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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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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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6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拓境立碑(척경입비) : 국경을 넓히고 비석을 세우다

그림을 보면 좌측에 그림, 우측에 설명문이 들어간다. 설명문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高麗 睿宗(고려 예종) 朝命(조명) 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尹瓘爲行營大元帥(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 위행영대원수) 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元帥(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오연총 위부원수) 發兵十七萬號二十萬擊逐女眞(발병십칠만 호이십만 격축녀진) 拓地新築六城置咸福雄英州吉及公嶮鎭遂(척지 신축륙성치 함복웅영주길급공험진수) 立碑 于先春嶺以爲界(립비 우선춘령이 위계)

고려 예종의 명에 의해,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 윤관이 행영대원수가 되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오연총이 부원수가 되어 군사 17만 명을 동원했는데 작전상 20만 명이라고 공언(公言)하며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영토를 확장한 후 함주, 복주, 웅주, 영주, 길주 및 공험진에 6성을 쌓았고 마침내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嶺今在鐘城直北七百里(령금재종성 직북 칠백리) 碑面有書 爲胡人剝去(비면유서 위호인박거) 後有人掘其根 有高麗之境 四字(후유인굴기근 유고려지경 사자)

선춘령은 지금 종성의 정북쪽으로 700리에 있다. 비면에 글씨가 있었는데 호인(胡人:만주인, 일명 오랑캐)들이 깎아버렸다. 후에 어떤 사람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이라는 4자가 있었다.

두 장군이 비석 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위쪽이 윤관 대원수이며 아래쪽이 오연총 부원수이다. 전투가 끝나고 비석을 세운 것에 의미를 크게 두었다.

 

소제목 : 여진 정벌에 나선 윤관과 오연총

윤관(尹瓘)은 1040년 음력 6월 1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현에서 소부소감 윤집형과 경주 김씨의 아들로 출생했다고 전한다.(공식기록으로는 생년 미상 ? ~ 1111) 윤관의 아버지 윤집형은 고려개국공신 윤신달의 4대손으로 벼슬은 검교 소부 소감, 상서성 우복야 등을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는 신라의 왕족으로 문하시중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딸이다.

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윤관은 1087년(선종 4년) 합문지후(閤門祗候),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 1098년(숙종 3년)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11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시험(進士試驗)을 주관했고, 이어 어사대부, 추밀원부사 등을 지냈다. 1103년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같은 시기 국경의 동북쪽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추장들은 1106년 경 추장 우야소(烏雅束)를 중심으로 통일부락을 건설하고 고려 침공 계획을 세운다. 1103년(숙종 8)에 우야소의 세력은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한반도 동북권의 화약고가 되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에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후 강화 회담만 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을 창설하여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시킨다. 1107년(예종 2년) 여진 3차 토벌 때 대원수에 임명된 윤관은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척준경(拓俊京), 왕자지(王字之)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여진족의 전략적인 거점 135개소를 탈취했고 적에게는 전사자 4,940명, 포로 130명이라는 피해를 입혔다. 조정에 전승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오연총과 함께 9성의 축조를 감독했다. 현재 9성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고 있으며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된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당시 이주한 가구의 수는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에 병민(兵民) 6,466정호(丁戶)였다고 한다.

한편 여진족 족장 대표인 우야소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로서 1년 만인 1108년에 병력을 소집해 재도전을 한다. 이에 윤관도 1108년 (고려 예종 3년) 1월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야소가 절치부심했던 흔적이 나타나면서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하는데 때마침 나타난 척준경(拓後京)이 기병 10여 명으로 구성된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겨우 구출된다. 이 사건 이후로 척준경은 윤관으로부터 아들과 같은 신임을 받는다. 척준경의 활약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주성 공략에서는 왕자지가 이끄는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역시 척준경이 용맹과 기지로 왕자지를 구출하고 여진군을 겨우 물리친다.

별무반으로 구성된 고려군은 3차, 4차 여진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여진족이 끊임없이 변방을 두드리며 동북 9성을 반환해달라고 요청하자 고려 조정의 많은 신료들은 소모전을 피하자며 화의론을 펼쳐 9성을 되돌려주고 만다. 이후 윤관은 군공과 관련해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1111년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당초에 문경(文敬)이었으나 인종 때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 된 예종비의 휘호를 피하기 위해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1130년(인종 8년)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현 파주시 광탄면)에 있으며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오연총(1055~1116) 부원수는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후손이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된 해주 오씨(海州吳氏) 오정(吳頲)의 아들로, 예종 때 공신이 된 문신이자 군인이다. 오연총과 함께 여진(女眞)정벌에 나선 강진 김씨(康津金氏) 김함(金諴:인종~의종 때 호부상서(戶部尙書) 역임)이 그의 외 조카이다.

그의 승진 과정을 보면 윤관(尹瓘)과 거의 일치하는데 여진정벌을 위해 설치한 별무반(別武班)의 설치 당시부터 윤관을 보좌하면서 파평 윤씨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며 그들과 정치적 활동을 함께 한다.

한편 당시에는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반영하듯 윤관 대원수와 오연총 부원수 모두 문관 출신이었다.

 

사돈의 유래

고려 예종 때 여진 정벌에 나섰던 대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는데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보고 윤관이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내린 비로 개울에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데 개울 건너편 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는 것이 아닌가! 결국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아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우고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하고 오연총도 공손히 술잔 받는 예를 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을 마셨다. 이때부터 ‘사돈’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는 ‘등걸나무 사’(査)와 ‘머리를 숙이다’는 돈수(頓首)의 합성어로 혼인을 제안할 때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척준경과 왕자지

척준경은 곡산 척씨의 시조로 어려서는 글을 배우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렸으나 싸움 실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 명성이 뒤에 계림공(雞林公:후에 숙종)의 종자(從者)로 있다가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 1104년과 1107년 두 번에 걸친 여진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고 결정적으로 1126년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군사 정변을 일으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후에 변심을 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내는 등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나 그도 인종의 미움을 받고 유배됐다가 복권됐으나 곧 사망했고 1146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된다.

왕자지는 왕유의 현손(玄孫)이며 자는 원장(元長), 어려서는 왕소중(王紹中)이라 불렸으며, 서리(胥吏)를 거쳐 벼슬에 올랐다. 누이의 남편인 왕국모(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이자겸의 사촌)를 죽일 때 왕자지가 궁궐 문을 지킨 공적으로 도교령(都校令)에 임명되면서 출세길이 열린다. 숙종이 내시(內侍:고려 시대에, 근시(近侍) 및 숙위(宿衛)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로 거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로 임명하며 위상이 높아진 그는 다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고 예종 때에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女眞)을 정벌한 공로로 전중소감(殿中少監),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이부병부상서(吏兵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한다. 1122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있던 그는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장순(章順). 자녀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1남 1녀를 뒀고 우리나라 역사상 이름 때문에 공적이 격하된 인물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1. 척경입비도, 윤관 대원수와 오연총 부원수가 비석 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2. 척경입비도 주석

3. 문숙공 윤관 대원수 영정

4. 문양공 오연총 부원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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