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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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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 정원, 깊은 역사의 속살을 드러내다
한양대 정민 교수 학술연구 용역 최종 결과물 책자 발간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의 가치와 문헌기록

백운동 별서 정원, 역사성과 함께 강진 자랑의 백미 두각

 

정민 교수는 이미 강진에 알려진 학자이다. 그보다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학자여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특히 정민 교수는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 등 다산의 1등 제자 황상에 대해 처음으로 학계에 발표, 큰 반향을 일으킨 학자이다.

이러한 저서를 통해 정민 교수는 강진과 인연이 매우 깊다. 그런 정민 교수가 이번에 ‘강진 백운동 별서 정원의 가치와 문헌기록’이란 책자를 발간했다. 과연 어떤 내용인지 정민 교수가 지은 책 내용을 간추려 특집으로 다뤄보았다. <편집자 주>

  
백운동 별서정원 전경

강진의 전통 원림 백운동 별서 정원

백운동 별서는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기슭을 끼고 백운동의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월출산이 배산(背山)이 되고, 백운 계곡에서 갈라진 양 날개가 좌청룡 우백호를 이뤄 국면을 펼치며 그 앞쪽에 불쑥 솟은 안산을 갖춘 전형적인 길지 명당터이다.

백운동 별서는 차폐림 구실을 하는 동백나무 비자나무 등 상록수림과 집 옆을 흐르는 계류에 의해 아래쪽 안운마을과는 이중으로 차단되어 있다. 다산이 백운동의 제2경으로 꼽은 산다경(山茶俓)의 ‘유차성음(油茶成陰)’에 해당된다. 마을에서는 이렇듯 겹겹의 차단벽으로 인해 가려진 별서 공간이 눈에 전혀 띄지 않아 진입로를 돌아 들어오면서도 별서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되어 있다.

계류는 집과 마을을 가르는 또 하나의 분명한 경계선이다. 계류를 지나면 대문을 만나기 전에 옆으로 길게 뻗은 절벽이 시야를 우뚝 막아선다. 다산이 백운동 제6경으로 꼽은 창하벽(蒼霞壁)이다. 창하벽이 끝난 지점에 백운동 별서의 대문이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외원은 진입공간과 계변(溪邊) 공간, 정선대 공간과 운당원 공간, 백매오 공간 등 다섯 공간으로 나뉘고, 이곳에 백운동 12경 중 9경이 배치되어 있다. 외원은 담장으로 차단한다. 또 본채 내부에서 밖을 보면 정선대가 시선을 가로막고 정선대는 다시 시야를 본채 쪽으로 돌려세워, 관람자의 시선이 백운동 별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내원 공간은 평면도로 보면 장방형의 구조로 원래 산비탈이었을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었다. 본채에서 한 층 내려선 곳에 시내 쪽 담장을 끼고 제9경 취미선방(翠微禪房)이 자리잡았다.

유상곡수는 계류에서 물을 끌어 바깥 담장 밑으로 난 수구를 따라 흐르다가 대문 옆의 작은 입수구를 통해 90도 꺾여 내원의 마당으로 흘러든다. 백운동은 집 곁으로 시내가 흐르는 이른바 계류 인접형의 별서이지만 자연적인 계류에 만족하지 않고 이 계류를 내원으로 끌여들여 부지 안을 관통한 뒤 다시 합류시킴으로써 부지 관류형의 특징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백운동 별서의 연원과 내력

백운동 별서 정원은 고려 때 백운암이 있던 터에 자리를 잡았다. 고려 시절의 자취가 ⌜호산록⌟ ⌜만덕사지⌟ 등에 남아 있다. 광해군 때 인물인 혜암 김응정은 혜암문집에 <제정선대> 2수가 수록되어 있는바, 그 제목 아래에 ‘월출산 남쪽 백운동이니 남은 터가 지금도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담로보다 근 100년 전에 정선대를 노래한 작품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뒤에 이담로에 의해 백운동 별서 정원이 본격적으로 경영되기 전부터 이곳의 승경이 널리 회자되엇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운동 별서 정원을 최초로 조성한 이담로는 바로 서주공 이빈의 아들이다. 노장적 분위기가 물씬한 담로(耼老)란 이름에서 보듯 은거의 삶을 즐겨 호를 백운동은(白雲洞隱)으로 썼다.

