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 햇발
바보선비
김 현임(수필가)
‘가능한 많은 사람을 만나라, 네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신의 다른 모습이다’라는 조언을 며칠 전 책에서 얻었다. 하긴 신이라고 완벽하던가. 고대 희랍의 우두머리 신은 걸핏하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워 위대한 여신을 질투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키지 않던가. 그래서일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신보다 나를 감동 시키는 건 世欲 앞에서 자신을 능히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묵은 스크랩 뭉치를 요 며칠 째 혈안이 되어 뒤적였다. 찾기를 포기하며 깨달은 게 내가 찾고자 하는 이, 그 사람 생의 고군분투다. 아니 ‘외롭고 치열한 싸움’으로 풀이할 수 있는 孤軍奮鬪의 간략한 사자성어로 그의 삶을 표현해버리기엔 너무 황송하다. 결국 신문 쪽지를 찾지 못해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익명이 되어버린 그, 하긴 경박함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이름 얻기를 거부하는 그의 본심과 너무도 어울리는 우연일치다.
스크랩 기사의 주인공은 모스크바 교외에서 어머니와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수학자다. 일찍이 영국의 수학 학회에서 천문학적 숫자의 상금을 걸었지만 세월 흐르도록 그 누구도 해결 못한 난제를 풀어낸 놀라운 실력을 지닌, 과히 대서특필 감의 그가 거액의 상금수여를 위한 학회 초청에 답한 말이야말로 신의 경지다. ‘풀었다는 게 의미가 있지 까짓 상금이 무슨 소용’ 이었다던가. 자못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이 수학자의 배짱, 그 근원은 무엇일까.
책으로 영화로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 거부의 반열에 오른 헤리포터의 조엔 K 롤링, 그녀는 세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거의 필사적으로 글에 매달렸다 했다. 또한 몇 달 전 아흔 넘어서 까지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쓰며 땅딸보 코기 강아지만을 고집하며 자신의 생을 그녀의 정원만큼 곱게 꾸려가던 타샤튜더 할머니도 생계만 아니었다면 당신 평생 그림이나 그리며 살았지 힘들게 글은 쓰지 않았을 거라고 고백했다.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이야기하자니 떠오른 안타까운 여인이다. 영국의 계관 시인인 테드 휴즈와 이혼하고 1남 1녀를 맡아 기르던 아름다운 여류시인인 실비아 플러스. 그녀는 남편과 별거 후 한 달 동안 무려 30여 편의 시를 쓰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의 외도로 인한 별거의 후유증과 100년 만에 찾아 온 런던의 혹한 속에서 우울증과 극심한 생활고에 마침내 우유와 빵을 챙겨 두고 아이들의 방에 가스가 새어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이는 치밀한 자살극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마돈나의 노래에 ‘나는 당신의 지갑을 좋아한다’는 도발적이고 솔직한 여심을 드러낸 제목이 있었던가. 마돈나 슬하에 책임져야 할 아이가 몇이나 있었건 말건 아이들을 위한 글? 그 여성群의 부류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여기저기 상금을 노리고 투고한 글들, 비록 말도 안 되는 글이라고 할망정 가슴 속에서 짜낸 흥건한 물기, 아니 내 핏기가 스며 있지 않는 글은 없었다. 대부분 가명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언젠가는 정정당당 내 이름자 내건 글을 쓰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은 날 있었던가. 이제 아이들 수발의 끝자락에 든 지금 무엇에든 당당하고 싶다. 시간에도 사람에도 그동안 가장 나를 가장 나를 옥죄던 경제라는 이름의 금권에도 휘둘리지 말고, 정말이지 아무 것도 구애 받지 않고 글을 쓰며 공부나 하며 사는 생을 꾸리리라 벼르지만 글쎄, 하여 쥐꼬리만 한 연금에 의존해 늙은 어머니와 사는 수학자의 단순한 삶이 여전히 부럽고 부럽다.
삶에 동분서주하느라 한동안 잊었던 수학자의 존재를 일깨운 건 영국 언론으로부터 ‘억세게 운이 없는 사나이’라는 오명을 얻은 ‘아이 팟’ 개발자의 기사다.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하나의 문화의 아이콘이 된 애플사의 MP3플레이어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 케인 크레이머에 관한 이야기다. 애플사는 그동안 경영난에 허덕이던 회사를 완전히 기사회생 시킨 효자상품 ipod의 개발자에 관해 함구로 일관하면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베일에 싸여 있던 그를 애플사가 어쩐 연유인지 지난 8일 앞장 서 공개했다.
나와 동갑이어서 더 눈길이 갔을까. 52세의 벤처 기업가 케인 크레이머, 그는 23세 때인 1979년 디지털 음악 수신기인 ipod의 원형을 창안했다. 자신이 발명한 획기적인 신종 기기에 IXI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3분 30초 분량의 음악을 저장해 들을 수 있는 이 기기로 해 그는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특허를 갱신할 비용이 없어 나중에 수 천 억 달러의 천문학적 수익을 올릴 기기의 특허를 포기하고 만다. 즉 누구의 재산도 아닌 공유로 떠돌게 된 것이다.
그의 원천기술은 여러 곳을 거쳐 애플사로 흘러들어 왔고 ipod로 재탄생했다. 지금까지 애플사가 꽁꽁 숨기던 그를 밝힌 것은 무려 890억 파운드, 우리 돈 178조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 때문이란다. 자신들의 특허 기술을 도용했다며 버스트 닷컴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고 원고 측 증인으로 원제작자인 케인 크레이머를 내세운 것이다. 최소한의 여비와 식사대 정도의 사례비가 제공되었으나 만행이 분명한 애플사의 처사에도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케인 크레이머.
비가 새는 방 가운데 앉아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옛 사내, 그 선비의 감회랄까. 자존심 형형한 푸른 눈빛의 두 서양 선비님들이 여인의 향내만 는 교활한 바람둥이 신만 못하겠는가. 그 고고한 선비 기질. 바라노니 나또한 한시바삐 이런저런 허둥거림을 벗어나고프다, 돈이라는 아니 경제라는 말로 점잖게 포장된 현대의 야비한 신, 物神의 횡포에 초연한 바보 선비 두 분을 오늘 내 인생의 스승으로 반갑게 모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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