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45
발본색원(拔本塞源)
김현임(수필가)
몇 날 며칠 머릿속을 감도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이다. 폐단의 근원, 그 뿌리까지 파헤쳐 싹 쓸어 없앤다는 오싹한 단어 아닌가. 범죄, 전염병 따위에 쓰이는 용어의 섬뜩함에 고개를 흔들지만 그 언저리를 또 다시 파고드는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또한 아궁이 앞에서 오래된 구두를 닦다가 떠올렸을 것이다.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새와 즐겁게 노는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낡아 귀퉁이 해진 책에서 이 대목을 읽던 날 나는 얼마나 마음이 따뜻했었던가를. 그러다가 고양이와 인간의 공존, 아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과 여타 생명체와의 공존에 따른 모순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다이어트 프로그램 받은 다음에 스파에서 사우나하고, 잠깐 낮잠 자고 나면 건강검진, 미용 서비스 받을 거... ’ 고급 미용 패키지를 연상케 하는 일정의 주인공이 개라고 놀랄 건 없다. 나날이 성업 중이라는 동물전용 호텔, 미용실, 유치원, 스파, 장례식장 등등의 시설이용에 고양이 또한 차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날 주인에게 버림받아 내팽겨진 고양이들, 천적(天敵)도 전무하니 도시의 밤거리는 길고양이들의 점령지로 접수된 지 오래다. 발기발기 찢겨 나뒹구는 쓰레기봉투도 그렇지만 짝짓기 괴성을 지르며 무법천지 날뛰는가하면 으슥한 곳에서 공포영화의 오싹함을 재현하며 돌연 출몰하는 묘족(猫族)이라니!
오랫동안 쓰던 바늘 하나 부러짐이 안타까웠던 여인의 구구절절한 석별사(惜別辭), 조침문(弔針文)을 기억하는가. 어느 장난감 가게 주인은 봉제인형을 팔면서 봉투 밖으로 완구의 머리가 튀어나오게 포장한단다. 혹여 숨이 막힐까 봐, 또한 어떤 이는 컵을 쓸 때 꼭 맨 뒤쪽의 것을 꺼낸다고 했다. 앞줄에 있는 것들에 치여 행여 컵들이 상처를 입을까 봐, 혹 울적해할까 봐. 이 모두가 생명이 없는 존재에도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행대상(移行對象) 개념이란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함께하는 온갖 사물들에 대한 존중심, 그들을 향해 좀 더 섬세한 처신을 했더라면 작금의 고양이 사태까진 이르지 않았을 것 같다.
본디 발본색원은 정신의 재무장을 뜻하는 고사에서 나왔다. 춘추좌씨전에 주왕이 이르기를
“나는 백부(伯父)에게 있어 마치 옷에 갓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와 물에 근원이 있어야 하듯 백성들에게 주모자가 있어야 한다. 백부께서 만약 갓을 찢어버리고 뿌리를 뽑아 근원을 막고(拔本塞源) 집주인을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며 왕은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친족에게 호소했다. 더 나아가 명나라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발본색원론에서 ‘하늘의 이치를 지니고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라는데 있다.’고 사사로운 탐욕은 근본을 뽑아버리라 권했다. 어느덧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월이 흘러 이제 풀을 베고 뿌리를 캐내는 전초제근(剪草除根)과 더불어 범죄조직의 소탕령 문구로 전락한 사자성어다. 베고 돌아서면 무성한 풀과의 실랑이도 전쟁이라 했다. 그러니 네 발 달린 짐승에게 발본색원이 어찌 실현 가능하겠는가. 다만 길냥이를 향한 냉혹한 시선에 문득 떠올린 단어일 뿐.
고양이의 보드라운 등허리 터럭에 쏟아지는 꽃가루 같은 봄 햇살에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제명의 시를 쓴 이장희 시인도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서 고양이는 좋은 소재거리였다. 찰스 램은 옴 오른 고양이조차 사랑했다. 이 책 속에서 고양이는 치욕스런 과거를 부정하는 잔인한 존재로 묘사 비유되었지만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에서 발견한 이런 대목은 주린 배로 거리를 떠도는 숱한 길냥이를 대변한다.
‘굶기는 우리를 비참함의 아가리로 집어넣지만, 그것은 아무런 분석도, 정치적 행동을 위한 촉구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벌주기 위해 달리기 시작해, 거리를 차례로 뒤로 하면서, 속으로 야유하면서 나 자신을 계속 밀어붙였고, 멈추고 싶은 기분이 들 때마다 소리 없이 그리고 사납게, 나 자신에게 고함쳐댔다. 그렇게 애쓴 덕에 나는 결국 거리를 따라 가고 있었다. 더 멀리 달릴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난 나머지 거의 울 지경이 되어, 마침내 멈춰 서자 온몸이 후들거렸다. 이윽고 나는 어느 집 현관 계단 위에 나 자신을 내던졌다. “그렇게 빠르진 않아!”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제대로 고문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일어나 억지로 거기 선 채, 나 자신을 비웃고 나 자신의 피곤함에 고소해했다. 마침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하여 나 자신에게 앉아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그나마도 그 현관 계단에서 가장 불편한 자리를 선택해서 말이다.’
글을 읽은 후 한동안 멍했다. 너무 오래 굶을 때면 마치 뇌가 그냥 머리로부터 가만히 빠져 달아난다고 했던가. 아니 두둥실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어깨에서 머리의 무게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글쓰기 외의 수단으로는 결단코 끼니벌이를 않겠다는 매서운 각오를 지닌 글쟁이의 처절한 심정 피력인가. 밤새 거리를 헤매어도 마땅히 배 채울 것 발견하지 못한 한 마리 길냥이의 넋두리를 누군가 대신 옮긴 건가 너무도 헷갈렸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오랜 반려이자 벗인 고양이를 척결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이 지상에서 목숨 잇기보다 더 숭고한 일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 우리가 버린 쓰레기로 간신히, 간신히 연명하려는 가련한 길냥이들을 포획 즉시 처분하든가, 하다못해 붙잡아 단종(斷種)시술을 시키든가 양자택일하라 종용한다. 그 난분분한 길냥이 처리 대책 중 어느 것도 명쾌한 비법은 없다. 집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졸지에 길거리로 내몰린 세입자의 처지랄까. 다니는 길목에 한 대접 먹이를 놓아주며 가엾은 길냥이들의 끼니를 챙기는 캣맘(Cat‘s Mom)들도 여론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양이, 대다수 지독한 새침떼기에 오만 도도하지만 결코 밉지 않은 우아한 족속이 언제부터인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궁박한 처지에 몰렸다. 급기야 묘족발본색원 캠페인으로까지 치달을 것 같은 이 사태를 막을 시원한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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