입산조인 이담로의 친필 기록을 통해 그가 묘사한 백운동 초기 정관과 그곳에서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백운세수첩'은 백운동에 전해 온 각종 기록과 시문을 모아 한 권의 책자로 묶어 낸 것이다. 그는 다른 글들도 실려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운동명설'은 백운동 골짜기가 그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밝히고 전체 풍광을 한눈에 보여준 글이다.

'백운동유서기' 는 백운동 별서 정원의 내부와 낱낱의 사물에 깃든 의미를 설명했다. '백운동 관물음'은 백운동 8영의 조목을 나열하고 그 연유를 적은 내용이다. 이담로가 꼽은 백운동 8영은 매(梅), 송(松), 연(蓮), 죽(竹), 국(菊), 난(蘭), 학(鶴), 금(琴)의 여덟 가지다. 이담로는 이 여덟 가지 사물이 ‘온갖 시름을 없애주고 티끌 하나에도 물들지 않게 해준다’며 그 쓸모를 예찬했다. '영신거'와 '영신축'은 새롭게 마련한 거처에 흡족해 하는 이담로의 시인의 마음을 담았다.

'백운금명'은 백운동 별서에서 가장 가까운 벗이 되어준 거문고에 이담로는 ‘백운금’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백운동장백해'는 자신이 평생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백운동에 묻히는 까닭을 설명한 글이다. 그의 이 같은 다짐은 삶의 끝자리까지 지켜져서 그의 묘소는 백운동 별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본채 뒤편에 부인 함평 이씨와 나란히 누워 있다. '백운동한면록'은 백운동 별서의 벗을 회심우(會心友)의 정관우(靜觀友), 그리고 합정우(合精友)로 나누어 꼽았다. 문묵도서(文墨圖書)를 회심우로 삼고, 수운화석(水雲花石)은 조용히 관조하는 정관우가 된다. 또 등상죽침(藤床竹枕), 즉 등나무 평상과 대나무 베개는 마음에 마침맞는 합정우로 삼았다. 책을 읽다 지치면 주변 풍경을 관찰하며 마음을 보듬고, 그것도 피곤해지면 평상에 벌렁 누워 꿈나라로 접어든다.

'원주이씨세계'를 통해 본 역대 동주는 다음과 같다. 1대부터 현재 15대까지이다. 이해, 이빈, 이담로, 이태래, 이언길, 이의권, 이현박, 이덕휘, 이시헌, 이면흠, 이환영, 이대림, 이절묵, 이효천, 이승현 등이다.

 

'백운첩'의 백운동 12경과 다산의 편지

백운동 별서 정원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단연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백운동을 직접 찾아가 그곳의 12경을 친필 시로 적어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백운첩’으로 꾸며 선물했다. 이 ‘백운첩’에 의해 비로소 백운동 12경이 명명되었다. 이밖에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만도 현재 여덟 통이나 남아있다.

12경은 다음과 같다. 제1경은 옥판봉의 ‘옥판상기(玉版爽氣)’다. 제2경은 백운 별서로 접어드는 소로와 그 양편의 동백나무 군락을 가리키는 산다경의 ‘유차성음’이다. 제3경은 백매오(百梅塢)의 ‘백매암향(百梅暗香)이다. 집 둘레 언덕에 심어진 100그루의 매화가 눈 속에 붉은 꽃을 일제히 피우면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을 법하다.

제4경은 홍옥폭(紅玉瀑)의 ‘풍리홍폭(楓裏紅瀑)이다. 제5경은 집 옆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유상곡수(流觴曲水)’이다. 유상이란 물길 위로 술잔을 흘려 띄운다는 말이다.

