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낙천 윤재찬 옹 말씀
하피첩
매조도(1)
매조도(2)
“생선을 잡아 손수 요리하네”
(백련사 아암 혜장과 제자들의 뒷바라지)
6. 남당사
7. 매조도(2)가 이인행에게 간 사연
8. 이인행은 누구이며 <신야집>에 실린 내용은?
9. 제1회 동아옥션 도록의 다산간찰
10. 결론
낙천 윤재찬 옹 말씀 — 성균관대학 국문과에서 호남지방으로 처음 답사를 가서 다산초당을 찾은 것이 1970년대 초였다고 한다. 당시 백사 이우성 선생과 시인 김구용(金九庸) 선생 등이 종려관에서 윤옹과 일숙하게 되었으니 다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을 것은 물론이다. 그 자리에서 시인 김구용이 문득 “다산 선생이 여기에 계실 적에 혹시 가까이 모신 여자는 없었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윤옹은 김구용의 얼굴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선생의 사적에 관해 물었습니다만 그런 질문을 받아보긴 처음이오”하고 망설이다가 “이왕 물었으니 내 털어 놓으리다”하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윤옹이 들려준 이야기인즉슨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계실 적에 의복, 음식을 수발하며 모신 여자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군동면 석교 출신으로 정씨였다고 하며, 이름이 홍임(紅任)이어서 그녀를 홍임모(母)라고 불렀다 한다.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던 홍임과 모의 이야기가 학계에서는 전부였다. 지금까지 나온 문헌이나 사료, 편지 등을 추적하여 추론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2. 하피첩
1806년 늦은 겨울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부인 홍혜완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낡은 치마가 보내져 왔다. 낡은 치마는 부인이 1776년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치마였다. 오랜 세월 탓에 색이 바랜 누런빛이었다. 1806년 두 사람이 결혼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부인 홍씨가 ㄴ마편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담은 시 한 수를 편지와 함께 동봉했다.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며/ 그대와 이별 칠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정인보)
3년 후 다산은 1810년 부인이 보내온 치마를 꺼내 자르고 다림질하여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쓴 글은 네 개의 첩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하피첩>이다.
3.매조도(1)
<제 하피첩>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은 살펴보면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다섯 폭 짜리 낡은 치마를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은 분홍빛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래 옅은 황색이 되었다. 서본으로 쓰기에 마침 맞았다. 잘라서 작은 첩을 만들고 손길 따라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준다.
훗날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양친의 꽃다운 은택을 떠올린다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름하여 하피첩이다. 붉은 치마를 바꿔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순조10) 초가을에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하피첩>을 만들고 자투리천이 남았던 모양이다. 3년 뒤인 1813년 다산은 짐을 정리하다가 그때 쓰고 남은 천조각을 발견하고 마침 강진에 사는 친구 윤서유(尹書有)의 아들 윤창모(尹昌模)에게 딸을 여의고 그의 딸에게도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위 윤창모는 초당에서 공부하던 제자였다. 딸을 강진으로 데려와 친구 아들과 짝지어 주고 나서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을 시에 담아 그 아래쪽에 썼다. 그리고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었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 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 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가경 18년 계유(1813) 7월 14일 열수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산 지 여러 해가 지났다. 홍부인이 여섯 폭(다섯 폭은 오기)짜리 낡은 치마를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 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고, 그 나머지를 써서 작은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4. <매조도>(2)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2)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글씨도 그림도 영락없이 다산의 솜씨이다. 그림 아래 7언 절구 한 수와 방제가 적혀 있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서 피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이 활짝 피었구나.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깃의 작은 새
한 마리가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가경 계유(1813) 8월 19일 자하산방(紫霞山房)에서 혜초밭에 씨 뿌리는 늙은이에게 주려 하노라.
이 시는 1813년 8월 19일에 지었다.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1)를 이해 7월 14일 그렸으니 이 매조(2)는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가을에 그린 매조도 두 폭 하나는 새를 두 마리 그렸는데 다른 하나는 새를 한 마리만 그렸다.그나마 하늘가에 혼자 떨어져 남으리라는 알 수 없는 여운을 담은 채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장소는 자하산방이다. (자하산방은 다산초당의 뒷산의 별칭이다)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다산이 이 그림을 종혜포옹(種蕙圃翁)에게 의증(擬贈)한다고 적었다. 종혜포옹은 혜초밭에 씨 뿌리는 늙은이다. 의증은 진짜 줄려고 한 것이 아니라 줄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신자가 가상의 인물이거나 구체적으로 밝히기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포옹(圃翁)은 다산 자신을 나타낸 것이 아닐는지?
<매조도>(1)을 딸에게 준 것이었다면 <매조도>(2)도 딸을 위해서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산은 딸을 시집보내고 그림과 시를 그려준 뒤 잇달아 소실에게서 딸을 얻었다. 얼마 안 있어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하늘가를 맴돌며 울겠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해서 갓 태어난 딸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생선은 잡아다가 손수 요리하네”
(백련사 혜장선사와 제자들의 뒷바라지)
다산은 전릉계원으로 아암혜장(兒庵惠藏)의 제자이자 백련사 승려인 수룡색성(袖龍賾性)과 철경응언(掣鯨應彦)을 적고 있다.
수룡색성은 1805년 봄부터 다산의 지도를 받고 차를 만들어 주었으며, 같은 해 겨울에는 다산의 큰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과 함께 아암혜장의 후원으로, 사의재(四宜齋)에서 고성암(高聲庵)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다산의 수발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1846년 2월 수룡색성이 입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정학연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수룡이 입적하였다니 천리에서도 마음이 아프오. 노승은 일찍이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선친을 모신 사람이기에 사랑함이 남달랐다오. 오랜 벗이 영락하였다니 어찌 슬퍼하며 탄식하지 않겠소.”
전릉계 승려들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다산이 1802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아암혜장은 백련사 승려 한 사람을 보내 초당에 머물면서 부엌일을 돕도록 하였는데, 이때 상황이 다산이 지은 다산화사20수(茶山花史二十首)에 잘 묘사되어 있다.
“대숲속에 부엌일을 한 승려가 돕는데 머리털과 수염이 나날이 덥수룩 해지니 가련하다. 이제는 불가의 계율을 파괴하고 생선을 잡아다가 손수 요리하네.”
그 뒤로도 젊은 하인을 들였다가 하도 게을러서 이를 쫒아낸 사연을 적은 <출동문>도 있다. 다산초당에는 열여덟 명의 제생들로 늘 복잡했다. 온종일 공부하고 책을 편집하는 손길들이 분주했다. 이들의 밥과 반찬을 누가 해주고 다산의 수발을 누가 들어주며 빨래하는 일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산은 1810년을 전후해서는 중풍으로 마비 증세까지 와서 서너 해 고생도 했다. 다산은 이런 형편에서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 당시에 이것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편을 유배지로 떠나보낸 후 갖은 뒷바라지에 지쳐가던 아내를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뒤 정작 다산의 해배는 그 <매조도>(1)(2)를 그리고나서 5년이 지난 1818년에 이루어졌다. 해배되어 두릉에 온 후로 홍임이와 모가 왔었던 듯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모녀는 두릉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다산초당으로 내려왔다. 본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가 속이 좁다’고 탄식한 적도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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