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강진읍으로 귀양을 온 다산은 동문밖 동천여사(東泉旅舍), 즉 동문 밖 샘터 옆에 있는 여관격의 주막집에서 죽은 듯 지냈다. 바깥출입은커녕 좁아터진 봉놋방에서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냈다. 그리고 1802년 10월 거의 1년이 다 되어갔을 때 서당문을 열었다.
사의재란 이름은 1803년 11월 10일에 썼다. 그러니까 귀양 온지 이태를 넘기고 갑자년(1804년)이 새롭게 열리기 직전이었다. 서당문을 열자 황상, 손병조 등 여러 사람이 제자가 되어 다산에게 글을 배웠다. 제자들은 독수공방 홀로 지내던 다산에게 아주 가까운 관계가 되었고 측근이 되어 주었다. 비록 좁은 봉놋방이고 술을 파는 주막집이었지만 그와 관계없이 다산에게는 활기와 안정을 안겨주었다. 1년 동안 밤이면 술이나 마시고 낮이면 한숨이나 쉬던 세월을 종지부 찍고, 이제 젊은 사람 냄새를 맡으며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므로 다산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다산은 이러한 안정을 얻게 되자 어둠을 떨쳐버리듯 자신의 심지를 굳건히 갖게 된다. 약종 동생의 죽음, 약전 형의 흑산도 귀양과 함께 자신에게도 언제 어떻게 또 다른 형벌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불안과 초조를 떨쳐버리고, 이제 비로소 삶의 탄력을 느끼게 된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사의재라 명명했던 것이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며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라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것이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하였다.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고 한 것이다. 마땅함(宜)이란 의롭다(義)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에 서글피 여기니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은 이름이다. 가정 8년(1803) 11월 신축일 초열흘, 동짓달이나 이제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읽었다.
1803년 11월 20일, 다산은 이 글을 쓰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기운을 차린 것이다. ‘사의재’란 이름을 단 것은 네 가지를 마땅히 추구하겠다는 다산의 의지였다. 생각은 맑게, 용모는 엄숙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무겁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한 셈이었다. 생각이 맑지 못하거나 담백하지 않으면 귀신이 침범하는 법이었다. 옷을 흐트러지게 입으면 생각조차 흐트러지는 법이었다. 말을 많이 하면 또한 생각이 흐트러지기 때문이었다. 몸가짐이 무겁지 않아도 생각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심청정(心淸淨)과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지키겠다는 맹세이기도 했다.
다산의 천자문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특이했다. 첫 번째로 「천자문」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명했다. 왜 그랬을까. 「천자문」은 중국 남조 양(梁) 나라의 주흥사가 지은 사언시 형태의 250구이다. 천자 중에서 단 한 글자도 똑 같은 것은 없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만큼 어려웠던 시절, 마을 서당엘 다녔던 옛 사람들도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을 외웠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서당 아이들은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우 집 주, 큰물 홍 거칠 황, 하고 큰소리로 천자문을 외웠다. 그러나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은 각 구절마다 일관된 의미가 없었다. 즉, 하나의 숙어가 한 묶음의 구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천지현황을 해석해 볼 때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이다. 하늘이 검을 리 없고 땅이 누를 리 없기 때문에 글 배우는 입장에서는 애매모호하다.
“왜 하늘이 검습니까? 하늘은 파랗다고 해야지요.”
훈장에게 이런 질문을 당돌하게 할 아동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겠지만 훈장인들 뭐라고 대답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놈아! 가르쳐주면 가르쳐준 대로 따를 것이지, 무슨 잔말이 많으냐?”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고서 천자문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탈락한 아동들이 부지기수 생겨나고, 결국 공부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다산은 이 점을 착안하고 천자문을 스스로 지었으니 그것이 아학편(兒學篇)이다. 아학편은 두 글자씩 짝을 지어가며 가르치는 책이었다.
천지부모(天地父母) 군신부부(君臣夫婦)
형제남녀(兄弟男女) 지매제수(姉妹娣嫂)
조종자손(祖宗子孫) 질고생구(姪姑甥舅)
세 줄의 글자만 익혀도 일가친척의 구성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익히면 잊혀지지도 않는다. 바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렇게 상권 1천자와 하권 1천자의 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니 아이들의 머릿속에 그 어렵다던 한문이 쏙쏙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다산은 천자문 외에도 「사략」그리고 「통감절요」에 중심을 주는 당시의 학습법을 나무라면서 낡은 방식을 탈피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학습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문이란 무엇이더냐?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옛 사람은 학문이야말로 으뜸가는 의리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 말도 문제가 있다. 마땅히 ‘유일무이란 의리’라고 바로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되어서 배움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그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금수에 가깝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명심토록 해야 할 것이다.
다산은 일반 훈장과는 다르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제자들의 특성에 따라 가르쳤다. 즉 문학(文學)과 이학(理學)으로 전공을 살려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의재 서당은 출발했고 황상 같은 훌륭한 시인이 탄생될 수 있었다.
사의재가 이처럼 훌륭한 서당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다산의 높은 가르침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의재를 찾는 것은, 단순히 다산이 귀양 와서 지냈던 동문 밖 주막집이라는 사실보다도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대학자 다산의 ‘제자 길러내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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