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46
독서상우(讀書尙友)
김현임(수필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종일 추적댄다. 속내론 아직 겁이 났던 모양이다. 다들 생업에 열중인데 이렇듯 한가롭게 활자의 숲이나 거닐고 있어도 될까. 성큼성큼 다가올 기세인 봄이 주는 까닭 모를 조바심, 하염없이 내리는 실비는 그런 번망함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다. ‘종가고문헌집’을 당겨 읽는다. 사흘 전 고봉 선생 선양위원회에서 펴낸 귀한 책자를 손에 넣었다. 감격을 참지 못해 펼친 버스 속에서 만난 단어였다. 그 ‘보타(寶唾)’의 감흥으로 설익은 글을 썼다. 답례 삼아 고봉선생의 종부(宗婦)님께 송부해 드렸더니 붓글씨체로 보내오신 정중한 어투의 답신... . 공부하며 꼼꼼히 읽어 내리라 작심하게 된 계기다.
일순간에 변화된 삶, 이제부터라도 내 바라던 대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자, 그러기 위해서 좀 더 공부에 치열하자 마음먹었건만 이제껏 몸 실었던 세상 아닌가. 범인(凡人)들의 가치관과 동 떨어진 새 삶의 행태가 좀 힘이 들었던가. 며칠 째 ‘맹자를 팔아 밥해 먹고’라는 이덕무 선생의 글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집안에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겨우 맹자(孟子) 일곱 권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200전에 팔아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실컷 먹고 벗인 유득공에게 가서 한껏 자랑을 늘어놓았더니 영재(泠齋)도 굶주린 지 오래라, 내 말을 듣자마자 즉각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쌀을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내가 마시게 하였소. 이야말로 맹자 씨가 직접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한 것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래서 나는 맹자와 좌구명, 두 분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찬송하였다오.’
이 대목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야 나 몰라라, 오로지 좀 먹은 서책과 벗 삼아 지내는 친정 오라비의 근황처럼 다가왔던가, 아니 뒤늦게 그 오라비 흉내를 내려는 누이라도 된 착각에선가. 오라비는 추위, 더위, 굶주림과 병에도 무관한 간서치(看書痴)의 경지를 이미 터득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좇아가며 책을 읽다가 그 심오한 맛에 기쁘기가 한량없으면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대는, 그 바보 같은 당신 인생의 색채를 지극히 아낀다는 저 무관 선생처럼 나 또한 내가 지닌 온갖 약점 속에 어찌 이런 고상한 성벽이 한 줄 스며들었을까. 어쩌면 내 단 하나의 장점일 책을 즐기는, 그것도 저 아득한 고문(古文)을 달달한 사탕처럼 여기며 매번 침을 삼키는 이 괴벽만은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다. 본디 고분고분치 않은 성품인지라 마땅히 우러를 스승이 드물고 흉금 털어놓을 벗의 존재 또한 손가락 두 개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인 나, 하니 이렇듯 옛 글 속 인걸들과 연을 맺는 독서상우(讀書尙友)라도 즐길 밖에다.
독서백편의자견(讀書百編意自見)이라, 아무리 어려운 책도 거듭해 읽으면 그 뜻은 저절로 알아진다 했다. 책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마음으로 해득해야 된다는 독서삼도(讀書三到)도 실천해 볼만 하다.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자손을 일러 독서종자(讀書種子)라 하였다. 하지만 독학(獨學)은 자칫 고루(固陋)함에 빠질 위험이 있단다. 다만 내 바라는 건 독서상우(讀書尙友)려니 책을 읽음으로써 옛날의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는, 그 탐나는 경지까진 언제 이를 것인가.
어제 오늘은 총총히 하늘을 가르는 새에게 ‘푸른 산 그늘 속으로 누구 기약 있어 바삐 가나?’ 묻는가 하면, 절벽에 만개한 매화를 보고 ‘늙은이 되어 보는 꽃은 안개 속에서 보는 듯하네’라던, 화가가 아닌 문장가 김홍도 선생과 꽤 긴 시간을 보내었다. 오늘의 내빈은 짐작하다시피 삼가 호남의 거유(巨儒)이신 기대승 선생님이시다. 만나자 마자 선생께서 내게 건네신 귀한 문자는 ‘견권(繾綣)’이다. 마음속에 굳게 맺어진 정(情)을 뜻한단다. 보낼 견(遣)을 실 사(絲)로 엮었으니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단단히 이어진 ‘정다울 견(繾)’이 되고, 권(綣) 자 또한 책을 헤아리는 단위인 권(卷)을 실 사(絲)로 엮어 ‘서로 따르다, 서로 떠나지 않다’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권(綣)은 ‘쇠뇌’라는 돌을 쏘는 힘이 센 화살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하단다. 겉으로는 그대와 나 결속이 누구보다 탄탄하다 호언장담 위장하나 실은 언제 등 돌릴지 모르는 얼치기들의 범람이 어제오늘인가. ‘아름답고, 굳세고, 강하게,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뜻하는 견권을 두 손 넙죽 절하며 받아 챙긴 이유다. 그 단어가 주는 무게에 휘청거리다 결국 책을 덮고 누웠다.
겨울 끝자락에서 봄의 시동을 거는 비는 여전히 추적거린다. 절기는 겨울, 때는 밤, 일기(日氣)는 비오는 날이 독서삼여(讀書三餘)이니 가장 책 읽기 좋은 요건이라 하였다. 소근 대는 빗소리도 놓치지 않고 전해주는, 자연의 작은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집에 사는 호사려니 옛 어른의 책장 넘기시는 소리 닮은 빗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굳이 책을 펼치지 않아도 흐뭇하다. ‘그대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라던 선인(先人)의 표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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