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이의 안경」
- 강 현 옥 -
(동화작가)
학교 가는 길이에요. 양쪽으로 곧게 뻗은 벚나무에서 꽃눈이 내려요. 봄인데도 자꾸 하얀 눈이 내려요.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면 꽃눈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우수수 쏟아져 내립니다. 그 아래 내가 서 있어요. 갈래머리위로 꽃눈이 쌓일 때까지 가만히. 학교야 늦으면 어때요? 꾸지람한번 듣고 말지요 뭐.
봄비가 내려요. 느리게 안개비가 내려요. 꽃이란 꽃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에 새순이 돋아난답니다. 나는 그것을 알아요.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다 아는 일이에요. 그리고 세상 어느 꽃이라도 햇살을 이길 수는 없어요. 저것보세요! 제비꽃도 햇살에게 두 손을 들었는지 보랏빛 꽃망울을 터트리잖아요. 앙증맞게 예쁜 꽃이에요. 암, 그렇고말고요. 이건 사실, 할머니 말투예요. “암, 그렇고 말고. 우리 공주님이 최고지.” 할머니는 내가 뭘 해도 야단치지 않아요. 무조건 호통부터 치는 엄마와는 다르지요. 조그마한 제비꽃을 보니 동생 생각이 나요. 다섯 살인데도 걸을 줄 모르는 우리 선우.
「내 마음대로 안경점」어린이만 들어오세요! 학교 앞에 안경점이 생겼어요. 피아노 영어 보습학원이나 문구점이 빼곡하게 들어선 자리에 뜬금없이 어린이 전용 안경점이라니요? 돋보기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선영이 눈은 돋보기인가봐! 우리가 못 보는 걸 척척 찾아내는 걸 보면.”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돋보기는 내 별명이 되고 말았어요. 손 그늘을 만들어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까마귀 깃털이라도 쌓아놓았는지 칠흑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어요. 할머니가 빨리 오라고 했거든요. 병원 다녀오시는 동안 동생을 돌봐야 해요.
우리 가족은 모두 네 명이예요. 할머니 엄마 동생 그리고 나. 아빠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시골사시는 외할머니가 우리랑 살게 되었어요. 선우는 할머니를 아빠라고 불러요.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요. 엄마만 엄마라고 제대로 부른답니다. 엄마는 아빠 대신 돈을 벌어야 해요. 그래서 숨차게 바쁘답니다.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요.
“병원에서 뭐래요?”
“뭐라 긴. 사람이 늙으면 다 관절이 닳는 법이지.”
“나 때문이에요. 그래서 더 늙으신 거고.”
“아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 거여. 아는 병이니 걱정하지 마라.”
“오빠 네서 편히 사실 분을 내가 고생만 시켜드리니 그렇지 뭐.”
“나라도 널 도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여? 그런 소리 마라.”
“엄마, 내 팔자는 왜 이래요?”
“어허, 얘들 앞에서 뭔 소리냐? 그만해라.”
“사는 게 퍽퍽하니까 그렇지. 빚더미에 선우까지 아프니 정말 앞날이 캄캄해요.”
“얘야, 어떻게든 세월 견디면 언제 그랬냐하고 잘 사는 날이 온단다. 암, 그렇고 말고.”
“엄마는 그 말 밖에 몰라요?”
‘오늘은 꼭 안경점에 들어가고 말테야.’그런데 어쩌지요? 안경점 문고리를 잡기도 전부터 가슴이 쿵쿵 방망이질입니다. 이럴 땐 아빠생각이 나요.
“선영아,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꼭 이루어진단다.”
‘아빠~ 용기를 주세요!’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고는 안경점문을 힘차게 밀쳤어요. 놀랍게도 폭죽이 팡팡 터졌어요. 안은 금세 환해졌지요. 어디선가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내 마음대로 안경점의 1호 손님입니다.”
누군가 공중그네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요. 아하, 독수리로군요? 사람이 아니라서 놀랐지만 재미있기는 하네요. 독수리가 파랑색 안경을 끼고 멋지게 공중제비를 넘었어요.
