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의 시와 사상
금관문화훈장 추서 기념학술 세미나
2008년 11월 14일(금) 오후 2시
서울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제1부 학술 세미타 토론
*좌장: 허형만(목포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기조강연 ｢암흑의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길｣=김종길(대한민국 예술원회원,고려대 명예교수)
1)시지ꡔ시문학ꡕ 창간호가 박용철의 재정부담 및 편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1930년 3월 5일이었다.
그 창간호에는 영랑의 시가 13편 이하윤의 시와 번역시가 각각2편, 박용철의 시 5편과 번역시 2편, 그리고 정지용의 역시 1편이 수록되어 있어 영랑의 본격적인 시작은 그 무렵, 즉 그의 20대 후반에 와서야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ꡔ정지용시집ꡕ과 함께 ꡔ영랑시집ꡕ이 박용철에 의해 출판된 것이 1935년 가을이었다. ꡔ영랑시집ꡕ에는 영랑의 초기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가 스스로 ‘四行小曲’ 이라고 부른 바 있는 短詩가 그 절반을 차지하며, 그것들과 4행련으로 구성되었거나 그것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수록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ꡔ영랑시집ꡕ의 권두시인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는 분절이 되어 있지 않은 2개의 4행련으로 구성된 작품이며 ｢오-메 단풍 들것네｣는 분절이 되어 있는 2개의 4행련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리고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분절되지 않은 3개의 4행련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4행시 내지 4행련은 한시의 절구에 있어서처럼 매우 안정감이 있는 시형식이다. 그 안정감은 운율구조에서 나올 수도 있고 그것과 함께 의미구조에서 나올 수도 있다. 한시의 절구의 경우 후자에 해당되는데 그것의 의미구조는 이른바 ‘기승전결’ 의 형식을 취한다. 즉 ‘기’에서 시작하여 ‘승’을 거쳐 ‘전’에서 ‘기승’에서 조성된 의미의 흐름을 차단하고 새로운 의미의 흐름을 도입하여 ‘결’에서 그 흐름을 완결하여 종지시키는 것이다. 한시의 절구에 비해 우리의 三章時調가 읽기 위한 시형식으로서는 현저하게 불안정한 것은 그것이 3장, 즉 3행으로 된 운율구조를 가진데다가 종장, 즉 끝 행에서 기승전결의 ‘전’과 ‘결’ 이라는 운율의 완결감 내지 안정감의 핵심적인 원천의 의미구조를 축약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랑시에 있어서의 4행시나 4행련은 대체로 운율구조의 구실을 할 뿐 기승전결이라는 의미구조를 겸한 경우는 드물어 보인다. 즉 영랑시에 있어서는 4행시 내지 4행련 형식은 대체로 운율구조로서의 안정감을 위해 채택된 시형으로 정형적인 운율을 확보하기 위한 시적 방법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영랑의 시작품들은 대체로 기계적인 정형률은 아니더라도 정형적 운율에 준하는 운율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ꡔ영랑시집ꡕ에 수록된 영랑의 전기시는 특히, 소월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소월이나 영랑이나 노래를 지향하는 시를 쓴 시인인 것이다. 영랑시의 전기시가 소월시와 비슷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선 두 시인의 시적 음성이 대체로 여성화자의 그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이 두 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시에 있어서의 서정적 주체가 대체로 여성화자라는 지적을 상기할 때 별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두시인은 그와 같은 한국현대시의 일반적 특징을 대표하는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미래사판 영랑시집ꡔ모란이 피기까지ꡕ는 영랑의 시를 1,2,3부로 나누어 수록했는데 1부가 ꡔ영랑시집ꡕ의 작품들이요 2부가 “신문, 잡지에 발표된 작품을, 3부는 ꡔ현대시집ꡕ(노천명 공저)에 수록된 작품들을 모두 모았다.”는 편자의 말로 보아 그 책의 2부의 작품들을 영랑의 후기시로 보아 무방할 듯하다. 그 2부에는 도합 2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의 2편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毒을 차고｣ 라는 작품은 3개의 4행련과 1개의 2행련으로 끝남으로써 서구시의 쏘네트 형식을 본뜨고 있다.
