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43
면후심흑(面厚心黑)
김현임(수필가)
자식의 밝은 얼굴을 대보름날 환하게 돋는 달에 비할까. 바쁜 틈 쪼개 먼 길 달려와 전하는 딸의 낭보에 한가위 보름달처럼 벙그러진 양치기님의 함박웃음이다. 지루한 공부 끝에 의사고시에 합격한 것도 고마운데 대그룹 계열사 병원에 당당히 취업을 했다니 아버지의 귀까지 웃음이 걸릴 수밖에. 웃음이라는 용해제(溶解劑) 덕택일까. 오랜 만에 만난 부녀의 대화는 말랑말랑하기 그지없고 덩달아 내게도 종일 시들지 않던 웃음꽃!
웃음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여학교 때 추억이다. 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수학선생님께서 수업 시작의 인사를 받기 무섭게 터진 내 웃음보가 시발이었다. 얇은 남방 사이로 얼비치던 선생님의 속옷이 한 쪽으로 바짝 몰려 있는 게 사단이었다. 말똥이 굴러도 터진다는 소녀들의 웃음이 아닌가. 자신을 향해 까닭 없이 킥킥대는 제자들에게 불 같이 화를 내시던 선생님. 차마 정직한 연유를 댈 수도 없었던 우리는 교실 밖으로 쫓겨나서야 비로소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수 있었으니. 이렇듯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집단 히스테리라 하였다. 탄자니아 카샤샤 마을의 한 학교에서 실재로 걷잡을 수 없는 웃음병이 번졌다. 두 달 동안 무려 95명이 일상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결국 폐교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는, 특이한 것은 12살에서 16살의 여학생들에만 감염이 되었다는 희귀한 웃음발작증이다. 반면 그녀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실내 온도가 2도는 내려간다던가. 유럽 금융의 운명을 쥐락펴락한다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의 여제(女帝)는 웃음은커녕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한다했다. 하지만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속담은 여전히 유효하며 진실한 웃음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또한 상대가 내게 준 웃음 한 번이 평생을 지배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 십여 년 전
그가 나를 향해 한 번 웃었다.
나는 그때 무언지 모르고
다만 그의 웃음을 얄밉게만 여겼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오직 그의 웃음만 남아 있을 뿐
그를 잊으랴 잊을 수 없을 뿐더러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그립네
그로 더불어 많은 情詩 지어졌고
그로 더불어 여러 환경 그려보았다.
어떤 이는 읽은 후 상심하고
어떤 이는 읽은 후 기뻐하였다.
기쁨이나 상심이란
기실은 오직 한 번의 웃음 뿐.
웃는 그 사람 다신 영영 못 볼지 모르나
그 웃음은 하 어여뻤기 심히 고마울 뿐. 호적-‘한 번 웃음’ 전문
누군가의 가슴에 일생 동안 지울 수 없는 여운을 남긴 시 속의 웃음은 미소다. 입가에 머금는 함소(含笑), 은근히 얕잡아 비웃는 조소(嘲笑) 뿐 아니다. 큰 소리의 홍소(哄笑), 박장대소(拍掌大笑), 가가대소(呵呵大笑) 등등.... . 웃음도 때를 가려 터트려야 한다. 안면위장(顔面僞裝)을 뜻하는 포커페이스는 고스톱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미소 속에 칼을 감춘 소리장도(笑裏藏刀)의 기질이다. 낯가죽은 두껍고 마음은 음흉하다는 면후심흑(面厚心黑)은 지도자의 첫 번째 자질이요, 더 나아가 무한 경쟁 시대 21세기 비즈니스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처세술이란다. 이왕지사 초한지에서 펼쳐지는 인물사로 살펴보자.
초한지의 후흑학(厚黑學)에 따르자면 낯 두께가 역사를 바꾼다고 했다. 후흑(厚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임말로 인걸 척도의 주요 잣대다. 얼굴의 두께이니 표정의 변화도를 측정해 가름한다. 1단계는 제 품은 생각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 감정의 변화를 표정에 낱낱이 드러낼 정도로 마음이 순박한 박백(薄白), 하니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다. 2단계는 술수 뛰어난 정치인, 또는 숱한 범법자들이 속한 부류로 곧 드러날 거짓말을 들키지 않게 애써 감추는 수준이다. 3단계는 역사에 남은 범상치 않는 영웅호걸들로 그들의 표정은 항상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이 무엇인지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지막 4단계는 모두가 앙망하는 성인(聖人)의 수준이니 부처나 예수 같은 그야말로 신(神)의 반열에 이른다.
좀 더 상세한 예로 항우는 낯이 얇고 순수했다. 총희(寵姬) 우희와의 사랑에서 엿보이듯 박백(薄白)을 대표한다. 갖은 책략으로 항우를 도와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범증은 한 순간의 모욕을 참지 못해 주군을 떠난다. 낯은 얇고 마음은 음흉했으니 보통 사람보다는 우월했지만 결코 좋은 평은 못 듣는 박흑(薄黑), 2단계다. 사가(史家)들로부터 영웅이라 칭송되는 한신은 백정의 가랑이를 기는 수모를 잘 견뎠다. 그러나 끝내 신의(信義)라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방을 믿은 것이 불행을 자초했으니 낯은 두꺼웠지만 마음이 순수했다. 아쉽게도 2단계를 조금 넘어서는 후백(厚白)에 머무르지만 범증과는 달리 후세인들에게 호걸이라는 이름을 획득한다. 유방은 세상의 모든 인연과 의리를 철저히 외면했다. 대업을 위해 부자(父子)의 연도, 형제, 부부, 벗 등등의 오륜(五倫)과 얽히고설킨 예의와 염치를 깨끗이 다 버려 마침내 후흑(厚黑)의 경지를 완성한다. 군웅을 평정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으니 유방은 과히 인걸의 최상위인 3단계다.
유감스럽게도 웃음기 띤 표정관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봉변을 본 장관이 있었다. 하지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에게는 굳이 감추려 해도 감출 것 없이 텅 비어버린 게 웃음주머니다. 최근 각광받는 웃음치료사는 도무지 환하게 웃을 일이 드문 요즘시대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기침과 더불어 결코 숨길 수 없다는 웃음. 만면 가득 띄운 웃음과 손 가린 채 한 기침 때문에 고위직에서 낙마한 예의 장관을 동정한 여당편향의 신문은 퇴임식에서 또다시 기침을 하시는, 매사 지나치게 박백(薄白)하신 성품 지닌 장관의 근황을 실어 우리로 하여금 고소(苦笑)를 머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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