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은 숨어있는 자연의 지혜로써 생겨난 것이다.
치장, 장식, 과장이 없다. 소박하고 수수하다. 막사발에서 무욕과 순진무구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연구자들 중에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이 이르는 기간 동안 왜병들은 수많은 도공과 도자기를 약탈했다. 그들이 특히 눈에 불을 켜고 가져간 것은 흔히 '막사발'이라 불리는 서민들의 생활도자기였다.
막사발은 말 그대로 흙을 뭉텅 떼어서 대충 빚어 유약통에 텀벙 담갔다가 그냥 꺼낸 사발이다. 새것이었을 때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이고 낡고 손때 묻으면 막걸리잔으로 쓰던 그릇이다.
이 막사발은 일본으로 건너가 희대의 예술품 대접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예야스는 이 막사발에 일본말로 이도차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귀한 찻잔으로 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중 몇 점은 일본의 국보가 됐다. 우리의 서민생활용품이 일본의 국보가 된 사연은 우리에겐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 부끄러운 역사를 조명한 책이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동주씨가 쓴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한길아트 펴냄)이다.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된데 가장 먼저 일조한 사람들은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일본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막사발에서 평범속에 묻어나는 고귀한 미학을 찾아냈다. 그들은 유약이 온도부족으로 응결되어 오돌도톨한 것에서 무사의 칼집 장식과 닮은 점을 찾았고 사발의 차가운 곡선에서 단호한 결단력을 읽어내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무사들의 심미안은 차츰 예술로 승화됐다. 그러기를 400년. 세계적인 동양미술 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막사발의 평범의 미학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인위로 만들지 마라 그것은 추하다. 자연을 범하려고 하는 짓은 바보짓이다. 본능이야말로 지혜보다 더 낳은 지혜가 아닌가. 막사발은 숨어있는 자연의 지혜로써 생겨난 것이다."
미 완벽의 자연스러움에서 깊이 있는 미학을 찾아낸 일인들의 심미안에 다시 또 부끄럽다. 일본에서 값이 치솟자 꼬챙이를 든 한국도굴꾼들이 온 무덤을 뒤지고 다녔다는 일화를 접하는 순간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조선 막사발의 진실을 알아보자. 막사발의 역사 역시 도자기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의한 사기장의 유출과 문화재 수탈의 뼈아픈 역사이며, 일본에서 수백 엔을 호가하는 데 눈먼 국내 도굴꾼들의 부끄러운 역사다.
막사발이란 새것일 때는 밥이나 국을 담는 그릇이었다가 오래 되어 때가 묻고 금이 가면 막걸릿잔으로, 더 험해지면 개밥그릇도 되는, 서민들의 생활잡기(生活雜器)의 통칭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막사발이 16세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차완’(非戶茶碗)이라 불리며 일본 차인들로부터 ‘대명물’로 추앙받게 되며, 차를 즐겼던 일본의 무사들은 이도차완을 결속과 신뢰의 징표로 주고받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는 기껏 가난뱅이 민중들의 생활 잡기에 불과했던 막사발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자신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것도 노리지 않고 만든 것에 지나치게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본인 특유의 극단적인 탐미주의일 수 있으며, 조선인의 미감(美感)을 폄하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새로운 견해를 우리는 바라볼 필요도 있다. ‘막사발’이 막사발이 아니라 승려들의 법불(法佛), 만다라의 법에 따라 제작된, 오랜 연원을 지닌 불교미술품이라는 것, 세속의 생활 잡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어느 수행자의 기도로 빚어진 만다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석가모니의 마음에 닿고자 하는 불멸의 존경심이 빚어낸 작품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막사발은 숨어있는 자연의 지혜로써 생겨난 것으로 인간의 마음이 깨달음에 이르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 인위로 만들어 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연을 범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본능이야말로 지혜보다 더 낳은 지혜가 아닌가. 막사발은 숨어있는 자연의 지혜로써 진정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더욱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막사발은 애착, 집념, 욕심이 없다. 천진무구하고 자유자재의 표정이다. 형식과 꾸며진 미의식도 없으므로 홀가분하고 편안하다. 아무리 보아도 이만큼 수수하고 소박할 수가 없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그릇의 ‘한류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막사발의 그릇은 치장, 장식, 과장이 없다. 소박하고 수수하다. 막사발에서 무욕과 순진무구의 표정을 볼 수 있다. 막사발의 밑동에 흘러내린 유약의 자국이 마치 개구리 알과 같이 뭉쳐있는 것을 예술적인 표현으로 보았다. 막사발을 손으로 잡을 때 울퉁불퉁한 그릇의 촉감과 차를 따랐을 적에 생기는 색감의 변화에 오묘한 미의식을 느껴봄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막사발은 애착, 집념, 욕심이 없다. 천진무구하고 자유자재의 표정이다. 형식과 꾸며진 미의식도 없으므로 홀가분하고 편안하다. 아무리 보아도 이만큼 수수하고 소박할 수가 없다. 모두가 바라는 최고, 최선, 유일, 완벽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빚었을 뿐이다. 꽃이고 잎이고 바위이고 자연 상태 그대로이고 싶었다. 꾸미고 치장하고자 하면 부자연스러워 지는 법이다. 밭일을 하다가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밭두렁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막걸리의 ‘막’처럼 막 만들었다고 해서 ‘막사발’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그릇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그릇이 막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막사발로 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그릇은 일본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도차완(井戶茶碗)’이라는 이름이다. 사진의 막사발은 본문에 소개된 대표적인 이도차완이다. 얼핏 보면 하치의 그릇 같으나 조선 도공이 무심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이 그릇은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불가사의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분명히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 알려지면서 그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릇의 한류 바람이 분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릇은 한국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최상의 막사발은 모두 일본에 있다.