*주제발표1. ｢저항정신으로 본 김영랑의 시｣-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전 한국시인협회장)
이제 우리는 김영랑을 논하기 전에 미리 분명히 해 두어야 할 명제가 하나 있다. 알재애 맞서 저항을 했던 아니 했던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영원한 민족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상 우리가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맞아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그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로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가장 한국적인 향토를 노래해서 민족의 언어를 참답게 지켰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1)영랑은 한국의 그 어떤 시인보다도 훌륭하게 한국의 향토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언어로 노래했다. 영랑의 시는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그가 태어난 남도의 민속과 풍광을 소재로 해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영랑의 시에는 많은 향토어, 토속어 및 방언들이 구사되었다. 영랑의 시적 진술은 매우 음악적이며 한국적이다. 영랑의 시가 형상화해내고 있는 정서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한국적 특수성에 가까운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전래 민요의 영향 아래 쓰여 졌다는 것과도 관련 되는 문제이지만-그의 시에 국악의 정조가 잘 녹아 살아 있다는 것도 영랑 시가 남다른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서정주의 회고담에 ‘촉기’란 말이 나온다. ‘촉기’란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온 우리 민족이 그 당한 바의 고통과 슬픔을 고통과 슬픔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극복해 오히려 생존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어떤 끈질긴 정서-고통을 극복한 고통, 슬픔을 극복한 슬픔-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김영랑의 후기시에 드러나는 저항성의 한 단면이 설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영랑의 저항시들은 그 배면에 슬픔과 한의 정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영랑의 시에는 비록 내용상 어떤 주장이나 이념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순수 서정시라 하더라도 그 취재된 소재, 시어구사, 시형이나 정서, 내밀한 심성 등에서 근원적이고도 심원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살아 숨쉬고 있다. 김영랑의 시들 중에는 저항시라 규정해도 손색이 없을 몇몇 작품들이 있다. 이들은 최소한의 시의 틀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경우 알레고리 형식의 비유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직설적 어법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毒을 차고｣, ｢춘향｣, ｢거문고｣의 시어를 볼 때 모두 우리 민족 혹은 국가를 표상하는 사적 상징들이다. 김영랑의 시에 반영된 민족의식을 네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민족의 언어를 지켜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그러하며, 둘째 시의 형상화에 동원된 시어, 소재, 정서, 대상 l등이 그러하며, 셋째 시에 간접화된 시인의 메시지가 그러하며, 넷째 식민지 현실을 고발한 저항시의 창작이 그러하다. 나는 이 같은 관점에서 영랑은 한용운이나 이육사 혹은 심훈에 준할 만한 식민지치하 우리 저항시인의 한분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문학사에서 영랑을 단순히 서정시인으로만 치부해왔던 것은 그의 서정시가 지닌 탁월성에 가려 저항시인으로서의 특성이 외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문학의 총체성은 객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저항시인으로서의 문학사적 위치도 확고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 오세영 교수의 ｢저항정신으로 본 김영랑의 시｣에 대한 토론문 =김영철(건국대교수)
오세영 교수님 발표는 서정시의 탁월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영랑시의 또 다른 성과, 즉 저항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있다. 언어, 소재, 정서, 형식, 메시지, 전기론적 사실 등 다양한 층위에서 검토하여 영랑이 만해, 육사, 상화의 반열에 서는 한국의 대표적 저항시인임을 주창하고 있다.
