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51
조불노석(朝不盧夕)
김현임(수필가)
눈 끝에 길게 붉은 줄이 생겼다. 조불노석(朝不盧夕),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지 못하더라고 뜻밖의 눈병으로 쓰라림의 고통이 며칠 째다.
말끔히 청소를 끝내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롭게 읽는 신문, 거기에 감미로운 선율의 배경음이 깔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내게 그 시간처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 그런데 요즘 들어 신문을 읽다가 생긴 변고가 한 둘이 아니다. 입속에 툭툭 돋았던 돌기도 한 달 째, 좀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들이여, 이젠 그만 그 증상에서 벗어나라는 외신(外信)기자들의 충고를 들을 만큼 새삼스레 들추기에도 지치는 기사들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이다. 아픔의 강도(强度)도 여전하다. ‘선생님들 덕에.... .’하는 제명의 기사에 무언가 울컥 치받는 느낌이더니 목울대가 아렸다. 어쨌든 짠물 흐르는 눈을 종일 부벼 댔던 까닭이리라. 스물다섯 앳된 얼굴의 선생님은 어느새 내 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컴퓨터 자판에 서툴던 시절, ‘딸’을 치면 번번이 ‘달’이라는 오타(誤打)가 화면에서 껌뻑이곤 했다. 그래서 얻게 된 ‘낮달 같은 내 딸’이라는 내 책의 한 구절처럼 매사 호들갑스런 엄마와는 달리 딸은 조용한 달 같은 성품이었다. 딸이라기보다는 천성이 병약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누군가 선물로 보낸 소울 메이트, 영혼의 벗이랄까. 다시 회억(回憶)하기도 도리질해지는 신산한 나날을 함께 견딘 동지 같은 딸이다.
스물다섯, 바로 그 나이에 딸은 낮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는 야간대학 음대에 적을 두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이르는 말인 아침에 저녁의 일을 생각지 못한다는 조불노석(朝不盧夕)은 아침에는 밥을 먹었으나 저녁에는 죽을 먹는 궁핍함인 조반석죽(朝飯夕粥)을 떠올리게 한다. 딱히 경제적인 이유 만이었을까. 한 장의 전기장판으로 시골 한옥의 을씨년스러운 냉기를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이 방, 저 방에다 감히 난방을 할 처지가 못 된다고 지레 겁을 먹던 형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불기 없는 방에서 베토벤을, 브람스를 치노라면 차츰차츰 엄습해 오는 냉기에 제 피가 송두리째 얼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돌연 멈추고 꽁꽁 언 제 손을 내 젖무덤에 들입다 집어넣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뜩 웅크린 채 피아노 소리에 취해 있던 엄마의 혼비백산에 딸은 태연히 내뱉었다.
“왜? 나를 사랑한다면서”
기사를 읽는 내내 딸의 그 목소리가 이명(耳鳴)처럼 들려왔다. 남의 설움에 귀 기울이며 슬픔에 동조해 훌쩍이면서도 결국은 이 세상 모두 제 설움에 겨워 통곡하더라고 나 또한 그래서였을까. 눈물 같은 건, 저 깊은 속에서 치받치는 뜨거운 눈물 같은 건 진즉에 작별한 줄 알았다. 그런데 종일 내 눈가는 축축이 젖어있었다.
영하 5도를 육박하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모녀는 부엌 목욕을 감행했었다. 제 등을 문질러주는 내게 채 비누기 가시지 않은 머리를 틀어잡고 빨리 보일러 끄라며 다그치던 딸.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내 살점 같은 딸에게조차 그토록 잔인한 내핍을 강요하였던 것일까. 어느 날 무심코 펼친 딸의 노트 첫 장에 쓰인 ‘장내하 혜청춘(壯奈何 兮靑春)!’이라는 문구, ’어찌할 꺼나, 이 청춘을!’에 어미의 가슴이 한동안 얼얼해지기도 했다. 밤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도망 다니는 나를 부추겨 함께 한시(漢詩)를 공부했고, 초저녁 잠 많은 어미를 한 대접 가득한 커피로 달래가며 주말의 명화로 초대했던 딸이었다. 열심히, 남보다 배는 열심히 서둘렀지만 실속을 얻기보다는 매번 생채기투성이가 되는 엄마를 보는 안쓰러움. 뜨거운 햇살에 못 견뎌하는 연약한 그늘식물 체질의 어미임을 진즉에 눈치 챘을까. 밤마다 어김없이 환하게 뜨는 황홀한 달 노릇을 톡톡히 하던 내 딸.
가슴 한복판에 좀처럼 가시지 않는 멍울처럼 자리한 게 자식이라면 딸은 부피 큰 멍울이다. 생각만으로도 아릿한 딸들의 비보(悲報)에 젖지 않는 모성(母性)이 있을까. ‘글마다 그 놈의 강아지와 딸, 쓸쓸함에서 그만 벗어날 수 없어?’ 그때처럼 이 글을 읽으면서 분명 내 딸은 또 타박할 것이다, 제발이지 이제는 좀 다른 화두(話頭)의 글을 쓰라고. 잔혹한 나날들을 참고 참은 건 우리에게 보다 나은 훗날이라고 부르는 미래가 있어서였다. 의문지망(依門之望), 문 기대어 하염없이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가슴이 찢어진다. 놀러갈 때는 반드시 부모님께 갈 곳을 알리는 유필유방(遊必有方), 집 밖을 나갈 때에도 필히 부모님께 아뢰고 돌아와서는 꼭 얼굴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출고반면(出告反面)의 순서도 어긋났다. 더불어 누릴 미래를 빼앗아버린 죄 값을 어찌 할 것인가. 비록 몸뚱이 만일지라도 마지막 한 명까지 우리 곁에 돌아온다면? 그런 처참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백배천배(百拜天拜)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면? 분한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는 통입골수(痛入骨髓)에 그 어느 것도, 어느 말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딸이 보름달 닮은 제 딸을 키우며 첫 엄마로서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라는 게 면목 없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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