제6경은 청하벽의 ‘창벽염주(蒼壁染朱’이다. 그림 하단 중앙 시내 옆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을 가리킨다. 제7경은 봉긋 솟은 소나무 군락이 있는 언덕인 정유강의 ‘유강홍린(蕤岡紅麟)’이다. 정유는 소나무의 별칭이고 홍린은 소나무의 껍질이 용의 비늘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제8경은 모란을 심은 화단인 모란체의 ‘화계모란(花階牡丹)’이다. 제9경은 취미선방의 ’십홀선방(十笏禪房)‘이다. 본채 바로 아래 초가를 얹은 세 칸짜리 사랑채다. 십홀은 좁은 크기를 나타내고 선방은 내부의 조촐함을 드러낸 표현이다.

제10경은 풍단의 ‘홍라보장(紅羅步障)’이다. 화면 가운데 솟은 바위에서 집 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단풍나무가 서 있다. 단풍철에 잎이 물들면 온통 붉은 비단 커튼을 둘러친 것 같아 이렇게 불렀다. 제11경은 정선대의 ’선대봉출(仙臺峰出)‘이다. 정선대에 오르면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11경이 되었다.

제12경은 운당원의 ‘운당천운(篔簹穿雲)’이다. 운당은 왕대나무인데 화면 우측 중앙에 대나무 숲이 그곳이다.

다산은 백운동에 관한 시를 13수 지었다. ‘백운동 이씨의 유자에 부쳐 제하다’는 1812년 9월 12일 다산이 찾아와 지은 시로써 ‘백운첩’의 첫머리에 서시 격으로 쓴 작품이다.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임금께 헌책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십무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반산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풍류는 예원진만 못함이 전혀 없고

명승은 고중영에게 소문이 더 났다지.

상자 속에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훗날에도 금석 같은 그 맹세를 안 바꾸네.

 

은자의 조촐한 삶을 살아가는 백운처사 이덕휘의 생활과 백운동의 조촐한 살림을 노래했다. 이렇게 시작된 시는 월출산 구정봉 서남쪽 정상 봉우리의 옥판봉, 백운동 입구에서 시내를 끼고 별서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 소로를 가리키는 산다경, 별서의 본채 주변 언덕에 100그루 매화나무를 심어둔 공간의 백매오, 동백나무 숲길인 산다경을 지나 백운 별서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방문자는 시내를 건너야 하는데, 홍옥폭은 시내 위에 놓인 다리 아래로 층이 져서 떨어지는 폭포의 이름이다. 다산은 시 속에서 이것을 제4경으로 꼽고 ‘풍리홍폭’, 즉 단풍나무 붉은빛이 어리는 폭포를 내세웠다. 이어서 시냇가 죽각에서 담장을 끼고 물줄기를 끌어와 마당의 두 방지(方池)를 거쳐 다시 울 밖으로 돌아 나가도록 설계된 아홉 굽이의 물굽이인 유상곡수, 이곳에 술잔을 띄워 주객 간에 노닐었는데, 다산은 ‘곡수유상,을 백운동의 제5경으로 내세웠다. 다음으로 본채에서 화계를 따라 내려와 유상곡수를 지나야 나오는 우뚝 솟은 절벽의 창하벽, 유상곡수를 지나 풍단 위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비스듬히 돌아 오르면 나타나는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 산등성의 정유강, 본채에서 취미선방을 거쳐 내려가는 계단 양편에 모란을 심은 화단의 모란체, 본채 바로 아래 초가를 얹은 세 칸짜리 사랑채를 가리키는 취미선방, 유상곡수 아래쪽 창하벽 위 단풍나무가 심어진 단을 가리키는 풍단, 창하벽 위 정유강 옆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 정선대, 백운 별서의 왼편 담장 밖과 집 뒤편의 1만 그루 대나무 숲을 말하는 운당원 등이 다산이 지은 백운동 13수이다.

