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6
김현임(수필가)
사기포서(使驥捕鼠)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腹腸)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의 시 ‘강’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래도 부피 줄지 않는 억울함과 치사함에 또 다시 펼쳐 읽는 한 편의 시다.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이 없었다
네 그림자에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이 영혼을
도종환 시인의 이 시 역시 황인숙 시인의 ‘강’에서처럼 사람의 진정한 친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이 귀 기울이고 등 기대게 해주는 자연이라 했으니 집 앞 영산강과 영모정의 아홉 고목에게나 하소연해 볼까.
요즘 들어 그녀가 부럽다. 여당의 대표조차 식물장관이 될까 우려된다고 말렸고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11.8%가 찬성을, 64.7%가 임명 반대를 택했지만 ‘한 번 발탁한 사람을 써보지도 않고 어떻게 내치느냐’고 대통령은 오히려 따뜻한 어조로 그녀를 두둔했다. 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은 끝내 임명되지 않았던가. ‘불통인사’, ‘고집인사’라는 여론까지 감수하며 자신을 지지해준 대통령, 최고 통치권자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진 그녀가 갈수록 부럽다.
요 근래 딱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정말이지 강이나 나무에게 뿐, 내 심정을 마땅히 토로할 곳도 짐작해주는 이조차 한 사람도 없다는 쓸쓸함이 더욱 나를 힘들게 했다. 창업 과정에서 온갖 궂은 일로 부림을 당하다가 회사의 꼴이 갖춰지자 졸지에 퇴출당한 느낌이 이럴까. 하긴 성과나 태도 면에서 검증된 인재가 불가피하게 퇴사한 경우 회사는 끊임없이 ‘우리가 너를 잊지 않고 있다’는 관심 표현을 한다던가. 나라는 사람이 그런 잠재적 자원으로 관리될 만큼의 빼어난 인재가 아닌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는 비애감까지 얹혀 정말이지 외롭고 괴로웠다.
내게 부피 큰 치사함을 안겨준 이번의 어깃장은 한동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엔 극심한 불쾌감이 총체(總體)인양 남았다. 고양이 과(科) 동물이 먹이를 통째로 허겁지겁 삼킨 후 마지막에 토해 놓는다는 털 뭉텅이, 모구(毛球)덩어리다. 영양가 없이 제 뱃속만 괴롭힌다는 점에서 불쾌감과 모구, 그 둘은 같다. 그렇다면 나 또한 서둘러 뱉어 낼 수밖에.
그런데 이 무슨 만용일까. 종종 사기포서(使驥捕鼠)의 심정에 빠진다. 기(驥)는 천리마, 포서(捕鼠)는 ‘쥐를 잡다’이니 말 그대로 좁은 외양간에 갇힌 채 부질없이 쥐나 잡고 있는 천리마의 심정을 이른다. 비루한 동료가 눈 먼 주인에게 발탁되어 큰일을 맡고(弱馬卜重) 거드름 피우는 것도 꼴불견인데 더욱 가관인 것은 모기에게 산을 짊어져라 맡기고(使蚊負山)도 태평한 주인의 꼬락서니는 그 얼마나 야속한가. 백호선생께서도 그런 꼴을 목격하셨던가보다. 일찍이 ‘마우담(馬牛談)’이란 시로 적재적소에 올바른 인재등용을 하지 않은 위정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다.
世有病心人 騎牛馬載去
세상에 병적인 심보를 가진 사람이 소는 타고 말에다 짐을 싣네
用人旣違才 鞭策不少恕
이렇듯 뒤바꿔놓고도 채찍질은 모질기만 하니
太行之路 靑泥坂
높은 산과 진창의 험한 길에서
馬蹶牛僨 將何助
말은 넘어지고 소는 자빠지네 아, 어찌 할거나
吁嗟嗟 健牛良馬一時疲
건강한 소와 말이 한꺼번에 쓰러졌으니
誰爲負也 誰爲馳
뉘라서 또 짐을 지고 달릴 수 있으랴
이런 류의 통증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가라앉으리니 따지고 들면 내게 무슨 목적이 있었던가. 다만 17년 동안 바친 내 오롯한 순정(純情), 그 순수한 열정이 철저히 외면당한 무안함, 그것이 가장 컷을 터다.
‘난 엘리트 작가 아닌데... 이제야 날 알아보는 건가.’ 최근 이름난 미술상을 수상한 작가가 너털웃음과 함께 터트린 수상 소감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고졸의 화가는 여름엔 건축공사판으로 겨울엔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가며 그림에 매달렸다. 형편도 어려웠고 틀에 박힌 교육도 싫었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었다. 남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게 가장 큰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유쾌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자’는 화가의 다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으며 감히 청해보는 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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