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시조시인 윤광제의 삼국지연의도 이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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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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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삼국지연의도 이야기 9

 

삼국지연의도 속에 숨은 고종의 독립의지

 

한국민화뮤지엄에서 열린 ‘석지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특별전’에 관한 이야기 이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은 고종 황제의 어진을 그렸던 초상화가로서 삼국지연의도를 단순히 삼국지연의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을 그린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말 우리민족이 품고 있던 간절하고 원대했던 뜻을 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과 함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겨져 있는 삼국지연의도의 비밀을 함께 풀어보자. -편집자 주-

 

조선의 몰락과정

‘마지막 황제’라는 헐리우드 영화가 있었다. 청나라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일본이 한 나라를 몰락시키는 과정을 가장 자세하게 묘사했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왕조의 혈통을 더럽히기 위해 일부러 중전은 운전사의 아이를 갖게 만들고 두 번째 부인은 자유연애를 하게 만들며 마약에 중독시켜 한 여성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시킨다. 청나라의 혈통은 그렇게 마지막 왕비가 왕궁 운전기사의 아이를 낳으면서 끝이 나고 황제 또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교도소의 간수로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조선의 몰락. 즉 경술국치에 이르는 과정 또한 ‘명성황후’ 같은 사극을 통해 접하기도 했겠지만 그 과정이 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에는 왕과 왕의 아버지, 왕의 부인이 엮어내는 어처구니없는 정권다툼으로 몰락의 과정이 급속하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조짐을 시간 순서상으로 정리해보면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시작으로, 경복궁 중건,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위정척사운동, 임오군란, 갑신정변, 고부 농민봉기, 폐정개혁안, 동학농민혁명, 갑오개혁,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 간도협약,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 을사늑약(일명 을사조약. 조약은 국가와 국가간에 맺어진 공식적인 계약을 말하는데 늑약은 강압적인 형태로 맺어진 조약을 말하므로 을사늑약이 맞는 표현이다), 군대해산, 국권피탈로 이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고부농민봉기, 대한제국군대 해산이다. 모두 약해진 국력과 연관된 난리가 아닐 수 없다.

조선 말기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삼정이 극도로 부패하면서 국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삼정은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환곡으로 잘 알려진 환정을 일컫는다. 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집행되는 것이 없었다. 특히 군정의 경우 갓난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체납액을 이유로 군적에서 삭제해주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그들의 생활 또한 매우 궁핍했다.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든 폭발할 분위기였는데 1882년 6월 무위영 소속 군인들에게 녹봉이 13개월 만에 지급 됐다. 오랜만에 받게 되는 녹봉에 기대가 컸던 군인들에게 주어진 쌀가마니에는 쌀이 아닌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인 것이 지급됐다. 선혜청 관리들이 착복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선혜청 당상겸 병조판서인 민겸호(명성황후의 오빠)는 착복한 선혜청 관리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항의한 군인들을 투옥시켰다가 구식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구식 군인들은 그 기세를 몰아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궁궐로 쳐들어가면서 명성황후가 피신을 했다. 이사건 이후 청나라 군대가 국내에 주둔하면서 내정간섭을 시작했고 일본에는 사과 사절단을 보냈고 더불어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결국 민씨 일가의 횡포가 일국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동학농민군이 세력을 키우면서 서울로 서올로 진격을 시작하자 이미 조선 관군으로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할 능력을 상실해 일본군의 힘을 빌려 농민군을 막기로 한다. 농민군과 진압군(일본군과 연합한 정부군) 두 세력은 공주 우금치에서 격돌하게 되며 결국 압도적인 장비의 우위를 점한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하고 만다. 주장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체포되면서 농민군의 잔여세력 더 이상 이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국민과 조국을 지키는 군인들 모두에게 신뢰를 잃은 왕조는 3차에 걸친 갑오개혁을 단행하면서 점점 몰락의 수렁에 빠져든다.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보자.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성립된다.(이때부터 고종은 황제가 되며 연호를 광무로 정한다. 그러나 광무황제라 칭하면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다. 1904년 2일 일본군이 서울 점령 후 군용지의 임의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1904년 8월 일본이 대한제국(이하 한국)에 대한 재정과 외교에 대해 본격적인 간섭을 하게되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다. 1905년 7월 일본과 미국이 일본은 한국 지배,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서로 승인하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체결된다. 1905년 8월 일본은 한국지배, 영국은 인도 지배를 서로 승인하는 제2차 영일동맹이 맺어진다. 1905년 9월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후 안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후인 1905년 11월 일본은 군대로 궁성을 포위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1907년 6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이 사건이 바로 헤이그 특사사건이다. 이 일이 벌어진 후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은 고종에게 괘씸죄를 적용해 다음달인 1907년 7월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통해 통감의 내정 간섭 권한을 강화하고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는 차관정치가 시작됐고, 결정적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되고 만다. 더 이상 조국을 지킬 군인이 없어졌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조선의 사법권이, 1910년 6월에는 경찰권이 박탈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고 대한 제국이 주권 국가로서 소멸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을 알리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다.

 

단도부숙의 관우는 헤이그 특사인가?

그로부터 2년 뒤 석지 채용신은 삼국지연의도를 고종에게 전달한다.

이 모든 것이 나라 잃은 왕의 심정을 대변했던 어진화가의 마지막 응답이 아니었다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고종은 나라를 잃고 나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은밀한 활동을 펼쳐왔으나 그때마다 일본의 조직적인 대응에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삼국지연의도는 정상적인 대응으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바로 삼국지연의도 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삼국지연의도를 남긴 것이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문헌은 알려진바 없지만 일련의 과정이 이러한 가능성을 추측케 한다. 그림 곳곳에서는 조선의 향기가 묻어난다. 특히 단도부숙을 마지막 장면에 넣었던 것은 헤이그특사 3인을 염두에 두고 그렸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관우가 살아오면서 우연히 만난 두 젊은이가 양자(관평)가 되고 평생을 따르는 충실한 부하(주창)가 되었다. 그들은 도원결의한 3형제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주군으로 모셔지면서 운명을 같이한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사실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려던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만국 평화회의에 출석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참석이 거부된다.

오직 조국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떠난 3인. 그리고 더 이상 대한제국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함에 울며 한탄하다가 건강을 잃은 이준 열사는 그곳에서 1907년 음력 7월 14일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자결로 알려졌지만 자결은 아니었음) 이상설 선생은 이준열사 사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가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만다.

이위종 선생은 1910년 국치를 당하자 러시아에서 자결한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사망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채용신고종황제어진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자)에 실린 헤이그 특사 일행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을사늑약 무효선언서(고종은 언론을 활용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은밀하게 전개했던 군주였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 (영상출처 : 다큐멘터리 www.ental.co.kt - KBS HD )

단도부숙도 中 좌측부터 노숙, 관우, 주창, 관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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