다산은 월출산 등정을 두 차례 시도했으나 길이 가파르고 위험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간 일행은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그 때 백운동의 주인 이덕휘가 맞았다. 두 사람은 이후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지금도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여러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1857년 정학연은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다산의 마지막 편지와 무려 27년의 거리가 있다. 다산 사후에도 이시헌이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지속적인 왕래를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운동을 노래한 역대 인물과 시문

앞서 다산의「백운첩」을 읽어보았지만 이 밖에도 백운동 별서 정원을 노래한 한시는 어떤 별서 정원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많다. 소쇄원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아도 누대에 걸친 다채로움의 측면에서 보면 백운동의 기록이 한층 더 풍부하다. 이곳은 옛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 주인도 바뀌지 않고 12대에 걸쳐 그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해왔다.

백운동을 노래한 역대 인물도 대부분 중앙의 쟁쟁한 문인들로 당시 유배객의 신분이 많다는 점이 특별히 흥미를 끈다. 또 여러 시문 속의 섬세한 묘사는 그 세부의 구체적인 복원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백운동 제영시는 흐름상 크게 두 단계로 대별된다. 먼저 17세기 후반 이담로에서 이연길로 이어지는 시기 김창흡·김창집 형제와 신명규·임영이 지은 <백운동 8영> 등 일련의 8영시 계열 작품군이 첫 단계다. 이후 19세기 전반 정약용이 이곳을 방문한 뒤 지은 <백운동 12승시> 시 연작 이후로 제자인 황상과 이시헌이 스승의 시에 화운하면서 12경시 계열의 작품이 잇따라 창작되었다. 이시헌의 경우 다시 2경을 추가해 14경이 되었다.

이렇게 백운동 제영시는 초기의 8영시 계열과 함께 후기의 12경시 계열로 대별된다. 이밖에 두 계열에 속하지 않는 작품이 18세기 전반 송익희의 <백운동 10영>이 있다. 이하곤과 김재찬, 초의와 허련, 김유 등의 작품도 따로 전하고 있다.

 

백운동과 강진의 차문화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백운동 별서가 갖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는 이곳 강진이 차문화의 한 축을 받친 산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운동 별서에는 다산이 백운동 12경 중 하나로 꼽은 운당원의 왕대나무숲이 있다. 넓은 대지에 펼쳐진 대밭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이 대숲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한다. 다산은 해배 이후 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백운동의 주인인 제자 이시헌에게 떡차 만드는 법을 일러주며 백운동 대밭에서 채취해 만든 차를 마셨다.

이를 계기로 차에 특별한 흥미를 갖게 된 이시헌은 주변의 차 관련 기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덕리의 <동다기>가 포함된 <강심 江心>이란 문집을 필사해 <동다기>의 실물자료를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백운동 입산조 이담로의 10세손인 이한영이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다맥을 이었다. 우리 차문화에서 다산 제다법에 따른 백운동 삼증삼쇄 떡차의 존재는 여러모로 소중한 의미가 있다.

정민 교수는 이와 같이 백운동 전통 별서 정원의 공간구성과 배치를 살피고 각종 문헌 자료를 통해 그 연원과 유래를 밝혔다.

그리고 이제 백운동 전통 별서 정원의 위상 제고를 위한 제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백운동은 몇 안 되는 조선시대 별서 정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백운동은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원림으로 각광 받아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는 담양 소쇄원 이상의 잠재 가치를 지녔다.

둘째, 백운동 별서 정원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역대 명류들의 시문이 대거 남아 있는 문화 공간이다.

셋째, 백운동 별서 정원은 차문화사의 중요 문헌인 <동다기>가 발굴되고 다산의 제다법에 따라 삼증삼쇄 떡차가 만들어진 차문화의 역사적 현장이다.

넷째, 차뿐 아니라 인근의 문화 명소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는 좀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다섯째, 백운동은 한편으로 고려 중기 불교사의 핵심을 이룬 역사 공간이다.

여섯째, 복원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강진군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백운동이 새로운 관광 명소가로 각인될 수 있도록 다양한 마케팅 전략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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