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36
여도지죄(餘桃之罪)
김현임(수필가)
‘사랑을 위해 왕좌를 포기한 프리소 왕자 사망’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하는 김선욱을 듣는다. 네덜란드에서 왕위계승권자는 결혼 전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하지만 프리소 왕자는 인권운동가인 마벨 비세 스미트와 약혼하고도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마약범죄자와 교제한 약혼자의 과거경력이 문제였다. 의회가 계속 승인을 거부하자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대목에 휴우! 하고 내뿜어지는 깊은 한숨은 뭐람. 또 자신의 선율에 도취된 피아니스트를 보다가 왜 숙종, 그 차가운 남자를 떠올렸는지. 이 또한 ‘커플’이라는 제명의 책을 잃은 여파인가.
두 명의 正妃를 포함해 도합 일곱이었다. 하니 여색에서만큼은 왕이라는 특권을 욕심껏 누린 숙종이다. 특히 그와 장희빈의 사랑은 조선판 커플목록에 실릴 만큼 떠들썩했다. 첫 아내를 잃고 만난 장옥정, 숙종은 그녀의 치마폭에 빠졌다. 정숙한 여인이라 지칭하던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칠 때 보인 그의 냉혹함은 몇 년 뒤 고스란히 되풀이 된다. 첫 자식을 선물한 장희빈을 위해 갓 백일 넘기기 무섭게 원자 책봉을 서두르는 등의 갖은 무리수를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린 숙종. 하지만 그들의 환희작라(歡喜雀羅)도 구십춘광(九十春光)이라. 참새처럼 기뻐 날뛰던 둘의 사랑은 다시 덥힐 수 없도록 온기 사라진 아랫목의 밥주발 닮은 사랑이 되고 말았다. 숙종은 다시 인현왕후에게 눈을 돌린다. 그녀를 향해 부치던 절절한 편지마다 추신이 ‘짤막한 몇 자라도 그대의 답신을 간절히 바라오’였다는 대목을 읽으며 씁쓸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여도지죄(餘桃之罪), 잇자국이 선명한 복숭아를 건넨 죄를 따져 물었다는 미자하의 사연에 얽힌 고사성어다.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있었다. 그는 왕의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미가 병이 났다는 전갈에 놀란 미자하는 허락도 없이 왕의 수레를 타고나가 병문안을 하고 왔다. 당시 나라의 법으로는 누구라도 왕의 수레를 함부로 타면 발을 자르는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왕은 오히려 미자하를 두둔했다.
“얼마나 어미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면 제 발이 잘리는 위험도 무릅썼을 꼬.”
이 역시 둘의 사랑이 유월 복숭아처럼 달콤새콤 익어가던 무렵에 생긴 일이었다. 궁내 과수원에서 살 오른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베어 먹던 미자하, 그는 너무도 기막힌 맛에 왕에게 달려갔다. 잇자국이 선명한 미자하의 복숭아를 받아든 왕은 또 다시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대의 사랑은 이다지도 섬세한가! 자기가 먹는 맛도 잊고 나에게 건네다니!”
그러나 무자비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해 무너뜨린다. 세상 어느 것도 시간의 파괴력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사랑의 기한은 길어야 2년이라더니 상대를 향한 사랑의 콩 껍질이 벗겨지고 당의정(糖衣精)도 녹았다. 마침내 왕의 수레를 탔다는 죄에 더러운 잇자국의 복숭아를 건넨 죄까지 추가된다. 졸지에 상궁지조(傷弓之鳥) 신세, 연인에게 버림받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미자하가 읊었음직한 시가 아닌가.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던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 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던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 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내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 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불취불귀(不醉不歸)’ 전문
이 무슨 우연일까. 숙종이 장희빈을 내칠 때 가장 큰 빌미로 삼은 것도 수레였다. 학수고대하던 외손자 탄생 소식에 들뜬 장희빈의 모친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뚜껑 있는 가마를 타고 궁을 들어갔으니. 수레뿐이랴. 남녀가 만나 헤어지는데 이유는 많고 많다. 결국 격강천리(隔江千里)에 이른 숱한 사연의 갈피, 인연의 무상함은 우리로 하여금 수렁 같은 슬픔에 빠져들게 한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誰怨誰咎). 믿어지지 않는다. 가슴의 전부를 점령했던 이와의 결별이라니! 그대와의 작별은 이 세상의 끝이라던 ‘The end of the world’의 가사가 더 이상 이국 가수의 것이 아니다. 이리저리 목적 없이 헤매기도 하고(徘徊顧眄),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극도의 공황상태, 칼끝에 베인 듯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하며 전전반측(輾轉反側)하기 몇 날 며칠, 기나 긴 고통 끝에 남은 것은 미련이란 작고 남루한 보퉁이뿐. 수레의 채는 그대 없는 남쪽을 향해 치는데 바퀴는 어이하여 자꾸 그대 머문 북쪽으로 굴러가려하는가(南轅北轍). 가는 이 절대로 붙잡지 않으리라는(去者不追)의 맹세도 허위요, 차라리 기억상실증에 걸려 그와 얽힌 모든 추억들이 깡그리 사라져주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그 어떤 구속의 사슬도 열애에 빠진 둘을 떼어놓지 못하던, 실제 역사 속에서 혹은 문학작품 속에서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던 연애담이 줄줄이 실려 내 구미를 당긴 책, 어느 날부터 행방묘연해진 책이 옛사랑처럼 아쉽다. 드나드는 사람이 유일했지만 남녀상열지사에 관심은커녕 그런 천박한 놀음엔 도통 모르쇠로 일관하는 내 언니의 소행일 리야. 오랜 한발(旱魃)과 같은 게 우리네 삶, 지쳐 척박한 그 땅에 내리는 단비(旱天慈雨) 같은 것이 사랑 아니던가. 해서 하다못해 책 속의 인물이라도 마음에 청해 두지 않으면 허허로운 나. 그토록 연약해 빠진 나완 달리 오직 거룩한 하나님뿐으로 절대로 사람 따위에 취하지 않는 씩씩한 삶을 누리는 언니가 부럽다. 어느 현자 충고한다. 별리에 아파하는 그대여, 변덕 다분한 그까짓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취해 살라. 차이코프스키의 F단조로 넘어간 김선욱의 현란한 손을 응시하며 나 또한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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