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3
김현임(수필가)
노래지희(老萊之戱)
청국장을 앉히려고 무쇠솥에 콩을 삶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영상 20도의,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 탓인가? 아니다. 훅훅 내치는 열기는 종일 초조한 내 마음의 온도 때문이리라. 요 며칠째 ‘자친학발재임영(慈親鶴髮在臨瀛)... ’로 시작하는 시가 나를 휘잡고 있다. 신사임당이 강릉의 친정으로 근친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대관령 중턱에서 모친을 향한 그리움의 정회를 읊은 시다.
인자한 어머니 강릉에 두고(慈親鶴髮在臨瀛)
나 홀로 서울 향해 가는 이 마음(身向長安獨去情)
머리 들어 북평을 바라보나니(回首北坪時一望)
흰 구름 날아 내리는 저녁 산이 푸르구나(白雲飛下暮山靑)
부모님이, 아니 어머니가 들어가는 글이라니, 과연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나 있는가. 가신 지 십 수 년 전인 아버지는 그렇다 치자. 내 어머니는 지금 홀로 병원 침대에 누워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지만 온갖 핑계거리를 동원해가며 병원 행을 거부하는 나, 나는 지금 엄청나게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만 보면 빌려간 돈을 돌려 달라 호통을 치셨다. 처음엔 몇 천만 원으로 시작해 갈수록 금액이 커지더니 최근엔 무려 20억까지 늘어났다. 다른 형제들에겐 정확한 기억력에 따뜻함까지 내보이시면서 왜 유독 나만 잡고 늘어지시는지. 특유의 치매 증세다. 누가 있건 없건 돈을 조르시는, 그 기세가 갈수록 도를 넘어섰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던가. 머리맡에 개켜두던 설빔, 그러니까 명절맞이 옷 마련에서도 내 옷만 거르시기도 했다. 두 살 터울 동생은 무용학원을 다닐 만큼이요, 언니는 독선생을 모시고 가야금수업을 받기도 했으니 꽤 유복했던 형편임에도 내게는 너는 성격이 유순하니까 대학교 따윈 안가도 된다 딱 자르셨다. 골라 골라 부잣집과 혼사를 맺은 형제들관 달리 눈이 멀어 가난한 놈한테 시집을 가니 혼수는 절대로 해줄 수 없다 생략하시기도 했었고. 구비 구비 사연 많던 결혼을 앞두고 신부인 내 한복은 값 싼 공단으로 한 벌, 당신 한복은 고급비단으로 세 벌을 맞추셔서 한복집에서 누가 신부냐? 는 농까지 오가지 않았던가. 어쩌다 거래한 몇 푼도 내겐 이자까지 꼬박꼬박 받으셨다. 제일 서운했던 건 첫 출산 때다. 배불뚝이 내 앞에서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당당히 발설하시며 훌쩍 여행을 떠나시던 냉정한 분.
아침저녁 잠자리 챙기는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이제는 할 수 없는 시점인데 공연히 호들갑 떨 건 뭐냐. 누구나 공평히 맞는 생의 종착역, 떨어진 잎새가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순간이다. 천하의 명의(名醫)인 편작(扁鵲)이 온데도 소용없을 거라는 억지도 가져다 붙였다. 더구나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도 고개 돌려버리시니 가 봐야 뭐 하나, 대신해 틈만 나면 어머니와 나에 얽힌 이런저런 서운한 것만, 서운한 것만 낱낱이 골라가며 되새겼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는 듯 어머니가 가장 좋았던 시절의 사진으로 영정을 준비했다.
당신의 무릎 한 쪽, 눈길 한 번 차지하고 싶어서 둘째 딸이 매양 가슴앓이를 하던, 사진 속 아름다운 엄마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따뜻한 엄마들을 줄줄이 떠올린다. 프로배구 선수 레오는 지난 세 경기에서 110점을 올려 MVP가 됐다. 스파이크를 꽂아 넣을 때마다 관중석의 어머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2만원도 안 되는 쿠바 대표 팀 월급으로 홀어머니와 가족을 어렵게 부양하던 레오는 한국으로 오자 어머니를 당장 모셔왔다. 어머니와 함께 살며 그는 펄펄 날았다.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는 왼 손목에 흰 실을 감고 경기에 나선다. 태국 불교에서 복을 빌며 묶어주는 ‘싸이씬’이다. 골프채를 씌우는 호랑이 모양 헤드커버엔 태국어로 ‘엄마사랑’이라고 수가 놓여 있다. 어머니가 해마다 그 해 우승하는 대회 이름을 수로 써넣는다. 시인 김 종해 씨는 해 질 녘이면 농수산물 시장을 찾는다. 칠순의 시인은 신출내기 요리사가 되어 멸치가 제 철인 요즘 같은 봄이면 봄멸과 상추를 구입해 집으로 향한다. 양파와 마늘, 청양고추를 다져 만든 쌈장으로 상을 차린다. 어린 시절 고향인 부산에서 국수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서다.
모든 자식에게 엄마는 신(神)이다. 그런 엄마를 못 가진 나는 생의 모서리에 부딪혀 생채기가 나는 순간 남 보다 곱절로 아팠다. 달려가 어리광 부릴 곳도 위로를 청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처가 없는 신도처럼, 아니 큰 소리로 울 자리가 없는 짐승처럼 허둥댔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부르던 엄마, 엄마, 울 엄마가 단 한 번이라도 가슴으로 품어 주신 적이 있었던가. 이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엄마가 나를 부르고 있지만 이번엔 내가 귀 막아가며 엄마를 내치고 있다.
주나라의 노래자(老萊子)는 자신의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칠십의 나이에도 색동옷 입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던가. 연로하신 부모님이 당신의 나이를 의식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언제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린 동자(童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단다. 천하에 성군(聖君) 요임금은 자신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은 계모의 학대에도 언짢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아서 나중엔 오히려 어머니 쪽에서 눈물로 후회를 했다던데... .
어버이날이 있는 5월 입구에 들어선 탓인가. 요 며칠째 뒤숭숭한 꿈자리였다. 요즘 들어 내가 집안일에 바짝 부지런을 떠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시끄러운 마음을 달랠 겸 장롱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서랍에서 나온 딸의 색동저고리에 더 이상 진전되지 않던 작업, 노래지희(老萊之戱)는 애초 내가 쓰려던 글제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고 엄마에게고 나는 결단코 후회는 없다. 아버지, 엄마가 나한테 베푼 것에 비하면 나는 효녀였노라고 형제들 앞에서 공공연히 큰소리치던 나. 모시기는 하되 기껏해야 먹을 것이나 챙겨주는 수준으로 부모를 돌보는, 그 견마지의(犬馬之義)조차 겨우 몇 차례뿐이었다는 가책과 함께 어느 해 어머니와 더불어 먹었던가. 무심코 상에 놓은 상추를 외면하며 툭 떨구는 이 뜨거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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