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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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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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7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夜宴射樽 야연사준 : 밤에 열린 잔치에서 화살로 술병을 쏘다

6진을 개척하기 위해 원정에 나선 김종서 장군의 군중에 연회를 열었다. 연회는 무르익어갔고 김종서가 장수들과 술과 잔치로 야연을 벌이던 중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중앙의 큰 술병에 꽂혔다. 이에 장수들은 놀라서 겁을 먹고 두려워했지만 김종서는 간사한 사람의 술수라 여기고 태연히 연회를 진행하여 마쳤다고 한다. 김종서의 용맹과 침착함을 보여주는 일화를 다룬 그림이다.

그림을 보자 연회를 벌이는 중앙에 사람만큼 큰 흰색 술병이 보인다. 그 술병에는 화살 한 대가 박혀있다. 술병 바로 아래 있는 두 명의 장수들이 황당한 사건을 두고 불안해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지어 시립해 있던 부하들도 모두 그 술병에 꽂힌 화살에 시선이 몰려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풍악으로 연회의 흥을 돋우는 취타대가 있으며 우측 상단에 촛불에 의지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밤에 진행된 연회였음을 알리는 시각적 효과라고 하겠다.

심지어 연회장을 보면 장군들이라 그런지 1인 1상에 돼지 머리로 추정되는 고기가 하나씩 놓여있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의 식사량은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성인 남자는 7홉, 성인 여자는 5홉, 아이 남녀는 3홉으로 한 끼를 먹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1홉은 60cc로 현재 통용되는 1홉의 180cc의 1/3에 해당한다. 어쨌거나 7홉은 420cc로 현재의 한국 성인 남성의 일일 소비량인 5공기의 밥과 맞먹는 양이다. 즉, 조선시대의 선조들은 요즘에 3일 동안 먹을 량을 하루에 드셨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이 드셨는지 사진으로 한 번 보도록 하자.

오죽했으면 조선시대 문신인 이극돈이 상소 중에 이런 말을 했겠는가.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릿고개로 힘들어했다는 말은 사실 추수하고 나서 겨울이면 엄청나게 먹었던 대식문화에 기인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연회를 주관하고 있는 그림의 중앙에 머리가 큰 양반이 바로 김종서 장군이다. 그런데 복장이 뭔가 이상하다. 장군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있는데 김종서는 갑옷이 아닌 편안한 관복 형태의 옷을 입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김종서가 사실 6진을 개척한 수장이기 전에 문과에 급제했던 문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등장하는 이름난 장군들을 살펴보면 문관 출신이 꽤 많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무관 천시 풍조도 있었겠지만 의외로 병법에 능한 무관이 많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처럼 무과에 급제한 사람 중에 문재에 뛰어난 사람이 더욱 돋보였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삼국지의 여포나 고려시대 무인 척준경처럼 병법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막강한 인간 병기급 장군도 몇몇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했다. 장군들도 결국 사람이었으므로.

이 그림은 담대했던 김종서 장군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을 담고 있으며 백성들이 널리 본받기를 바라며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소제목 : 김종서의 생애

김종서는 1383년 (고려 우왕 9년) 양광도 공주에서 도총제(고려 후기 삼군도총제부 최고 지휘관)를 지낸 아버지 김추(金錘)와 대사간(大司諫) 배규(裵規)의 딸, 성주 배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김종한(金宗漢)이고, 동생은 양주부사를 역임한 김종흥(金宗興)이다. 김종서는 애초에 어마어마한 집안에 태어난 것인데 심지어 머리도 좋았다.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를 13위로 급제하는데 그의 나이 16세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재주를 자부할 만큼 신동이었다. 조선조에서 그와 동급을 이룬 사람은 역시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직(李稷) 하나뿐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급제한 사람을 떠올리면 19세의 정인지, 20세의 이덕형이 있지만 이들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셈이었다.

그는 문관으로서의 역량도 탁월해서 문종(조선의 제5대 왕, 세종의 맏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대에는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김종서의 건의로 일자별로 기록한 사서인 ‘고려사절요’ 35권이 완성됐다.

김종서의 무관 자질은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을 통해 각성이 되는데.....

북벌을 주장한 김종서의 상소에 세종이 움직였다. 세종 즉위 15년인 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같은 해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해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또한 그해 10월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한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했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해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했다.

 

소제목 : 성상(聖上:임금)위에 좌상(左相:좌의정)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에 이르기 까지 4명의 왕을 모셔온 충신이었는데 그의 위세는 웬만한 권신들은 잡아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의정부 서사제를 명분으로 천하를 호령한데다 국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으면서 그 힘의 끝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의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위에 좌상'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권력의 중심에 서서 천하를 호령한 그였지만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기에 수양대군도 김종서를 함부로 해칠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횡과 독단으로 인해 김종서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나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김종서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도 정도를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종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자 열두 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고 평소 목 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김종서를 암살한다. 북방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수양대군에 의해 허무하게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수양대군(후에 세조)

1417년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출생한 그는 무예(武藝)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으며,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무사들을 대동해 김종서를 살해하고 이후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鄭苯) 등을 유배시켰다. 동생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란(癸酉靖難)이라고 한다.

계유정란이 벌어진 지 2년후 1455년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한편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육신(死六臣)사건이 일어났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수되었다. 세조의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된 후 세조의 치적은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내는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앙집권체제, 진관제도, 호패법, 둔전법, 직전제 등이 그것이다.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1. 야연사준도

2. 김종서 장군 영정 (사진출처 : 순천 김씨 중앙종친회)

3. 조선시대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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