“안경을 선택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독수리가 별빛 뒤로 사라지자 이번에는 병아리가 노란색 안경을 끼고 멋지게 공중제비를 넘었어요. 병아리가 별빛 뒤로 사라지자 공작새, 개구리, 카멜레온, 북극곰, 물개가 색안경을 끼고 차례대로 공중제비를 넘었어요.
‘아, 독수리처럼 멋진 날개로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파랑색 안경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시간을 선택하십시오.”
어? 내가 독수리에게 마음이 끌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정말 신기해요.
“한 시간을 원하셨습니다. 안경 사용료는 당신의 시간으로 지불하십시오.”
‘그깟 시간이야 너무 많아서 지겨운 걸?’
“시간이 지겹다고요? 요즘 드문 어린이로군요. 그렇지만 오늘은 공짜입니다. 당신은 우리 안경점의 1호 손님이니까요.”
나는 파랑색 안경을 끼고 독수리 등에 바짝 엎드렸어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기대가 됩니다. 독수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 날개 짓도 없이 날아올랐어요. 아픈 할머니와 동생이 떠올랐지만 눈 감아버렸어요.
독수리를 타고 날아올라요. 비행기위로 붕붕 구름위로 붕붕. 바람이 거칠수록 나는 독수리 등에 납작 엎드렸어요. 어느 곳에 다다르자 바람이 멈추었어요. “하늘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 하늘나라래요? 사람들은 걷지도 않고 미끄러지듯 지나가요. 세종대왕도 지나가고요. 정약용선생도 지나가요. 한복을 단정히 입은 김영랑 선생도 보이고요. 아? 우리 아빠에요.
‘아빠~’
‘오 선영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하늘나라 사람들은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눈대요. 그래서인지 고요해요. 오로지 그윽한 향기만 가득할 뿐이에요. 아빠는 독수리에게서 나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등을 돌리더니 손수 나를 업었어요. 얼마만일까요? 아빠의 넓은 등에 업힌 것이. 나는 아빠 등에 얼굴을 묻고는 킁킁 냄새를 맡았어요. 달맞이꽃 같기도 하고 복숭아 냄새 같기도 해요. 난 기분이 좋아요.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상쾌해요.
‘선영아, 아빠는 매일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래서 선생님이 돋보기라고 하셨고.’
‘어? 어떻게 아빠가 그걸 알아?’
‘아빤 늘 네 곁에 있으니까. 안경점 문을 열기 전에 넌 기도를 했지? 내가 “용기”를 가지고 잽싸게 네게로 날아갔단다. 구름위로 붕붕’
‘독수리처럼 붕붕?’
‘그렇지!’
‘아빤 다 알고 있었네? 그러면 엄마가 아주 힘들어하는 것도 알았어?’
‘그럼. 알고말고.’
아빠의 얼굴이 동백꽃처럼 붉어졌어요.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요.
‘엄마는 모두 이겨낼 거야. 우리선우도 건강해질 거고. 할머니도 곧 좋아지실 거야.’
‘아빠가 우리를 지켜줄 거지?’
‘그럼. 언제까지나.’
아빠는 다시 달맞이꽃처럼 환해졌어요. 나를 등에서 내리더니 이번에는 손 무동을 태워주었어요. 우리 얼뚱아기 하면서 말이에요. 나는 아기가 되어 아빠의 손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고 애 태웠지요. 독수리가 환하게 웃어요. 설마 비웃는 건 아니겠지요?
아,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군요. 아빠와 나는 꼭 껴안았어요. 언제 다시 만날까요? 서로를 향해서 손목이 빠져라 흔들어댔어요. 그 사이 아빠는 점이 되더니 사라지고 말았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내 마음속에 이미 아빠가 들어와 있으니까요. 독수리 등을 타고 하늘나라를 지나고, 구름을 지나고, 비행기를 지나서 안경점으로 돌아왔어요. 내가 파랑색 안경을 벗자 독수리가 별빛 뒤로 사라졌어요. 이윽고 공중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손님, 만족하셨군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나는 안경점 문을 밀치고 나왔어요. 밖은 아까 그대로예요. 새로 온 게임기에 엿처럼 눌러 붙어있는 아이들하며 거리에 넘치는 봄 햇살하며. 아 맞다? 할머니! 선우! 나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서 뛰어가요. 볼 살이 흔들리고 갈래머리가 흔들리도록.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