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 마을을 뒤로 하고 다시 백화암으로 가기 위해 숲길을 걸어 나갔다. 가시나무숲에서 흰배티티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늦가을 홍염의 수목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거칠 게 없는 그의 날개 짓이었다. 내 눈은 무심코 흰배티티새를 쫓고 있었는데, 자유자재로 허공을 휘젓는 그 놈은 전혀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망막에는 놈의 날개 짓이 선(線)의 물결처럼 또렷이 그려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틈에 울부짖고 있었다. 선(線)과 색(色)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림일진대, 아아 저 흰배티티새의 날개짓처럼 유연한 선을 표출시킬 수만 있다면······. 결국 그것은 내가 걸어가야 할 궁극적인 목표일 터였다.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큰절의 해탈문이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부도 밭 앞 계곡 가까이에 여전히 캠핑카 보리호가 서 있었다. 팔상도를 그리는 동안 날마다 이용했던 보리호는, 5톤 트럭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으므로 미니호텔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 그리고 작업실이 마련된 보리호는 늘 아늑한 휴식처였던 것이다. 가스보일러와 가스온수기까지 설치되었기 때문에 계절에 관계없이 편히 지낼 수가 있었고, 화구(畵具)를 비롯한 물감그릇이며 자질구레한 생활용품 등을 챙겨 다니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보리호는 또 하나의 산가(山家)이기도 했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보리호를 세워두면 산천경계가 다 내 것이었다. 산신령의 입김과도 같은 일망무제의 운해(雲海)도, 하늘을 찌를 듯 아름드리 노송과 그 청송뢰(廳松籟)와 깎아지른 계곡이 어우러진 심산궁곡(深山窮谷)도 다 나를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먹빛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물결까지도······.
그랬다.
내가 산인가, 산이 곧 나인가.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몸뚱이에 달라붙는 속진(俗塵)의 때가 말끔히 씻어지는 기분까지 맛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道)라는 것이 금방 손에 잡힐 듯 법열(法悅)에 빠져드는 때도 가끔은 있었던 것이었으니······.
“법능 화사((法能畵師)!”
바지를 걷어 올리고 청수처럼 맑은 물을 퍼 올리며 발을 씻고 있을 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사흘 전, 불사소에서 만났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아예 그림의 기본기도 못 갖춘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화사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다니. 그리고 내 별호(別號)는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이제 팔상도 작업이 다 끝난 모양이지?”
나는 한마디 대꾸도 않은 채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았다. 그러자 그녀가 어느 틈에 내 곁에 다가와 쪼그려 앉더니 손끝으로 계곡물을 톡톡 튀겨가며 염불하듯이 말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나타내는 팔상도는, 첫 번째가 도솔래의상으로 붓다가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꿈의 장면이고, 두 번째가 비람강생상으로 붓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며, 세 번째가 사문유관상으로 붓다가 생로병사를 유람하는 장면이고, 네 번째가 왕궁을 탈출해 출가하는 유성출가상, 다섯 번째가 설산에서 6년간 수도하는 설산수도상, 여섯 번째가 보리수 아래서 마왕 파순과 군졸들에게 항복받는 수하항마상, 일곱 번째가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녹원전법상, 여덟 번째가 쌍림열반상이 아닌가?”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반말지거리였다.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반말을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끓어올랐지만 지그시 참았다. 그러잖아도 본디 산 속의 절을 홀로 찾아다니는 여자치고 문제가 없는 여자는 없다는 말을 절 보살들로부터 자주 들어온 터였다.
“그야 신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내용 아닐까요?”
나는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며 경멸하듯이 말했다. 팔상도의 내용을 졸졸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지식이 상당해 보였지만 반말지거리에 대한 불쾌감은 여전히 모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왜 성불상(成佛像)은 없을까? 특히 욕비를 비롯한 세 마녀들의 유혹을 물리친 다음 먼동이 틀 무렵 성도를 한 일은,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도 말이지.”
“저도 그 점이 궁금해서 스승님께 물어본 적이 있었죠. 스승님께서는 이미 부처님은 전생에 축생까지 윤회하면서 중생을 위해 보살행을 해 오셨는데, 바로 그 보살행이 수행이며, 수행의 궁극적인 완성은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6년의 설산수도와 마왕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굳이 성불상이 필요 없다고 하시던데요.”
나는 해월 노화사로부터 들은 말을 기억해 내며 비꼬듯이 말했다.
“하긴 모든 절마다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성불상이지.”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리고 나더니 대웅전 너머로 솟아올라 보이는 두륜봉을 치어다보았다.
“그런데 난 마애불에 친근감이 더 들어서 북암에 계시는 석불(石佛)님께 3천배를 하고 왔어.”