기실 김영랑의 경우, 지적하신 대로 서정시인으로서의 탁월성 때문에 기존 평가에서 앙가쥬망적 본질이 외면됐던 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의 시에서 빛나는 로칼리즘이나, 방언주의, 전통 지향성 등에 주목하여 민족시인이라는 평가는 있어 왔다. 하지만 민족시인 이라는 보편적 범주를 넘어서 항일 저항시인이라는 좀더 적극적인 평가는 엉성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 발표는 이러한 학계의 일반적 평가를 넘어서는 중요한 회시기적 모멘트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주장대로 민족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언어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영랑 등 시문학파가 시로써 민족어를 완성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민족어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영랑은 당연히 민족 시인일 수밖에 없다. 또한 언어 이외에 민족적 소재, 정서, 율격 등을 동원하여 민족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의당 이 범주에 선다. 일제 강점기는 바로 민족정체성의 상실 시대였고, 이를 회복시키는 일이라야 말로 민족사적 과제였던 것이다. 여기에 영랑이 과감하게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언어, 향토적 소재, 민속과 풍습, 풍물들은 넓게 보아 일종의 문화적 층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민족문화를 매개로 하여 민족정체성의 회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를 문화적 저항시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향용 범주화는 도식화, 획일화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체계화, 질서화라는 긍정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영랑의 민족시인 및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한국시사에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저항시의 계보학은 필요하다. 오늘 영랑의 평가와 같이 같은 계보에 속하는 소월의 재평가도 돼야한다. 그래야 한국 저항시의 체계적인 계보학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주제발표2.｢영랑 시와 민족 언어｣-김현자(이화여대 교수, 전 한국시학회장)
김영랑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빼어나게 되살린 시인으로 꼽힌다. 김소월, 정지용과 더불어 우리말 구사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영랑은 우리말의 감각적 매력을 그의 시 속에서 가장 빛나게 한다. 가히 언어의 마술사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정갈한 시어가 구축하는 영랑 시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섬세한 색, 향기, 소리, 촉감, 맛의 세계를 느낀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전한 조선산 모시나 명주’와 같은 ‘보드랍고 윤기가 있고 또 따뜻한’ 영랑의 시세계는 바로 ‘시어’로부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랑 시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 ｢오-매 단풍들것네｣는 남도방언 ‘오매’와 -‘것네’의 종결어미를 통해 독자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시어 ‘오-매’는 ‘워매’라는 감탄사를 여성스럽게 바꾼것으로, 단풍이 들 무렵의 가을이 주는 계절의 탄력성과 긴장감을 누이의 탄성과 절묘하게 결부한 것이다. 이렇듯 영랑 시의 정감 넘치는 언어들은 훼손되지 않은 고향의 원형질을 복원해냄으로써 한국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한다. 이러한 경향의시들은 공동체적 일체감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정서적 합일을 가져다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그는 의고체, 아어체의 언어와 부드럽고 서정적인 어조를 통해 아니마적 시세계를 구현하며 독자에게 다가온다. 음성상징에 의한 이미지의 감각화와 의미의 확대는 영랑시를 이루는 중요한 특성으로, 우리말을 통해서 소리와 시적 정감이 밀착되는 좋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영랑 시가 주관적 정서의 세계에 기반 해 있으면서도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감정의 절제를 통해 시적 긴장을 잃지 않기 때문인데, 운 맞춤이나 음성상징을 통해 사물들에 생명을 부여하며 정서와 분리된 새로운 소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의 바탕이다. 모국어를 그토록 연마하여 아름답게 소리 내게 하고 살아 숨 쉬게 했지만, 현실이 폐색되면서 영랑의 시는 음상어의 울림 대신, 역사적 자아의 육성을 내게 된다. 거문고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할 때, 그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독한 ‘춘향’이 되며, 피를 토하는 ‘두견’이 된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진솔한 대면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보인다.
=> 김현자 교수의｢영랑 시와 민족 언어｣에 대한 토론문 = 박호영(한성대 교수)
김영랑 시에 구사된 방언이나 이미지, 어조에 대한 선생님의 세심한 해석으로 영랑의 서정시의 세계를 좀더 깊고 명쾌하게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영랑의 시를 해방 전과 해방 후의 시로 양분하여 해방 후의 시를 현실 참여적 관점에서 해석한 기존의 입장과는 달리, 1930년대 후반의 시와 해방 후의 시를 일괄하여 민족의식과 역사적 자아의 관점에서 바라보신 것은 김영랑 시의 시사적 의의를 한층 깊고 의미 있게 규정지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시문학파의 활동은 분명 우리 시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 중심에 김영랑이 놓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랑이 순수 서정시의 유미주의자로, 심지어 언어의 기교주의자로 단순하게 인식되어온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선생님의 발표는 소중한 것 같습니다. 다만 토론자의 임무를 다하고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영랑이 1930년대 후반부터 초기의 경향과는 다른 시세계를 전개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動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둘째, 잘 알다시피 영랑의 가장 뚜렷한 초기 시세계의 특징은 ‘내 마음’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내면의 지향이면서 외부와의 단절을 꾀하는 것으로, 식민지 시대 토착 지주층 집안 출신의 현명한 처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순수서정의 세계가 현실과 대면하는 독특한 방식을 영랑이 보여준다고 하시면서 ‘대화체의 말 걸기를 통한 소통’을 거론하셨습니다. 영랑의 ‘내 마음’의 세계와 ‘대화체의 말 걸기를 통한 소통’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요? 소통이 자기에로의 대화와, 자연과의 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셋째, 선생님께서는 현실의 암울함이 거세어져 모국어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고, 영랑의 시도 역시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해방 후는 모국어의 운신의 폭이 다시 넓혀진 때라고 볼 수 있는데, 해방 후의 영랑시에서는 모국어의 살아있는 ‘소리’가 새롭게 발견되는지요? 발견된다면 어느 작품들을 통해서이며,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주제발표3. ｢김영랑 시의 운율적 위상｣-조창환(아주대교수, 한국시학회장)
김영랑은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1935년에 발간한 『영랑시선』이 그것이다. 전자는〈시문학사〉를 운영하던 박용철이 엮은 것으로 53편의 작품이 제목 없이 일련번호만 붙어 있으며, 후자는 서정주가 엮은 것으로 60편의 작품이 역시 일련번호로 되어 있다.
