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4
김현임(수필가)
도문대작(屠門大爵)
먹는 이야기를 열거하는 자의 표정은 서글프다. 배부른 자는 결코 음식이름을 들먹이지 않는다. 목까지 차오른 포만감에 그것이 담겨 나온 접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이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기록은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이 술 먹고 토한 것을 우리 백성들이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워 먹었다 전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말의 배설물 속 섞여 나오는 채 소화되지 않은 보리알을 백성들이 추려내 먹는 참상에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이 적혀있다.
“소꼬리탕을 먹을 수 있다면 뭐든 주겠어요.
쌀, 소시지, 살구, 건포도로 속을 채운 어린 돼지구이도요.
버터, 겨자, 파슬리 소스를 버무린 송아지 콩팥,
적포도주에 곁들인 토기요리,
닭 간(肝) 소시지, 돼지고기
송아지 간(肝) 파테,
개구리 요리,
아, 개구리 요리를 먹어 봤으면,
개구리 요리!”
자신을 향해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3년 생 벵골 호랑이와 태평양 한 가운데서 표류 중인 소년이다. 둘 다 피골이 상접한 채 마침내 실신 직전, 소년은 호랑이와 하염없이 음식 얘기를 나누는 환각에 빠진다. 이안 감독에게 올해의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 준 얀 마텔의 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절정부분이다.
‘우리 집이 비록 한미하고 가난하였지만 선친이 살아계실 때에는 각 지방의 특별한 음식을 예물로 보내주는 자들이 많아서, 어릴 적에는 진귀한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었다. 장성해서는 부잣집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또 갖가지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강릉의 외가에서는 낯 선 지방의 기이한 음식을, 베옷을 벗고 벼슬하기 시작한 뒤로는 남과 북의 임지로 떠돌아다니면서 더더욱 남들이 해주는 음식을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음식이라면 조금씩 맛보지 않은 것이 없고, 좋다는 음식이라면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서두로 시작하는 교산(蛟山) 허균선생의 도문대작(屠門大爵), 즉 ‘푸줏간 문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입맛을 다신다’라는 제목의 척독(尺牘)도 마찬가지다.
전라도 함열의 유배지에서 쌀겨나 싸라기조차 제대로 댈 형편이 못 된 처지에 이른 선생은 그 옛날 자신이 물리도록 먹었던 먹거리를 떠올리며 침을 질질 흘린다. 마침내 선생은 그 음식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틈이 날 때마다 갖가지 음식들을 기록해 살펴봄으로써 고기 한 점 먹은 셈 치기로 한 것이다. 천하의 공자도 곰 발바닥에 혹했다는 대목으로 한 점 고기에 연연하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도 하고 한 끼 식사에 만 냥을 쓰면서도 늘 수저 댈 곳이 없다고 투덜대었다는, 중국 역사상 음식에 관한 첫 저술인 ‘식소(食疏)’의 저자 하증의 얘기도 곁들이며 사무치는 허기를 달래보려는 허균 선생의 심사가 오죽했으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 쇠고기국, 짭조름한 굴비장아찌에 잡곡밥....’ 졸지에 큰집에서 쫓겨난 흥부네 자식들은 저마다 상세히, 조목조목, 음식목록을 들추며 힘없는 아비를 조르지 않았던가. 먹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갈증 해소법이 소설 속 소년이나 흥부네 자식들, 그리고 천하의 교산 선생까지 어찌 그리 흡사한 지.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다’는 허균 선생의 일갈처럼 유사 이래 먹을 것에 얽힌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희대의 간신 역아(易牙)려니 제 욕망을 위해 세 살 난 아들을 삶아 바치는 천륜을 거스르는 악행도 마다 않는다. 제나라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역아는 타고난 음식 솜씨로 먼저 환공의 애첩 장위희를 포섭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역아에게 식도락의 극치에 이른 왕의 한 마디가 빌미를 제공했다.
“짐은 세상의 모든 음식은 물리도록 먹어보았지만 인육(人肉)만은 아직 맛 보지 못했다.”
호화스런 접시에 담겨 나온 연하고 부드러운 고기를 단숨에 먹어 치운 왕은 입맛을 다시며 고기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제 자식까지 삶아 바치는 역아의 충성심을 극찬했다. 머지않아 왕은 역모를 꾀한 역아의 배신으로 탑에 갇혀 시신에서 구더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오기까지 방치되는 수모를 겪는다.
자신을 찾아 온 대원군에게 내놓을 것 없던 선비는 궁여지책, 맑은 물 한소끔 끓인 백비탕(白沸湯) 한 그릇을 상에 올려 정성껏 손님에게 대접했다던가. 낙동강 지류에서 강변을 보며 지냈다는 류후조는 참대 지팡이에 짚신을 신어도 떳떳했을 터다. 하지만 ‘나물 먹고 물 마신 후 팔 베고 누웠으니 천하가 내 것’이라는 경지의 청렴도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게르첸은 ‘우리가 따뜻한 응접실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사회주의를 떠들 때 창밖에서 가난뱅이는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간다.’며, 말로만 민중을 들먹거리는 ‘샴페인 좌파’의 허식을 꾸짖었다. 이번에 프랑스에서는 장관들 재산을 최초로 공개했다. 최근 장관들이 부유세를 적게 내고, 해외비밀 계좌를 운용하고, 고가의 미술품을 팔아 수백억 원을 벌었다는 게 드러나자 대통령이 재산공개라는 칼을 빼든 것이다. 이에 몇몇 장관들은 자신들에게 ‘캐비아 좌파’라는 딱지가 붙을까 전전긍긍 중이란다. 철갑상어 알 캐비아는 상류층만 맛보는 고가 음식이다. 프랑스 언론인 조프랭은 ‘캐비아 좌파의 역사’라는 책에서 ‘배신자를 우아하게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 캐비아 좌파’라고 했다. 하긴 부자들이 캐비아 맛을 어찌 잊을까.
초봄을 맞아 입맛을 잃은 내게 간절한 것은 곁두리, 요즘 같은 모내기철이면 들에서 먹던 광주리 밥이다. 오랜만에 곳간에서 쌀을 헐어 그릇마다 고봉으로 담길 만큼의 넉넉한 쌀밥을 하고 아껴두었던 마른 명태라던가, 자반고등어, 혹은 새끼로 묶어 말린 쩐 내 풀풀 풍기는 갈치에 무우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푹 조려 냄비 째 내놓는다. 거기다 근처 두둑에서 캐어 조물조물 무친 고소한 나물도 한 양푼, 출렁출렁 넘치는 분량의 막걸리 주전자는 필수다. 누군가 찔끔 흘린 막걸리에 논두렁에 흐드러진 자운영 꽃무더기도 취해 하늘거리던, 풀밭에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먹던 곁두리는 상상만으로도 나를 도문대작의 심정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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