3천배라니? 행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주제에 머리통이나 빡빡 밀고 다니는 그녀의 그 엉뚱한 외모부터 비웃고 있는데, 3천배를 할 정도로 불심이 있다니. 도대체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난 석불님께 기도하고 나서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어.”
그녀는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뭘 발견했다는 겁니까?”
“저 두륜산을 한 번 쳐다보라구. 비로자나불이 누워 계시는 와불의 산세이지 않는가?”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두륜산 정상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대로 두륜산은 거대한 와불의 모습이었다. 백화암에서 팔상도를 그리는 동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라보는 산이었는데도 설마 비로자나불을 닮았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두륜산 정상부에 솟아오른 바위덩어리는 비로자나불의 얼굴이요, 그 옆으로 솟구친 봉우리는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이며 다시 시나브로 솟아오른 길고 큰 봉우리는 비로자나불의 발끝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신심이 절로 일어나는 모습이지. 더구나 비로자나불은 우주만물의 창조신으로서 모든 우주만물을 탄생시켰다고 하질 않는가? 그래서 우주불(宇宙佛)로써 우주만물을 감싸 보호하는 청정법신(淸靜法身)이기도 하지.”
“대흥사의 별들인 십삼대종사와 십삼대강사가 왜 배출되었는지 알 것 같군요.”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일세를 호령하며 법의(法衣)를 휘날렸던 역대 고승들이 잠들어 있는 부도 탑을 바라보았다. 크고 작은 부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그곳은 해저처럼 무겁게 적막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엉뚱하게도 말을 바꾸어,
“참, 요 아래에 사시는 해월 노화사는 잘 계시겠지?”
하고 갑자기 해월 노화사의 말을 끄집어냈다.
“아니, 어떻게 그 분을 다 아십니까?”
“우연히 불교잡지에서 해월 노화사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찾아간 적도 있었어.”
“찾아가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여간 까다로운 분이 아니더군. 여자라서 탱화를 그릴 수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더라구.”
제자가 되겠다구? 내게 악평과 반말지거리를 해대는 여자의 정체가 이제야 벗겨지는 것인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랬을까요?”
“······웃기는 얘기지. 불교에서는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잖은가. 그런데도 여자는 탱화를 그릴 수가 없다?”
일순, 그녀의 얼굴이 무겁게 어두워지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젖퉁이를 출렁거리면서 거룩한 존상화(尊像畵)를 그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어. 한 마디로 불경스럽다는 얘기지.”
탱화를 그릴 때에는 몸을 바짝 엎드려야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자의 젖가슴이 부처님의 눈이며 코며 입술에 닿게 되기 때문에 해월 노화사는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아니면, 괘불 같은 대작을 그릴 때 부처님 가슴 위조차 쪼그리고 앉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라면 불교는 결국 페미니즘의 종교가 아닌 셈이었다.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성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탱화를 그리는 일 또한 성스러운 일이겠지. 그런데도 해월 노화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구.”
그녀가 일주문 밖으로 눈길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우리 술이나 한 잔 하면 어떨까?”
“아니, 대낮에 술을 마셔요?”
“싫으면 말구······.”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잰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고 따라오기 싫으면 말라는 태도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바늘 끝에 매달린 실처럼 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양파껍질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알 수 없는 비밀이 담겨있을 것만 같아서였는데, 그만큼 끌어당기는 어떤 견인력이 있었다고나 할까.
이윽고 그녀가 멈춘 곳은 장난감처럼 앙증맞게 생긴 철제다리 앞이었다. 그 다리 건너편에는 딱 한군데 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큰절 턱밑까지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일주문 아래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음식점, 술집, 노래방 등의 여관거리가 모조리 철거되었는데, 목조건물의 여관 하나와 계곡 건너편의 술집은 용케도 살아남은 셈이었다. 술집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늘에 전선드럼통을 옆으로 뉘어 비닐장판을 깔아놓고 식탁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통통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나타나 동동주와 도토리묵 안주를 갖다 놓았다.
“지금까지 무작정 돌아다녔던 것 같애. 그러고 보니 바람 같은 방황이었어.”
“방황은 말 그대로 갈팡질팡 그것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방황하면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동안 퍽이나 고민해 보았고 쏘다니기도 많이 했던 것 같아. 해월 노화사를 찾아간 것도 그것에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되는군요.”
“그런데 법능 화사에게도 방황이 있었을까? 젊은 피가 타들어가는 그런 방황이······.”
동동주 한 병이 비워지자 그녀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더 주문했다. 나는 말없이 동동주를 들이켰다.
