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김현임(수필가)
펼치는 지면(紙面)마다에도, TV 화면에도 온통 꽃 소식, 바야흐로 꽃 계절이다. 숲 속 나무들의 봄날 약속은 다 같이 초록 잎을 피워 내는 것이라지만 보름이나 개화를 앞당긴 벚꽃을 향해 약속을 어겼다는 표현을 쓰다니! 내 집 마당의 봉선화, 나팔꽃, 분꽃, 채송화, 백일홍 등등의, 잠 덜 깬 토종 꽃들의 새싹들이 다칠 새라 발밑을 조심, 조심 제 시기에 맞춰 피어난 봄꽃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나누다가 가끔 버스를 놓친다.
‘아! 화초는 한낱 식물이니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들이는 법을 모르면 안 된다. 건조와 습기, 추움과 따뜻함을 알맞게 맞추지 못하고 천성을 어기면 반드시 시들어 죽을 것이니 어찌 싱싱하게 피어난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랴. 하찮은 식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그 마음을 애타게 하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해칠 수 있겠는가’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에 뛰어나 안견, 최경 등과 삼절(三絶)이라 불리던 강희안은 화초를 가꾸는 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를 통해 건강하게 사는 법과 이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엮은 꽃 가꾸기 지침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완성된 후 화초 가꾸기를 소일거리로 삼는 선비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소일(消日)은 어떤 일에 마음을 붙여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뜻하니 지루한 겨울을 버텨낸 우리에게 꽃보다 반가운 존재가 있던가.
‘화무는 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흥얼거리시던 봄노래 가사다. 열흘 붉은 꽃 없듯이 세무십년(勢無十年), 하늘에 나는 새를 떨어뜨릴 만큼이던 권세도 채 십 년을 못 채우고 기우는 법이니 매사 진중하고 겸손해야한다는 진리다. 꽃이라고 참으로 꽃다운 생을 누리다 가는가. 꽃은 우리를 위해 피지 않는다. 한껏 외모를 가꾸어 자신의 유전정보를 다른 꽃에게 전달해 줄 심부름꾼을 유혹해야하는 명운을 타고났으니 그 사명을 이루려 한껏 치장했을 뿐이다. 바람의 힘을 빌리는 풍매화(風媒花), 꿀이라는 미끼로 벌레를 고용(?)해 제 목적을 이루는 충매화(蟲媒花)들의 구조가 다른 이유다. 식물의 4대 요소인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을 다 지닌 게 갖춘꽃, 그 중 단 한 가지라도 빠트린 경우엔 모두 안갖춘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 송이 꽃 속에 암술과 수술을 다 가진 양성화(兩性花)들이라도 스스로 수분할 경우 유전자가 단순해져서 튼튼하게 자라기 어렵기에 암술머리는 가능한 제 꽃가루가 닿지 않게 한껏 솟아올라 자리해 있다니 되도록 좋은 종자를 얻으려는 꽃들의 치열한 전략이 놀랍다.
열흘의 생을 최대한 구가하려는 듯 봄꽃들이 정신없이 피고 있다. 식물은 기온과 광주기(光週期)를 감지하는 생체 시계를 갖고 있어 그 조건에 맞으면 ‘플로리겐’이라는 호르몬이 나와 개화를 유도한단다. 작은 식물들이 첨단센서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올해는 갑자기 기온이 확 오른 바람에 꽃들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개화시기를 어긴 꽃들 때문에 망친 지자체의 꽃 축제가 한 둘이 아니라지만 여기 절대로 그럴 염려가 없는 꽃도 있다. 200년 만에 되살린 조선의 비단 꽃이다. 조선 순조(1790-1834)의 기축년 궁중 잔치에 사용된 꽃항아리, 화준(花樽)을 국내 최고의 채화(綵華)장인인 동국대 황수로 교수가 3년에 걸쳐 재현, 완성해 냈다. 우리의 옛 궁중에서는 살아있는 꽃을 단 한 송이도 꺾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장식용 꽃을 모두 직접 손으로 만들어 썼다는 채화의 시작은 고려 공민왕(1330-1374) 때부터다.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그녀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모란꽃을 채화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좋아하던 꽃을 방 한 가운데 꽂아두고 온종일 바라보았다던, 그 애절함이 빚은 비단꽃이다.
종류도 다양해서 임금이 군신에게 내렸던 사화(賜花), 머리에 꽂는 장식용 잠화(簪花), 잔칫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궁중악 가무 정재를 장식하는 의장화(儀仗花), 채색상에 올리는 지당판(池塘板) 등등이 모두 채화다. 황 교수는 비단을 두들겨서 만든 꽃잎에 송홧가루와 꿀로 수술을 만드는, 이 기술을 깨치는 데만 무려 30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화유중개일(花有重開日)이요, 인무재소년(人無再少年)이라, 덧없구나! 꽃은 봄이 되면 다시 피지만 사람에게는 한번 간 청춘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자신의 나라가 영원하리라 믿었던 공민왕의 비단꽃! 가화(假花)는 시들지 않고 그 자리에 있거늘 꽃을 만든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머무는 순간이 너무 짧아 아쉽기만 한 꽃 같은 존재가 따져들자면 한 둘이던가. 사랑도, 우정도, 예술도 아름답다. 우리 생의 꽃으로 피어나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것들이다. 열흘 붉은 꽃이 없어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사진 속 꽃밭도, 뛰어난 그림 속 정원도, 향기 물씬 풍기는 실재 뜨락도 아니라 눈을 지그시 감고 떠올려 보는 정원이 백미(白眉)라고 했다. 궁중의 내명부와 외명부 모두가 참석해 벌였다는 호화로운 밤잔치, 그 야진찬(夜進饌)의 풍경 속 벙그러진 비단꽃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