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 강물이 흐르네 /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돋우네 /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 강물이 흐르네.
시인 김영랑을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작품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이다. 여기에서 ‘도른도른’이란 말은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정담을 나눈다는 말인데, 참으로 모국어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이다. 지난 5월에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한 고재종 시인의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의 시를 읽어보면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란 대목이 나온다. 소월시문학상의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모감모감’이란 어휘는 참으로 정겨움을 주는 시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국어사전에도 없는 어휘이기는 하지만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모감모감’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랑의 ‘도른도른’ 역시 모순형용이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국어사전에 없는 어휘이지만 얼마나 정겨움을 주는 말인가.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이란 말도 가슴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에 있는 것 같기도 하며 핏줄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슴과 눈과 핏줄 모두에 그 마음이 숨어 있다는 표현이 아닐까.
영랑의 시는 찬란하게 아름답고 향토색 짙은 방언과 함께 서정시의 대가로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으로 우뚝 선 강진의 영원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
그런데 영랑은 일제 강점 말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난다 하는 작가들 대부분이 친일문학에 머리를 숙일 때, 분노의 저항시를 쓰다가 붓을 아예 던져버렸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 나는 그 독이 벗도 선뜻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
그리고 영랑은 ‘오래도록 가슴에 독을 차고’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일러 그의 마음이 춘향이와 같은 마음, 두견의 피울음보다 더 진한 나라사랑에 대해 그냥 서정시인으로만 인식했다.
영랑은 달착지근한 순수서정에의 세계에만 매달린 시인이 아니었다. 영랑의 나이 열네 살 되던 때 휘문의숙에서 만난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석방 후 30년간이나 감시를 당했다.
영랑이 고향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킬 거사를 세우고 주머닛돈까지 털어가며 자금을 모으다가 거사 3일 전 일경에 의해 일당 모두가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에서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는데, 7개월 복역 후 출옥했을 때는 모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동경 유학 시절 독립운동가 박열과 친구가 되기도 했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일본의 갖은 압박을 이겨낸 일화는 많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 내 산 채 짐승의 발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이라 내 맡긴 신세임을/
‘독을 차고’의 또 한 대목이다. 이 시를 쓸 때는 천황을 미화하는 글을 쓸 것을 강요받던 때였다. 미화하는 글을 쓰면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분연히 영랑은 독을 찬 마음으로 ‘거문고’를 쓴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때만 몰려다니고 /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다니어 / 네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여기에서 잔나비떼는 친일파를 일컫는다. 차라리 왜놈 같으면 그냥 보아주기라도 하련만 왜놈도 아닌 것이 왜놈 행세를 하며 거들먹거린다. 밉기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박두진 후배 시인은 그런 영랑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오! 친구여! 현실은 무섭고 괴롭도다. 이 세대에 태어난 불쌍한 천재들이 허덕이다 못해 모조리, 변통하지 않았더냐. 사람으로 살려면 오로지 떳떳해야 시원하고, 그러려니 현실이 아프고 그래 우리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가는 게지.”
영랑은 난다 긴다 하는 문인들이 변절하고 왜놈들을 찬양했지만 끝까지 일편단심으로 독립을 고집하며 당당하고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발발해 서울에서 파편을 맞아 생을 마감한다.
그동안 강진군에서는 10여 년 넘게 김영랑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계속 미뤄졌다. 이에 손녀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김혜경 회장이 직접 관계부처를 찾아다니며 신청을 했고, 추서명단에 올리는 기쁨을 맞았다. 2008년 금관문화훈장 추서되기도 한 김영랑이 이제 명실공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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