“왜 없었겠어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는데, 토암산 석굴암의 본존불과 그 주변의 문수, 보현, 십일면관음보살상을 보는 순간 제 방황은 시작되었다고나 할까요. 완전히 제 넋을 빼앗아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당연히 그 같은 명공이 되고 싶은 전율을 느꼈지요. 그리고 고려불화에서도 물과 달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친견할 때도 마찬가지로 숨이 멎는 듯한 감동을 느꼈죠. 투명한 백색 사라를 쓰고 있는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필의 경지를 느꼈으니까요. 게다가 천관(天冠)이며 가슴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는 그 정교함에서 빼어난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백억 대가 넘는 고가에 경매되고 있잖아요. 고려불화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불화 사회탱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억여 원에 낙찰됐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우아하고 신비로운 그런 작품을 그려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하지만 석굴암 부처님이나 수월관음도 모습만을 흉내 내겠다는 것은 창작(創作)이 아니라 모작(模作)에 그칠 뿐······. 수천 년이 흐른 오늘 날에도 그것을 고집하다니 ······.”
나는 기가 막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예술 혼 앞에서 누구나 탄성을 자아내는 게 석굴암 본존불이며, 특히 십일면관음상은 숱한 작가들이 미의 여신으로 침이 마르게 찬양하지 않는가. 수월관음도 또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비교되고 있다. 수월관음 아래의 선재동자가 탄 연잎 밑 주변이 물결 모양의 영기문이 있듯이 비너스도 바다의 포말이 있는 큰 조가비에 서서 탄생하고 있으므로 그 메타포가 같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서슴지 않는군요.”
“불경스러운 말도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 절이 변하지 않고서는 안 돼. 전라도를 가나 경상도를 가나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만 그려져 있어. 이 절 저 절이 다 똑같다는 얘기지.”
“그거야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대고 있었다. 전국에 쌀알처럼 산재되어 있는 유명 사찰의 영산회상도, 나한도, 팔상도, 신중도, 괘불 중에는 붓놀림이 신선과 같아서 호선(毫仙)이니 존숙(尊宿)이니 하는 칭호를 받는 금어나 화사의 작품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모작 운운하는 그녀의 말은 궤변 중에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거울이 되지 그래?”
“거울이라뇨?”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울처럼 정확하게 사물을 똑같이 나타내는 게 어디 있을까?”
“그럼, 어떻게 그리는 것이 잘 한 일인가요?”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탱화······.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획 하나 다르지 않는 불화······. 게다가 그런 불화는 너무 무섭고 엄숙해. 그러다보니 자연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물어봐. 절이 무섭지 않느냐구? 특히 명부전이나 지옥전은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어. 당장이라도 저승엘 데려갈 것처럼 말이지. 그래서 나는 책상에서 사무 보는 공무원 부처님, 시합에 몰두하는 운동선수 부처님, 물건을 파는데 정신없는 장사꾼 부처님,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부 부처님,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 부처님······. 바로 그런 부처님을 그리고 싶더라구. 그리고 그런 부처님이 후불탱화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한마디로 현대판 부처님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나는 술잔을 들다말고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취기라곤 전혀 엿볼 수 없는 얼굴인데도 그녀는 서슴없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술 한 모금을 가볍게 들이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생각처럼 환골탈태 중인 절도 보여서 희망적이라고 생각해. 어떤 절은 설법전에 여러 가지 밝은 빛깔로 사리자(舍利子) ․ 관음보살 ․ 지장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사천왕 등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벽화를 설치해 놓았더라구. 그러니까 조명을 켜면 나타나게 되는 대형벽화인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죽 읽을 수 있도록 반야심경(般若心經) 270자를 사이사이에 넣었더라구. ‘반야심경도’라고 말할 수 있는 부처님 그림을 보면서 뭔가 불교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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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랭이 물어갈 놈아! 또 그런 그림을 그릴 것이여?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온 내가 아무 종이에 부처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 어머니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눈만 뜨면 오색 단풍잎 같은 탱화만을 보며 자란 내가 흉내를 내보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앞으론 안 할께라우. 절대루······.
하지만 한뎃솥에서 불을 때던 어머니는 통통한 부지깽이로 여지없이 내 아랫도리를 내리쳤다.
-너도 니 아부지처럼 될 겨? 네 아부지처럼 되어서 이 에미 속을 숯껌댕이로 맹글 것이여?
