 사천왕사는 불교에서 말하는 도림천 왼쪽에 있기 때문에 여왕은 소원대로 도림천에 문힌 셈이 된다.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협상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협상 선덕여왕의 치세 기간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여왕은 즉위 초부터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원군 파병 가능성을 타진하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만큼 신라가 처한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여왕 즉위 11년째인 642년의 신라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위기 상황이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 방어기지인 당항성과 낙동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야성까지 고구려와 백제군의 협공으로 빼앗겼다. 특히 대야성 전투의 후유 중은 신라 왕실의 통분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처가 컸다. 신라는 이 싸움으로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나라의 동량으로 추앙받던 사지, 죽죽, 용석 등의 훌륭한 화랑을 잃었다. 백제 입장에서 대야성 함락은 의자왕이 즉위 초에 일궈낸 역작이었다. 반면 신라로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되갚아야 될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다.
김춘추는 이때 조정의 중추적 역할인 이찬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적국인 고구려의 힘을 빌어서라도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인 원수를 갚으려 했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떠나기 전 김유신에게 앞일을 당부한다. "공과 나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요, 만일 내가 적국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어떡하시겠습니까?" "만일 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기필코 고구려·백제 두 임금 의 궁궐 안에 나의 말굽 자취를 남길 것입니다. 안 그러면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 김춘추는 김유신의 말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의 피를 짜 마시며 결의를 다졌다. "내가 날짜를 계산해보니 60일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기한 내에 돌아오지 못하면 공은 마음먹은 대로 하시오." 김춘추는 김유신의 말만 믿고 사지나 마찬가지인 적국으로 떠났 다. 그는 김유신보다 나이가 일곱 살 아래였으나 두 사람은 피를 나 눈 형제보다 더한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김춘추는 담력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구려로 떠날 때단한 사람의 호위병만을 데리고 출발했다. 협상의 윤활유가 될 수도 있는 선물 한 가지 손에 든 게 없었다. 다만 타고난 외교가로서 의 기질만이 그가 갖고 가는 유일한 자산이었다. '상공! 어찌하여 그 험한 곳에 빈손으로 가십니까?" 김춘추 일행이 대매현이라는 마을을 지날 때였다. 고을 사람 두사지가 청포 3백 필을 내주었다. "꼭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니 요긴하게 쓰십시오." 두사지의 당부에 김춘추는 일단 그것을 고맙게 받았다. 이때까지 만해도 그는 이 청포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보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보장왕은 허울뿐인 군주였고 협상의 주요 당사자는 연개소문과 김춘추였다. 다음은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겨울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우리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하인 제가 대왕께 명을 전 하러 왔습니다." 고구려왕이 말하였다. 죽령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 서는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구원하여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장高臧. 보장왕을 뜻함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에 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돌려보냈다. 위에 인용된 내용은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편에 기록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열전에는 김춘추가 동맹을 제의하자 보장왕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으로 그를 욕보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죽령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만약 그 땅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는다면 김춘추를 억류시켜 버리겠다는 위협을 가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자 김춘추는 국가의 토지는 신하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은근슬쩍 발뺌했고, 화가 난 보장왕이 그를 처형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 유명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춘추는 협상에 실패하고 고구려에 억류되어 있던 중 보장왕이 총 애하는 선도해라는 신하에게 청포 3백 필을 뇌물로 주었다. 선도해는 김춘추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비책을 알려준다. 다름 아닌 용궁에서 살아나간 토끼 이야기였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대국 고구려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반드시 돌려드릴 것입니다. 이것은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는 것이니 신의 말을 믿어주소서," 선도해의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던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영토 반환을 약속하는 글을 써주었고 '이에 왕이 기뻐하였다'는 대목에서 열전의 이야기는 일단락을 짓는다. 여기까지는 김춘추의 지모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김유신의 용맹 편으로 이해하면 내용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유신이 1만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갔을 땐 이미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연개소문은 과연 김춘추의 편지 한 장으로 우화 속에 나오는 미련 한 거북이처럼 속아 넘어갔던 것일까?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 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라를 자극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을 것이다. 결국 연개소문은 일단 김유신의 군대와 충돌을 피할 요량으로 김춘추가 하는 말에 속아주는 척했을 수도 있다.
정관웅 본지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