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여신(至誠如神)
칙칙한 초록의 나라
함석지붕으로 비가 불협화음을 뿌리고... ,
아침에 읽은 시 속에 등장하는 한 줄기 소나기가 너무도 간절해지는 폭염 탓인가. 뜨거운 양철지붕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한 여름 오후, 벌써 몇 시간 째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두고 있다. 이리저리 돌려보는 리모컨, 그 어느 것도 마땅찮아 지겹다는 말이 내 입에서 막 튀어 나오려는 순간 해후한 반가운 얼굴, 조 재현이다.
내게 손꼽히는 몇 안 되는 믿음직한 배우랄까. 그가 열연했던 '피아노‘의 여파인지 그는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연기자가 되었다. 이번에 그가 맡은 역은 애증과 분노가 뒤범벅된, 흡사 괴물 같은 인간이란다. 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캐릭터를 소화할 배우가 절실했다던 제작진, 그들의 선택은 적중했다는 평가다.
‘30대 때엔 자신감과 객기로 밀어붙였던 연기가 세월이 갈수록 불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불안감이 오히려 내 연기의 동력이 된다. 시청률을 의식해 파행의 줄거리로 치닫는 것보다 다소 무거울 지라도 시대의 아픔을 보듬으려는 의도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는 조 재현, 한낮의 더위를 잊게 만드는 그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가 불러 온 사자성어다.
지성여신(至誠如神). 무엇이든 자신의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해 이룬 사람의 힘은 마침내 신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한낱 미물인 새도 훨훨 날아갈 날개가 완성되기까지 세 해를 참고 견딘다던가.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극심했다던 배우, 변변찮은 수입으로 견디던 연극배우 시절의 신산했던 회고담도 그렇고, 등 따시고 배부른 걸 자각 못하는 순간이 배우에게는 끝이라는 고백에서 엿보이는 중년배우의 결기(結氣), 그 부분에서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도 난다. 길을 막는 건 다 벽이다. 산과 물에 비유되는 숱한 장애들에 꽉 막혀 나아갈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던 진퇴양난의 순간이 한 두 번이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즐거움만 알고 그 괴로운 면은 모른다(知生之樂 未知生之苦)했으니 지성여신의 경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로 가치 있는 그릇은 마지막에 만들어진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과도 통하는 말이다.
한 나라 때 양웅의 아들인 자오(子烏)는 나이 아홉 살에 어렵기로 소문난 아버지의 책 ‘태현경(太玄經)’의 저술을 도왔다. 그런가 하면 어린 나이에 시를 잘 지었다 전하는 두보의 아들인 종무(宗武)도 있다. 또 훗날 중추(中樞) 벼슬을 지낸 곽희태는 다섯 살에 이소경(離騷經)을 네댓 번 읽은 후 줄줄 외울 정도로 총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 까닭인가. 아쉽게도 그들은 역사의 페이지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못 한다. 어린 날 신동(神童)으로 잠시잠깐 주변에 이름을 날렸을 뿐 단 한 줄 시의 흔적조차 없다.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 鬼神通之)라던가. 미련한 놈이 영리한 놈 못 당하고 영리한 놈은 부지런한 놈 못 당한다. 한 가지에 밤낮 없이 전심전력 매달려 정진하노라면 마침내 깨우침에 이르리니 제 아무리 뛰고 나는 천재도 노력형 범생(凡生)을 못 이긴다. 말도 채 익히지 못할 나이에 영어대화를, 코흘리개들이 다섯 손가락 동원해 과자 갯수를 겨우 겨우 헤아릴 나이에 척척 몇 자리 수의 숫자놀음을 즐겨 우리의 눈을 놀라게 했던, 그러고 보니 이런 대다수 천재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본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어느 입지전적인 인물의 묘사 중 ‘불행을 견인(牽引)하다.’라는 표현은 얼마나 신선했던가. 그들의 운명을 역전 시킨, 그 등 푸른 용기의 원동력은 변함없는 성실함이었다. 인생은 천 리 만 리길의 여정이라 했다. 먼 길에 창자가 꺾이는(長路覺搉腸) 밤도 하루 이틀이었나. 시작만 요란 할 뿐 용두사미 격, 화르륵 일시에 타 사라지는 고화자전(膏火自煎), 기름등불이 스스로 저를 태워 없애듯 제 재주가 저를 망가뜨린 인물의 예도 허다하다. 저돌적 돌진은 보고 있는 이도 위태하게 한다. 가끔 멈춰 서서 제 능력의 한계를 조율하는 시간을 갖는, 그러니까 길게 저 멀리 시선 두는 자가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다. 캐디 출신의 골퍼가 그렇고 고졸로 이름 난 회사의 수장(首長)에 오른 이도 한 예다. 천천히 꾸준하게 혼신을 다해 제 마지막까지 연소 시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쁨과 노여움, 곤궁함과 즐거움, 원한과 사모하는 마음이 일거나 술에 취해 마음의 격동됨이 있으면 반드시 글씨에 이를 풀었다던 옛사람, 그는 삶의 회오리를 고요한 몰입과 맞바꾸었다. 매사 뜻대로 풀리지 않아 마음이 갈팡거릴 때마다 의연한 태도로 꾹 눌러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때때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상을 멈추고 유장한 시간의 흐름과 대조해 보는 것도 삶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정상(頂上), 그 최종 목적지에 다다름만이, 산과 바다에 내 발길 닿는 것에만 우리의 희열이 있으랴. 산에도 바다에도 그 즐거움은 있지 않다. 희망을 향해 내 활시위를 힘껏 당기던 그 긴장된 매 순간에 생의 묘미인 즐거움이 깃들어 있다.(山不利 水不利 利在挽中之間)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련한 빗소리다. 저 뜨겁고 굵은 빗줄기 닮은 땀방울을 흘리며 어디선가 쉬지 않고 제 길을 헤쳐 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으려니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이 빗줄기로 하여 어린 모는 푸르른 벼이삭으로 나날이 튼실해질 것이다. 비바람 견뎌내고 누렇게 황금빛 이룬 알곡들의 군무(群舞)는 상상만으로도 흐뭇하지 않은가. 어느 결실치고 우리에게 넉넉한 하늘의 베푸심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있으랴. 사람의 큰 이룸 또한 당당히 신의 손길, 그 반열에 오른다. 또 어쩌랴. 모 중에는 싹만 트고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묘이불수요, 묘이부실이니(苗而不秀, 苗而不實) 공자의 논어 ‘자한(子罕)’에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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