나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잘못을 빌었고, 끝내 어머니는 옷소매로 눈두덩을 찍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노무 자식아! 네 아부지 따라 살면서 이 에미는 생과부가 된 거여. 너도 잘 알면서 그러냐? 네 아부지가 한 번 절에 가시면 몇 달씩 계시다 오는 거······. 세상천지에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양반이 부처님 얼굴 그린다고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고 사는 것을 모르느냐고? 그란디, 될 성 싶은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네가 벌써부텀 그런 그림을 그려대면 이 에미 속이 어쩌것냐? 아이고, 서방 복도 없는 년이 자식복인들 있을라구······.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골백번 다짐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넋두리는 끝이 났다. 하지만 몇 차례 부지깽이로 얻어맞은 뒤로는 집으로 돌아오다가 땅바닥에 막대기로 부처님의 얼굴을 그려보는 일이 잦았다.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았지만 그렸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그릴 수 있었으므로.
그랬다.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는 전혀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분이었다. 다섯 살 때 장딴지에 종기가 났었는데 침을 잘못 맞아 그만 귀가 멀었고, 그 통에 말까지 할 수 없게 된 아버지였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에 늘 우울했다. 항상 얼굴에서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인자한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 또한 들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림자 같은 아버지였다고나 할까.
그런 아버지는 후줄근한 승복차림에 왜 괴상한 도깨비 그림만을 그리는 것일까.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 집에는 놀러 가면서도 그들을 집으로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에 항상 자괴감이 컸었다.
“젊은이, 왜 나를 따라오는가?”
어느 날 우리 집을 방문한 해월 노화사를 어디까지고 따라갈 요량으로 뒤를 밟았다. 이윽고 버스에서 내린 해월 노화사가 대흥사 일주문 앞에서 내린 후 무릉도원 같은 장춘마을을 향해 막 발걸음을 떼려다가 뒤따르는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내가 해월 노화사를 따라나선 것은 한 마디로 산신각에 앉아 계시는 산신령이 현시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금어였으므로 우리 집엔 승려들이나 불화와 관련된 사람들이 이따금씩 찾아오곤 하였는데, 해월 노화사는 여느 방문객과는 전혀 달라보였던 것이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것처럼 새하얀 머리털에서는 성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단아한 얼굴은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낮달이었다.
특히 해월 노화사의 눈썹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는데, 한껏 곤두서서 휘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이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에서 상당한 화력(畵力)을 지닌 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저런 모습을 지닌 사람이 벽에 그려진 소나무에 참새가 앉으려다가 머리를 부딪쳐 떨어졌다는 황룡사(皇龍寺) 벽화를 그린 솔거 같은 분이 아닐까 여겨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나선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 나침판 없는 항선(沆船)처럼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청춘을 맥없이 죽이고 있던 스물 일곱 살 되던 해, 봄 어느 날이었다.
“왜 나를 따라오느냐고 묻질 않는가?”
거듭 재촉을 받고서야 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탱화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호, 그래애?”
해월 노화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부친이 호봉(虎峯), 그 분이렷다?”
호봉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쳤는데도 확인하듯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호봉한테 배우지 왜 내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이 나오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대들 듯이 따졌다.
“어떻게 아버지한테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계시다시피 아버지는 귀가 멀어서 말씀을 듣지 못하시고, 그러다보니 말씀 한 마디도 못하신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데 말이 필요할까? 나도 스승에게 배울 때 등 너머로 배웠는걸. 가르쳐 달라고 하면 스승은 알아서 배우는 것이지 일일이 가르쳐야만 배우느냐고 꾸중까지 하셨지.”
해월 노화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보다도 아버지는 제가 탱화 그리는 일을 싫어하십니다. 아니, 어머니 때문에 더욱 그러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까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해 오셨으니까요.”
내 말에 해월 노화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예전엔 아버지가 싫었지요. 지금껏 커오면서 아버지란 콤플렉스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태고종 종정이셨던 송만암(宋蔓庵) 스님의 손자뻘이 되시는데, 그 같은 인연 때문에 아홉 살 되던 해부터 절에서 자라셨지요. 양친 모두 잃은 터라 천애고아이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불구자인 아버지를 석초 스님이란 분이 탱화를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해 오늘 날 금어로 만드셨다 들었습니다. 절에서 20여년을 보낸 아버지는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에 가까이 지내는 노스님 한 분이 절벽에서 그만 발을 헛디뎌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목격하셨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면 시신을 거두어 줄 자식 하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20년도 더 나이 차이가 나는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식솔을 위해 어느 하루 쉬는 일이 없이 꾸준히 탱화를 그려오셨지요. 탱화를 그려서 어찌 큰돈을 만질 수가 있었겠습니까만, 워낙 부지런한 분이다 보니 헐벗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아, 그런데 왜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거예요. 누구네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말씀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와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겠다니······.”
이미 격앙된 내가 하소연하듯이 말을 토해내자 해월 노화사가 염주를 천천히 굴리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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