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선장 그만두고 작가가 되어도 잘할 것 같은데.” 앞서 소개했듯이 소설가 정비석이 ｢사상계｣에 기고한 김재철의 글을 보고 한 말이다. 김재철은 기업가였지만 열렬한 독서가이며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기업에 진력할 수밖에 없었기에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까지 모든 강연록을 손수 육필로 작성할 만큼 글쓰는 능력이 뛰어나다.
필자는 평전을 준비하면서 그의 육필 원고를 꼼꼼히 챙겨서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학계나 교육계로 진출했다면 또 다른 업적을 남겼을 것 같다. 그래서 소설가 정비석의 평가가 과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재철은 그런 평가를 면구스럽게 생각했다.
“그것은 과찬입니다. 다만 당시로서는 해양을 소재로 한 글이 드물었고, 소재가 독특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글쓰기 능력은 어디로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의 독특한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어떤 부분은 선천적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부분은 후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철도 그러하다. 필자는 그의 문장력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는 보통의 문인들처럼 체계적으로 문장을 연습하거나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문장력은 일정 부분 타고난 면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강진이란 시골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아름다운 산야가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사람이다. 사업적인 필요 때문일 수 있지만, 젊은 날 선상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 같으면 무덤덤하게 넘기는 것도 날카롭데 보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물고기든 간에 무엇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캄캄한 밤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망망대해가 지루한 항해나 고기잡이의 터전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김재철은 자신, 가족, 세상, 신, 진리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선상생활의 분주함이나 고됨 속에서도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이 풍부한 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태평양에서 바라본 석양의 아름다움, 때 묻지 않은 자연, 어릴 적 고향 마을 앞을 흐르던 강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 등이 제가 사업을 하면서도 감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배를 타면서 10여 년 동안 매일 선상일기를 기록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그의 선상일기를 보면 놀랍게도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하루하루를 일기에 모두 담았다. 그 기록엣 젊은 날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것은 유명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바다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리고 바다 개척을 통해 우리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음을 증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상계｣외 ｢신동아｣에 발표한 글 가운데 일부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남태평양에서”가 초등학교 4학년 국어에 “바다의 보고”가 중학교 2학년 국어에, 그리고 “거센 파도를 헤치고”가 고등학교 2학년 국어에 소개된 것이 대표적이다.
선상일기 속의 남태평양 바다
1963년 ｢사상계｣10월호에 실린 그의 글 “남태평양의 황파를 넘어(1):원양어업 선장의 일기” 일부를 소개한다.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기에서 풋풋한 청년의 기상과 책임감 그리고 조국에 대한 걱정을 엿볼 수 있어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6월 8일 (밤을 새워 편지를 쓰다)
남반구의 겨울철인 이때에는 사모아에도 가끔 시원한 날이 있다. 오늘도 몇 차레의 스콜이 왔고 비교적 시원한 날씨였다. 출어를 내일로 앞두고 빠진 것이 없도록 갖추느라고 꽤 바빴다. 더욱이 오늘은 토요일인지라 이곳은 미국식 그대로 토요일엔 모든 관공서는 휴무이며 상점꺼지도 오후 한 시면 문을 닫아버리니 모든 보급품을 오전 중에 다 실어야 한다.
1톤 반으 식량, 13톤의 식수, 35톤의 얼음과 25드럼의 연료유 등 중요한 보급품을 오전 중에 다 실어야 한다.
1톤 반의 식량, 13톤의 식수, 35톤의 얼음과 25드럼의 연료유 등 중요한 보급품은 이미 실었지만 그래도 135톤의 배에서 23명의 인원이 한 달 반을 바다에서 지낼 것이기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다.
아직도 태곳적 낭만이 흐르는 사모아 섬에 선율이 넘치는 밤이 오면 그 낭만은 더욱 고조되거니와 오늘은 특히 김 장군의 환영연이 있어(김윤근 소장이 참치어업 시찰차 현지를 방문했음) 더욱 흥청거렸으므로 나도 내일이면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출항 전의 긴장도 잊고 얼큰한 기분으로 하룻저녁을 지냈다. 늦게 배로 돌아와 집과 몇 군데 친지들에게 밤을 새워 편지를 썼다.
6월 20일 흐림
(…) 입항해서 받은 신문들을 미처 다 보지 못하고 가지고 나왔으므로 오늘은 차분히 앉아 뒤적거려 보았다. 4,5월의 신문이니 뉴스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된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새로우니 뉴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을 들춰보고 나니 요지경 속 같은 고국의 실정에 환멸을 느끼고 만다. 환멸 정도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이 모양이어야 하나 하고 몹시 슬퍼진다. 이역에 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이어 내가 그런 걸 생각해 무얼 한담 하고 체념해버리고 만다. 내 일이나 잘할 일이자, 고기나 많이 잡을 일이지!(…)
6월 25일 흐림, 비
한랭전선이 접근해오고 있어 한때 비가 심히 내렸고 바다도 퍽 거칠어 양승작업이 지연되었다. 일반적으로 바다가 거친 날은 낚시의 상하 운동 때문에 어획이 더 양호하건만 오늘은 어획이 신통치 않은 데다 주낙만 수없이 끊어졌다. 항장력(끌어당겼을 때에 견뎌내는 재료의 세기를 나타내는 힘의 하나) 300킬로그램의 강한 구라론사의 줄인데도 파도로 인하여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인력이 일정치 않아 줄이 늘 끊어지곤 했다.
거세어진 동남품으로 파도가 밀어 칠 때마다 데크(큰 배 위에 나무나 철판을 깔아놓은 넓고 평평한 바닥) 위로 물은 폭포처럼 쏟아지건만 이제 아무도 파도를 겁내는 이 없이 종일 제자리들을 지켜주었으며 바다가 잔잔하면 소화가 잘 안된다는 L씨는 머리부터 파도를 뒤집어써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을 푸푸 하고 털어 젖히면서 오늘 반찬은 잘 장만하라며 기염이 대단하다.
그래서 그랬던지 오늘 저녁엔 팥밥을 하고 반찬도 한 가지 더 올랐다. 그렇게나 씩씩하고 강인한 나의 선원들이건만 밤이 되고 자정이 지나니 그 파도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선원이 눈에 띈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새로운 일을 지시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미안하고 무슨 큰 죄라도 짓고 있는 것만 같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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