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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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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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5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일반적으로 ‘함경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오랑캐’, ‘귀양’, ‘반란’ 이라는 낱말이 절로 떠오른다. 필자가 특별히 함경도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서를 보면 저 낱말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고 그만큼 살기 척박했던 땅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 최북단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의 야인들로부터 침략을 피할 수 없었고, 조선 땅에서 귀양을 보내려고 명나라의 기본 법전인 대명률에 따르니 죄의 경중에 따라 2천리, 2천5백리, 3천리를 보내려 해도 갈 곳이 없어 남쪽으로는 익히 알다시피 전라도와 경상도, 또는 제주도로, 북으로는 함경도가 꼽혔다. 그뿐이랴 인구가 적으니 관직에 나서는 사람이 적고, 관직에 나서는 사람이 적으니 함경도를 비호해줄 큰 사람이 또한 적었고 수도 한양으로부터 멀다보니 수탈이 많아 오랑캐, 부패한 관리, 척박한 땅 삼중고에 시달려 반란을 일으키기 좋은 여건이 조성됐다.

결국 함경도는 버려진 땅의 이미지가 굳어져 갔는데 이를 해소시키고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 정부가 의도적으로 기록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을 하게 된다. 물론 애국심을 갖게 하는 것은 덤이었다.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17~18세기에 만들어진 역사화첩(畵帖)으로 북관, 지금의 함경도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기록한 그림이다.

 

고려 예종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척경입비(拓境立碑), 야연사준(夜宴射樽), 야전부시(夜戰賦詩), 출기파적(出奇破賊), 등림영회(登臨詠懷), 일전해위(一箭解圍), 수책거적(守柵拒敵), 창의토왜(倡義討倭) 라는 제목으로 총 8가지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이 그림들은 당시 조선 후기의 화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자 함경도의 전사(戰使)를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그림은 왼쪽에 일화를 그려 넣었고 오른쪽에는 그 일화에 대한 내용을 글로 설명해 놓은 '역사고사화첩'이라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하겠다. 내용은 앞서 말한 대로 총 여덟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는데다가 인물이나 말의 동작이 정형화되지 않고 각각의 역할에 맞게 위치가 정해져 있어 당시 상황을 능히 짐작케 하며 매우 가는 선으로 손가락, 말발굽 같은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의 화려한 복식과 무기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또 주인공을 화면의 중심에 놓는 단순한 구도를 배제하고 전체 화면의 1/3 지점에 무게 중심을 둔 구도를 주로 사용하여 주인공의 시점으로 화면 전체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소제목 : 대륙(大陸)의 한(恨)을 담은 북관유적도첩

 

첫 번째 그림은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이다. 척경입비도는 고려의 윤관 장군이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친 것을 그린 그림으로 고려 예종 2년(1107년). 평장사 윤관 장군은 지추밀원사 오원총 장군과 각각 행원대원수, 부원수로 임명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북관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혔다. 함주(咸州), 복주(福州), 웅주(雄州), 영주(英州), 길주(吉州), 공험진(公險鎭)에 6성을 쌓았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두 번째 그림은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로 조선 세종 때, 김종서 장군이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고 도순문찰리사로 있을 때를 그린 그림이다.

 

어느 날 김종서가 장수들과 술과 잔치로 야연을 벌이던 중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중앙의 큰 술병에 꽂혔다. 이에 장수들은 놀라서 겁을 먹고 두려워했지만 김종서는 간사한 사람의 술수라 여기고 태연히 연회를 진행하여 마쳤다고 한다. 김종서의 용맹과 침착함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세 번째 그림은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로 세조 때, 함경도 도제찰사 신숙주가 여진족을 물리친 이야기를 다룬다. 여진족이 밤에 신숙주의 진영을 공격하여 군사들이 응전하고 있는데 신숙주는 두려운 기색이 없이 누워서 막료를 불러 오히려 적군을 위로하는 시 한수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숙주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네 번째 그림은 출기파적도(出奇破賊圖)이며 조선 초기 무신인 어유소 장군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조 13년(1467년) 길주 사람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선 회령부사 어유소를 좌대장으로 삼아 토벌을 명했다. 어유소는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에서 싸웠는데, 특히 만령의 적은 천혜의 요새에서 방어를 하니 아군이 감히 올라갈 수 없었다.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풀과 구분하지 못하도록 푸른 옷을 입히고 작은 배에 태워 절벽을 등반케 하여 적의 배후를 치게 했다.

절벽에 대해 방비가 소홀했던 반란군은 갑자기 나타난 특공대에 놀라 크게 당황하였고 어유소의 본진과 특공대의 협공으로 인해 대패를 하게 된다. 대승을 거둔 어유소의 지략과 용맹을 다루었다고 전한다.

 

다섯 번째 그림은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도 조선 초기 무신인 남이 장이에 대한 그림이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 때 약관의 나이로 총대장에 임명되어 반란을 토벌하고 적개공신 1등에 올랐다.

남이는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중 백두산에 올라,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은 장검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다 마르게 한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남자 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케 못 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라고 시를 지어 사내대장부의 포부와 기세를 발산했다.

 

여섯 번째 그림은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로 조선 중기 무신, 신립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허망하게 순절한 것으로만 알려졌지만 원래 신립은 조선시대 중기 빼어난 무장이었다. 선조 16년(1583년). 신립이 온성부사로 있을 때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50여 명의 목을 베고 개선하였다. 이후 이탕개가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六鎭)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1584년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당시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들어 화살 한대로 적의 대장을 쏘아 죽였다. 두목이 쓰러지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본 여진족은 너도나도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일곱 번째 그림은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로 조선 중기 무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20년(1587년). 경흥도호부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했는데 당시 조산보 만호로 있던 이순신이 이를 관리하였다. 가을이 되자 약탈을 위해 여진족들이 침입을 하자 이순신 장군이 적과 맞서 싸웠다. 여진족이 목책을 공격하는데 많은 병사들은 추수를 위해 들로 나가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수비하던 이순신 장군과 조선 군사들은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가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활로 쏘아 죽였고 추장이 죽자 나머지 여진족은 퇴각하였다. 이때를 노려 이순신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붙잡혀간 농민을 구출한다.

 

여덟 번째 그림은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왜군 격퇴의 공을 세운 문신이자 의병장인 정문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25(1592년)에 왜군이 함경도로 들어와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에 가담하였고 그 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때 북평사 정문부는 숨어 있다가 이붕수가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의 집에 달려와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등과 합세해 창의대장으로 의병 300명을 이끌고 거병했다. 그는 부성(경성)에 있는 국세필을 달래어 의병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성 남쪽에서 노략하던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참수하고 성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그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했지만 그림 하나에 담긴 치열했던 전쟁이야기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다뤄보기로 하자.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1. 북관유적도첩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함경도에서 벌어진 총 8가지의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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