『영랑시집』수록 시들이 제목 없이 일련번호만 붙어 있다는 것은 제목이 주는 의미상의 제약을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여겼다는 뜻인 데, 이는 순수시를 지향하는 시인 김영랑과 편자 박용철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시집 전체를 일관된 연작시처럼 읽히게 하려는 의도도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시집의 제목도 단순히 『영랑시집』이라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명을 시집명으로 삼는 관례를 무시하고 ꡐ아무게의 시집ꡑ이라는 보통명사를 끌어들여 시집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의미상의 한정과 제약을 철저히 벗어나 보려는 편집자와 시인의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편집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이 시집의 작품 배열은 마땅히 의미심장한 구성을 취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랑이 득의의 시형으로 선 보였고 박용철이 극찬해 마지않았던 이 형태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당연히 절구나 율시 같은 한시 형태를 연상하게 된다. 기승전결의 구성을 갖추면서 1, 2, 4행의 끝음절에 각운을 맞추며, 전반부와 후반부의 두 행씩은 대구를 이루고 제 3행은 전환부의 역할을 하는 엄격한 형식미를 갖춘 것이 5언절구나 7언 율시의 형식이다. 영랑의 4행시는 한시처럼 안정과 균형감을 지닌 형태이기는 하나, 기승전결의 엄격한 내용상의 전개를 지니거나 앞뒤가 대구로 쌍을 이루는 형식은 아니다. 단지, 연속적인 어조의 흐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영랑의 4행시에는 제 1, 2행 혹은 제 3, 4행에서 쌍을 이루는 대구 형식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대구는 드물게 나타날 뿐,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구가 쌍을 이루는 경우는 없다.
『영랑시집』의 4행시 형태는 그의 초기시의 근본을 이루었다. 그것은 평탄한 연속적 어조로 정서의 부드러운 유동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양식이었다. 영랑은 흐릿하고 몽롱한 감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4행시의 균형감과 안전성 있는 형태를 추구하였고, 이 형태를 통하여 시간의 지속감 속에 신비롭게 안주하는 순수한 유미적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려하였다. 영랑 시가 지닌 언어의 아름다움은 독특하고 다양한 음성적 자질의 활용에 있다. 음성적 질감의 조정 양상을 검토하는 일은 영랑 시의 개성을 파악하는 일이 되며 그가 한국어의 음악적 미감을 어떠한 방식으로 세련시켰는가를 밝히는 일이 된다. 율격적 구조가 시에 있어서 음성적 미감을 제공하는 리듬의 틀을 형성한다면 음운요소의 조정은 소리의 결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영랑이 시의 음악성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흔적은 ꡐㅅꡑ, ꡐㄹꡑ 등의 자음에 의한 중간운의 활용과 양성모음의 애용, 강세를 지닌 단어를 적절히 배치하여 율행의 억양을 강화하여 굴곡 있는 리듬감을 살린 점, 자음충돌을 회피한 점등에서 찾을 수 있다. 우아하고 유려한 모국어의 구사로 시의 음악적 미감을 높인 영랑시는 한국 현대시사의 전개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 조창환 교수의 ｢김영랑 시의 운율적 위상｣에 대한 토론문 = 한영옥(성신여대 교수)
일찍이 미답의 영역이었던 한국 현대시의 운율체계 연구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신 선생님의 노고가 잘 묻어난 논문이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시에서 리듬이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은 영랑의 리듬의식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ꡔ영랑시집ꡕ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시에 구현된 리듬장치와 이의 미적효과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아하고 유려한 모국어의 구사로 시의 음악적 미감을 높인 영랑 시는 한국현대시사의 전개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였다”는 결론까지 물샐틈없이 흐른 이 글에서 특별한 의문점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한 바의 지극히 주변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말씀드리고 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이 글의 제목에 대한 것입니다. 이 글은 영랑 시에서 운율이 차지하는 위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바 “운율적 위상”이라는 표현은 다소 어색한 듯합니다.
