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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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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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8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夜戰賦詩 야전부시 : 야간 전투 중에 시를 짓다.

함경도 회령 방면에 있던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오늘 그림은 숙주 나물만 식탁에 나오면 누구나 한국사 시간에 들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어린이들에게 한마디씩 해줬던 그 인물.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로 세조 6년(1460년), 함경도 도제찰사 신숙주가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전을 했다. 위기를 느낀 여진족이 밤에 신숙주의 진영을 습격하자 조선의 군사들이 어지러이 응전하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신숙주는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누워서 막료를 불러 오히려 적군을 위로하는 시 한수를 짓는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虜中霜落塞垣寒(로중상락새원한) 오랑캐 땅 서리 내려 변방이 춥건마는

鐵騎縱橫百里間(철기종횡백리간) 철기가 백리 땅을 자유로이 누비는구나

夜戰未休天欲曉(야전미휴천욕효) 야간 전투 끝나지 않고 날은 밝아오는데

臥看星斗正闌干(와간성두정란간) 누워서 하늘 보니 북두성이 반짝이네

이후 전열을 정비한 신숙주의 정벌군은 여진족 추장급 인물 90여 명과 일반인 430여 명을 포로로 삼거나 전사시켰다. 또한 적의 근거지와 9백여 채의 집을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를 따지면 세종 최윤덕의 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어쨌거나 야간 전투의 혼란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신숙주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야전부시도는 이전에 보인 북관유적도와 달리 조선시대 야전군의 무장과 전투 휴식의 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 정벌군의 1차 출전당시가 8월 말이고 2차 정벌 당시가 1달 뒤였으니 그림의 배경이 된 시기는 함경도 기준으로 10월 이후였다고 보면 되겠다. 함경도는 과거부터 풍설이변(風雪異變)으로 얼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고 전하는데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1월 평균 기온 -4.4℃, 서리는 10월부터 4월 중순까지 내린다고 하며 올해 10월 20일 회령 인근 도시인 삼지연은 최저 -0.6℃ 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당시 군복무를 하던 병사들은 그야말로 자연과의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특히 서리라도 맞은 상태에서 찬바람 불면 체감온도가 급감해서 1시간 이내에 동상으로 고생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일이 비일비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중심이 되는 흰 장막을 보면 아직 침소에 있는 신숙주가 보인다. 촛불이 켜 있는 것을 보면 상황이 야간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 앞에서 적의 기습에 대해 두 명의 무장(武將)이 보고를 하고 있다.

기습을 하고 있는 여진족은 주로 말을 타고 화살을 날리는 기마궁병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보고 반격에 나선 조선군은 궁병과 도병, 창병이 주둔지를 지키고 있고 화면 아래에서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마궁병이 반격에 나서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A자 형태의 흰 색 텐트가 4개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물론 미군, 프랑스군 등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A형 텐트 모습이다. A형 텐트는 보통 2명, 많이 자야 3명까지 자는데 물자가 부족한 조선군을 감안하더라도 주둔군의 막사는 A형 텐트가 2,500개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또 막사 뒤 쪽에는 긴 창에 등을 달고 있는 불침번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이 보인다. 비록 그림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모습이지만 항상 수면이 부족했던 병사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또한 반격에 나선 조선군의 기마궁수 중 1명을 화살을 날리고 나서 보이는 손동작이 정확하게 묘사된 것으로 볼 때 이 기록화를 그린 화공의 깊이를 능히 짐작할 만 하다. 다만 반격에 나선 조선궁수들의 모습이 대부분 왼손잡이로 표현된 것은 그림 보는 사람에게 방자(防者)의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맞춤형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 다 넣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의 숙영지 부근에는 귀전(鬼箭)이라 불리는 일종의 지뢰를 깔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귀전은 어느 방향으로 던져도 침이 하늘 쪽을 향하는 ‘마름쇠’를 대나무 통에 넣고 똥물과 독약을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적이 귀전을 밟으면 대나무 조각이 깨지는 소리 또는 귀전을 밟고 지르는 비명 소리를 통해 적의 기습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지뢰의 무서움은 단순히 밟은 사람 1명의 부상이나 사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귀전을 밟은 적군은 파상풍에 걸리게 되며 고통에 비명을 지르게 되면 부대의 위치 노출과 그를 구출하기위해 다른 군졸이 최소한 1명은 전투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므로 귀전 하나는 적 2명을 묶어두는 도구였다. 알고 보면 조선 군대도 그리 허술한 조직은 아니었다.

 

소제목 : 변절자의 아이콘, 신숙주의 생애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두 가지를 썼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17년 6월 전라남도 나주에서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의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전라도 생활은 길지 않아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오게 되면서 끝이 난다.

그가 서울로 온지 13년 뒤, 세종대왕은 당시 유학자들이 훈고(訓誥)만 존중하고 폭넓게 공부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38년(세종 20)에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르는 진사시험을 실시하게 된다. 그 동안 때를 기다리던 신숙주가 첫 선을 보이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단번에 장원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에 생원시험에도 합격을 한다. 생원시와 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한 기록을 남긴 그는 이듬해 열린 문과(文科)에 합격했으며 전시(殿試)에서는 3위로 급제했다.

세종시절부터 빼어난 실력을 보여온 신숙주는 사실 조선 초기 명재상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어학의 천재로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고 문신이 함경도 도체찰사가 되어 여진족을 토벌하는 공도 세웠다. 심지어 외교관으로서도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며 족적을 남겼다. ‘다재다능’이라는 사자성어는 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녀도 9남 2녀를 뒀다. 복도 많아서 손자인 신종호(申從濩)도 할아버지 신숙주의 영향을 받았는지 소과, 문과, 중시의 3과에 장원을 한다.

신숙주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는 시기는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인 45세에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라는 영의정이 되었다(1462년, 세조 8).

이처럼 대단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신숙주에게는 배신자의 꼬리표가 따라오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을 이어받은 군주인 단종을 저버리고 쿠데타([프랑스어]coup d’État)를 일으킨 세조를 선택한 탓이었다. 당시 선비들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가짐인 군주에 대한 신뢰, 즉 충(忠)을 버린 선비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사람이라 비판받으면서 평가절하된 것이다.

배신의 아이콘이 된 신숙주이지만 조선역사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1. 야전부시도

2. 신숙주 영정 보물 제6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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