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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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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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2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守柵拒敵 수책거적 : 책문을 지켜 적을 막다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는 조선 중기 무신인 이순신 장군이 1587년(선조20) 가을 여진족의 녹둔도에 침입에 대항해 물리친 이야기이다. 이 그림에는 부연설명이 되어 있어 그 내용을 짐작케 하는데 그림에 나온 설명보다 조선왕소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기로 한다.

 

[조선수정실록 21권, 선조 20년 9월 1일 정해 1번째 기사, 만력(萬曆)15년

적호(賊胡)가 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켰다. 녹둔도의 둔전(屯田)을 처음 설치할 적에 남도(南道)의 궐액군(闕額軍)을 예속시켜 경부(耕夫)로 삼았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수확이 없었다. 이 해에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그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는데 가을에 풍년이 들었다. 부사 이경록(李慶祿)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이순신과 추수를 감독하였다. 추도(楸島)의 호추(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경원(慶源) 지역에 있는 호인의 촌락에 화살을 전달하고서 군사를 숨겨놓고 몰래 엿보다가 농민이 들판에 나가고 책루(柵壘)가 빈 것을 보고 갑자기 들어와 에워싸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였다.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임경번(林景藩) 등이 포위를 뚫고 책루로 들어가다가 모두 화살을 맞아 죽었다. 마니응개는 참루(塹壘)를 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다. 적호(賊胡)가 10여 인을 살해하고 1백 60인을 사로잡아 갔다. 이경록·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된 사람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이순신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자신은 벗어나기 위하여 형구를 설치하고 그를 베려 하자 순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

 

"전에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신보하여 더 보태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사가 따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공첩(公牒)이 있다."

 

하였다. 이일이 수금하여 놓고 조정에 아뢰니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贖罪)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수병(戍兵)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호당(湖堂)에 명하여 시를 지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둔전(屯田)이 폐지되었는데, 논하는 이들은 정언신(鄭彦信)이 실책(失策)한 것으로 탓하였다.

 

이순신이 순변사(巡邊使)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로(反虜)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사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자신에 대한 변호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던 ‘성웅 이순신’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평소 기록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탓에 그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소제목 : 녹둔도, 작은 땅 큰 의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군인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1598년 12월 16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徳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이었지만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고 이름이 났을 때 직책은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겠다. 최종 직위는 정조 때 추증되어 의정부영의정에 이른다. 덕수 이씨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고 그의 묘와 사당은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니 오늘은 녹둔도라는 섬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녹둔도가 고유 영토로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녹둔도의 첫 이름은 여진족이 쓰던 음을 따서 사차마(沙次亇) 또는 사차(沙次)·사혈(沙泬)·사혈마(沙泬麻, 沙泬磨) 등으로 불리다가 세종 때 육진 개척 이후 북변의 지명을 새로 정리하면서 녹둔도(鹿屯島)라고 했다. 기록에는 섬 둘레는 2리(里) 정도이고 높이는 수면에서 10자[尺] 되는 작은 섬이며 산물은 보리·밀·수수와 각종 어류 및 청백염(靑白鹽)이라고 밝혔다.

육진 개척 이후 국경의 기준이 된 두만강의 하천도서로 강 건너편에 살던 여진족들은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면 그 때마다 녹둔도를 약탈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가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이 녹둔도에 상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春耕秋收期)에 한해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 출입했다고 전해진다.

선조 16년 순찰사 정언신의 건의로 녹둔도에 둔전이 조성됐으나 여진족의 침입과 반격,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 후 둔전은 폐지된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의 경작은 계속됐는데 그만큼 함경도 쪽의 농토가 부족했고 녹둔도는 옥답(沃畓)이었던 탓으로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녹둔도가 연해주 쪽 육지에 붙어 버린 것이다. 물이 깊어 야인들도 쉽게 건너오지 못했던 녹둔도가 하천의 퇴적 작용에 의해 오른 쪽 물길이 막혔고 왼쪽으로만 하천이 흐르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백성들이 경작을 하던 조선의 영토였고 심지어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400여 년간 조선 사람들이 피로 지킨 이 섬이 러시아 땅이 되고 만다. 1860년(철종 11년) 청과 제정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는데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청나라가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주는 우를 범하고 만다. 기가 막힌 것은 이 와중에 조선 땅 녹둔도가 연해주와 함께 넘어가 버린 것이다. 조선 조정은 1889년(고종 26년)에야 그 사실을 알고 청나라에 항의했으나 국제 조약이 체결 된 이후라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국력을 거의 상실한 시기였던 조선이었기에 항의한다고 해서 조약이 바뀌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약 30년 후, 시대가 변해 러시아의 국명은 소련으로 바뀌고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했고 일본은 만주전쟁에 한참 열을 올린다. 일본의 팽창에 위기를 직감한 러시아는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일대의 조선족과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버린다. 이유는 조선인과 조선족, 일본인을 구분하기 힘든데다가 이들이 일본군 첩자가 될 경우 대책을 세우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북한도 인지하고 구 소련과 국경협정(1985), 국경설정 의정서(1990)를 체결하면서 두만강 중심선을 경계로 합의하는데 당시 녹둔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결국 러시아령임을 인정하게 된다.

2008년도에 러시아가 1929년부터 79년간 점령했던 헤이룽강의 2개 섬을 중국에 반환하는 뉴스가 있었다. 이에 발 맞춰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여의도의 4배나 되는 우리 땅 녹둔도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각종 언론사에서 주장을 했었지만 이것 또한 무위에 그치고 만다.

 

녹둔도, 그리 크지 않은 땅이지만 두 나라간 국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치가 높은 것이었다. 특히 갈수록 바다 영토 분쟁이 커지는 현대임을 감안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러시아는 현재 녹둔도에 군사기지를 만들어두고 있다고 한다.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1. 수책거적도

2. 이순신 장군 영정

3. 대동여지도에 나온 녹둔도 (참조 주간경향 2008.08.20)

4. 녹둔도 위치 항공사진(네이버 지도)

5. 녹둔도 위치 확대사진(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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