이 그릇이 일본에 알려지자 어떤 일본 도공은 “이런 그릇을 일생 하나라도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고,
어떤 일반인은 “이 그릇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기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다인은 이 그릇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신성한 그릇이라는 의미로 신기(神器)라 부르면서 그릇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실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사람들이 이 막사발에 환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부하들에게 이 막사발을 하사했는가 하면, 그 부하들은 좋은 막사발을 이들에게 바쳐 살아남기를 도모했다는 것도 많이 아는 사실이다.
그중에 쓰츠이 준케라는 성주는 도요토미의 말을 어겼다가 이 그릇을 그에게 헌상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이 그릇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쓰츠이즈츠’라고 불린다. 그 당시 우리 그릇의 파워가 이리도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막사발이 불가사의하다는 점은, 이 그릇의 용도에 대해 아직 학계에서 완전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그릇이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찻잔 용도로 쓰이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한국에서 전통차를 마실 때 쓰는 찻잔에 비해 다소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일본인들이 즐겨 마시던 차는 지금 우리가 많이 마시는 종류가 아니라 말차(末茶) 였다. 말차는 찻잎을 분말로 만들어 이것을 풀어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릇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아직 확실히 모른다. 밥그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제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이 그릇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 잠깐 만들어졌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되었던 지역도 경상남도 일원에만 해당되고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이 그릇이 어쩌다가 일본에서 그렇게 큰 인기를 끌었을까요?
이 그릇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도요토미의 차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라는 승려이다. 인기의 비결을 다 캘 수는 없으니 미학적인 면만 살펴보도록 해보자.
이 찻잔 내면을 보면 작은 옹달샘이 비친다고 한다. 샘물이 솟아나오는 듯한 신비를 느끼는 것이다. 매우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본의 다실. 완벽미를 추구해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미학과는 정반대에 서 있어 더욱 가치 있는 막사발
이것을 그릇 내면의 미학이라고 하면 외면의 미학도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다실을 보면 매우 규격적이고 대칭적이다. 일본의 미는 이런 것이다. 완벽미를 추구해서 어디 빈틈이 없다. 조금 답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숨이 막힐 수도 있겠다. 일본의 다실에 우리의 그릇이 놓인다고 상상해보면. 그 순간 마음이 탁 풀리면서 아주 편안해진다. 이 막사발의 미학은 일본 미학과 정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막사발은 보통 매우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그릇으로 불린다. 원래 이 그릇은 청자에 흰색을 입힌 분청자에서 나왔다. 분청자를 유약에 담그든지 아니면 붓으로 유약을 거칠게 칠하는 방법을 통해 만들었다. 분청자가 이미 매우 자유분방한 미학을 자랑하는 그릇인데, 막사발은 더 거친 모습을 보인다.
막사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교토에 있는 대덕사(大德寺)라는 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그릇이다.
이 그릇을 보고 있으면 그 자연스러움에 놀랄 지경이다. 그래서 어떤 일본 학자는 “이런 그릇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이 조선의 도공 손을 빌려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막사발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움은 한국의 미학
그릇에 금이 가면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옆이 터지면 그것도 그대로 놓아둔다. 밑으로 유약이 흐르면 그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릇 모양만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다음부터는 자연에 맡겨놓는다. 한국 미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가능한 대로 인위적인 손길을 줄이는 데에 있다. 이 그릇에서도 그런 정신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모습은 당당하기도 하다. 자연과 인공의 솜씨를 절묘하게 배합한 작품이 바로 이 막사발인 듯하다.
“(막사발은) 우리 일본인들에게 신앙 그 자체이며 (…)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주었던 (…) 신과도 같은 그런 존재였다.” 이것은 윤용이 교수가 인용한 어느 일본인의 이야기이다.
일제시기에 이 그릇의 미학을 처음 발견한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사람은 일본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점을 보아 알아차리는 지성인 이기도하다.
내 마음도 막사발처럼 넉넉한 품을 지니고, 속에서 그리움의 향기를 낼 수 있을까 싶다. 무욕과 무심에서 오는 편안한 표정을 지닐 수 있을까. 막그릇을 공손하게 손 위에 놓고서 오래오래 바라보곤 한다.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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