2).‘4행시의 추구’에서 4행시가 아닌 경우의 시편들까지 “4행시형”의 구조로 환원시키자는 논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구태여 람핑의 견해(디이터 람핑, 장영태 옮김 ꡔ서정시:이론과 역사ꡕ38쪽 “시를 시행 발화 혹은 더 정화하게 말해서 시행을 통한 발화로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가 아니더라도 시에서의 각 행은 독립된 발화단위라고 봅니다. 따라서 4행을 초과하는 행들의 경우 그 독자성을 인정해야하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3). 엄밀하게 말해서 영랑시의 리듬 장치는 압운의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4 운 및 음성적 질감 조정>의 경우 운의 효과에 대한 논의는 무리가 된다고 봅니다. 예로 드신<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의 경우 “내음”“내음”“마음”“내음”의 반복이나 “보랏빛”, “보랏빛”의 반복은 동어반복일 뿐 각운의 효과를 자아내는 장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제발표4.｢김영랑 시의 계보학｣ -이숭원(서울여대 교수, 한국시학회 부회장)
김영랑 시의 계보genealogy를 새롭게 구성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두 가지 작업으로 진행될 것이다. 첫째는 김영랑의 시의 창조에 영향을 준 전대의 문학적 축적과 김영랑 시의 영향권 내에 속하는 후대 시인들의 작품을 조사하여 문학적 특질의 통시적 연계성을 밝히는 작업이다. 둘째는 영향의 수수관계를 넘어서서 김영랑 시의 특질을 공유하는 시인군의 작품을 조사하여 서정적 형질의 유사성을 구명하는 작업이다.
김영랑의 시작 발표는 오로지 박용철이 발행한 문예지 『시문학』과 『문학』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이 두 잡지를 통하여 김영랑은 37편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고 다른 지면에는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영랑의 등단과 초기 창작에 후원자 박용철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것보다 더 큰 힘을 실어준 것은 1935년 11월에 시문학사에서 나온 『영랑시집』의 간행이다. 시문학사에 『정지용시집』의 뒤를 이어 이 시집을 간행함으로써 김영랑은 동인지 『시문학』의 시인에서 본격적인 조선 시단의 시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시집에는 김영랑의 기존 발표작에 16편을 더한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박용철의 편집 의도는 각각의 시편이 지닌 개별적 의미에 갇히지 말고 53편의 시가 지닌 정서의 흐름을 연속선상에서 읽도록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박용철의 기획 의도대로 이 시집의 작품을 연속해서 통독하면 마음의 정결한 내면성에서 출발하여 애잔한 슬픔과 외로움의 심정을 거쳐 간곡한 기다림과 눈물의 정한과 청명한 자연회귀로 끝을 맺는 이 시집의 드라마적 구성을 감지하게 된다.
서정주가 김영랑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무렵이다. 동인지 『시인부락』 1호가 나온 것이 1936년 11월인데, 그 잡지 발간에 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박용철 자택을 방문했을 때 마침 상경한 김영랑을 만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수줍은 기색을 보이던 김영랑이 몇 차례 만날수록 친근한 감정을 나타낸 것에 대해 서정주는 ꡒ나를 그래도 쓸 데 있는 후배로 인정하자, 두 번 만나서부턴 그 初對面 때의 新婦의 것 비슷한 수줍음 대신에 바로 육친의 형 같이 대해 왔다ꡓ고 술회하였다.
1962년 12월에 『현대문학』에 작고 시인 회고 특집이 마련되어 서정주는 「영랑의 일」을 쓰는데 이 글에서 김영랑의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ꡐ燭氣ꡑ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김영랑이 서정주에게 창을 들려주며 李中仙의 소리에 대해 그 특징을 지적한 말로, ꡒ같이 슬픔을 노래 부르면서도 그 슬픔을 딱한 데 떨어뜨리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의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을 말하는 것ꡓ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1950년 1월 박목월은 『시문학』이란 시전문지를 창간 발행했는데, 그 잡지의 속표지 첫 장에 김영랑의 다음과 같은 사행시를 권두시로 내세웠다. 표기로 볼 때 이것은 『영랑시선』도 아니고 『영랑시집』도 아닌 『시문학』 2호에 실린 작품을 인용한 것이다.
