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47
작비금시(昨非今是)
김현임(수필가)
코끝에 훅하고 향긋한 빵 냄새가 걸리는 순간이 있다. 불현듯 치미는 극심한 탐식증은 대부분 지독한 쓸쓸함과 동반해 찾아온다. 적막한 유배지에 누워 천정 가득 지난 날 맛보았던 음식들을 하염없이 떠올리던 교산(蛟山) 허균 선생, 그 분께서도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쩍쩍 다시다(屠門大爵)’는 글로 지난 날 당신이 즐기던 별미(別味)의 허기를 달래었다. 땅콩버터 듬뿍 바른 빵에 따뜻한 우유커피가 이렇듯 내 입 끝에 걸리는 건 적소(謫所)의 나날처럼 이어지는 무력감 탓인가.
땅콩버터? 부쩍 부러워지는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사용하는 모든 땅콩 제품을 만들어낸 조지 워싱턴 커버라는 미국의 식물학자다. 1864년 흑인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노예해방이 선언된 직후였다.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흑인차별은 도처에서 성행했다. 다행히 마음 좋은 주인의 배려로 조지 커버는 흑인 최초로 아이오와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식물학, 세균학, 화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미술과 요리, 음악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맨, 그를 일러 ‘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부를 정도였다. 단 한 가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건 그로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었다. 여전히 혹독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흑인들을 위해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는 폭력적인 시위 대신 ‘학자’로서의 길을 택한다. 흑인과 백인뿐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주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인류를 위해 공헌할 도구로 선택한 건 땅콩이었다. 그 결과 땅콩버터, 땅콩 구두약, 땅콩 식용유, 땅콩버터... . 땅콩을 활용한 200여 가지 넘는 제품을 고안해낸다.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가 된 조지 커버,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발명품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한다.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한 일화다. 어느 날 그 앞으로 땅콩 한 봉지와 100달러가 보내왔다. 원인 모를 병에 걸린 땅콩의 치유법을 개발해 주면 매달 100달러씩 송금하겠다는 조건을 내민 땅콩 재배농의 제안이었다. 그날부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조지 커버는 병의 치료법을 발견하고 서둘러 답신을 보낸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땅에 인간들이 땅콩을 키우는 것에 대해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병의 원인을 알아냈다고 해서 제가 어찌 대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그의 사후엔 조지 커버라는 이름의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열악한 환경의 흑인청년을 비롯해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 재산을 기부한 큰 인물이 조지 커버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神)과 가족 외에 세 가지라고 했다. 우러러볼 사람, 기다려야 할 사람, 그리고 따라가야 할 사람이란다. 어린 시절엔 우리 모두 그런 영웅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거리의 간격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는 항상 멀리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꾸준히 그를 쫓아가는 것으로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게 보통 사람이다. 만인이 조화로운 세상, 그 이상향(理想鄕)을 도모하던 교산 선생의 꿈은 안타깝게도 무위가 되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끈질긴 꿈은 언젠간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89세, 망구(望九)를 코앞에 둔 할머니였지만 맵시 있는 한복 차림의 곱게 나이 든 노마님은 때론 담담히, 때론 격앙된 어조로 14살부터 8년 간 이어졌던 당신의 일본군 위안부시절을 술회했다. 죽음의 유혹에 빠질 만큼 처참했던 어린 소녀의 생, 그 화면을 보고 있는 내내 분노의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졌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굳게 믿는 미국의 영화감독 스티브 맥퀸, 그에게 아카데미 최초로 흑인 감독 작품상의 영예를 안긴 ‘노예 12년’의 스토리가 할머니의 신산한 삶의 여정과 겹친다. 문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을 선 적국의 군인들, 그들을 상대해야 했던 식민지 출신의 소녀, 영화 역시 어느 날 노새나 말 같은 짐승처럼 누군가의 소유물로 전락한 한 흑인 노예의 12년을 다룬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여타 흑인을 다룬 영화들과는 달리 노예제도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동정의 여지를 주지 않는 대신 도저한 저항이 흐른단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고 누군가에게 아버지와 남편이라 불리던 30세의 남자, 그 저항 못할 억압으로 유린된 개인의 족적을 세밀하게 다루면서 노예제도라는 시스템 오류가 과연 백인의 선함에 기대어 극복될 수 있는가 질문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고 조종해 온 노예사 전반과 인간성의 잔혹한 측면에 대한 반성으로까지 영화는 사유를 확장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도적이 도리어 몽둥이를 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한가. 그에게 자신의 예전 잘못을 뉘우치는 작비금시(昨非今是)의 기대는 무리인가. 최근 덴마크를 방문 중인 아베는 안네 기념관을 들러 ‘역사 앞에 진실하기 위해서 이곳을 방문하였다,’, ‘다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독도도, 위안부 문제도 우리는 모르쇠요, 역사적 사실조차 없다 억지주장을 펼치는 일본이다.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파렴치다.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 오늘 나를 침울함의 수렁에 빠트리는 이유 중 하나다. 죄 많은 인간들이 지상에 너무도 가득 차 있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라도 마땅히 처치할 방도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묵묵히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둔 채 그들이 지은 죄가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가 그 죄를 되받도록 하는 수밖에... 라며 단념해야 할까. 무엇보다 되풀이 될 위험 소지 다분한, 아니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는 그 부끄러움 모르는 역사의 오류 앞에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능력한 나를 향한 견딜 수 없는 쓸쓸함과 허기... . 나는 땅콩버터 바른 빵을 위해 차의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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