<허리띄 매는 시악시 마음실가치/꽃가지에 으는한 그늘이 지면/한날의 내가슴 아지랑이 낀다/한날의 내가슴 아지랑이 낀다>
요컨대 박목월은 1930년에 나온 『시문학』의 서정성을 계승한다는 생각에서 제목을 같은 『시문학』으로 정하고 창간호 권두에 김영랑의 시를 실은 것이다.
=>이숭원 교수의 ｢김영랑 시의 계보학｣에 대한 토론문 = 고형진(고려대 교수)
-영랑 시의 번호 제목과 음악상-
김영랑은 박용철, 정지용과 함께 우리 시의 미적 근대성 확립에 지대한 역할을 한 ꡔ시문학ꡕ지 발간의 중심인물이다. ꡔ시문학ꡕ이란 잡지를 발간하는데 물질적으로 앞장섰던 사람은 박용철이었지만, ꡔ시문학ꡕ 창간의 중심 시인으로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김영랑이었다. ꡔ시문학ꡕ은 박용철이 단독으로 출자한 잡지였는데, 그는 ꡔ시문학ꡕ의 창간 의의의 하나로 자신을 포함해 김영랑이란 새로운 시인의 신작 발표를 꼽았다. 김영랑이란 새로운 신인의 발굴을 ꡔ시문학ꡕ발간의 의의의 하나로 삼은 것이다.
김영랑은, 바로 시를 읊으면 느낌이 일어나고 외워지는 아름답고 사무치는 민족어를 구사하는 새로운 신인이었던 셈이었다. 민족어의 완성을 향해 우리말의 조탁에 앞장섰던 영랑 시에서 특이한 점은 ‘제목’이다. 처음 ꡔ시문학ꡕ지에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는 제목이 붙어있었는데, ꡔ영랑시집ꡕ에 작품이 실릴 때는 번호만 붙어 있고, 뒤에 ꡔ영랑시선ꡕ에 다시 실실 때에는 작품 제목이 붙어있는데 제목이 바뀌기도 한 것이다. ꡔ영랑시집ꡕ에서 시의 제목이 숫자로만 표시되는 것도 특이한 것이고, 시의 제목이 발표지면에 따라 바뀌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이 점에 주목한 이숭원 교수의 발제문은 영랑 시의 핵심적 특질의 규명에 접근해간 것이다. 번호가 붙은 ꡔ영랑시집ꡕ으 시집 배치가 시적 정서의 연속성을 위한 것이라는 발제자의 설명은 번호 제목을 지닌 영랑 시의 이해를 넓힌 의미 있는 주장이며, ꡔ영랑시선ꡕ에 붙은 시집 제목을 시의 정본으로 삼자는 것은 적절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발표되어 수정된 작품은 대체로 개선된 것이므로 가장 뒤에 발표된 ꡔ영랑시선ꡕ의 제목을 시의 정본으로 삼자는 것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주장이기도 하다. 텍스트에 한정된 얘기지만 지용의 경우에도 뒤에 발표된 ꡔ지용시선ꡕ이 표기나 완성도면에서 개선된 점이 많다.
우리말의 음운과 억양 조절로 민족어를 가다듬으며 우리 시의 음악성을 살려 나간 영랑 시는 그 후 발제자가 검토한 그대로 미당과 목월 시로 계승되어 갔는데, 그 후 우리 시는 산문지향이 우세해 지면서 뚜렷한 적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산문화된 시 속에서 여전히 우리 시의 운율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영랑 시는 우리 시 운율의 원형질로서 여전히 중요한 시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 영랑 시의 음악적 특성과 후대 시인들과의 운율적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시인과 연구자의 지속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시낭송
영랑시와 화답시 낭송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화답시 -시인 김영랑 선생/이건청
｢모란이 피기까지는｣ : 화답시- 남도 꾀꼴새/송수권
｢毒을 차고｣ : 화답시 - 또 다른 독毒을 차고/이가림
｢오-매 단풍 들것네｣ : 화답시 - 단풍을 시비하다/이화은
화답시 - 祭狂妹歌/이승하
｢동백닢에 빗나는 마음 : 화답시 -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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