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구운몽』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야기이다.
위대한 점은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낭만적으로 보여준 데 있다
특정한 사물이나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이야기에 대한 정확한 접근으로 이끄는 낱말이나 키워드를 찾기가 수월치 않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안다고 할 때 어떤 기준을 스스로 세워 판단하게 될까? 사전의 해석이나 검색을 통해 접근하다 보면 다분히 자의적인 근거에 의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나도 알고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얼마나 근거 없는 추측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한 것이 바로 [구운몽도]라는 책을 통해서다. 우선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아는 것이 몇 가지 단편적인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쑥스러워 실없이 웃어본다.
[구운몽도]는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되어진 바를 통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구운몽에 접근하는 특이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이 책 이야기 중심인 구운몽에 대해 알아보자.
구운몽은 조선 선조 때 사람 서포 김만중이 유배간 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소설이다. 성진이라는 불제자가 8선녀를 희롱한 죄로 성진을 포함한 8선녀 모두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업보를 받고 양소유와 8명의 여자로 태어난다. 양소유는 속세의 삶을 통해 8명의 여자와 처와 첩으로 만나 원하는 바를 다 이루며 살지만 말년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고 불법에 귀의하였다는 이야기다. 양소유와 8명의 여자가 만나는 과정의 에피소드를 주요 줄거리로 한다. 구운몽도는 이런 구운몽의 줄거리 중 특정한 장면을 나타내는 그림, 즉 저자가 본 30여장에 이르는 구운몽도를 통해 구운몽이 제시하는 주제와 구운몽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는 사상적 배경을 비롯하여 비슷한 주제를 보여주는 그림들과 비교분석을 통해 소설 구운몽에 대한 자세한 접근을 하고 있다. 구운몽도가 그려지게 되었던 배경뿐 아니라 구운몽이 가지는 미학적 의미까지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 책 [구운몽도]에서 제시하는 주요장면으로는 성진과 8선녀가 돌다리에서 만나는 모습, 인간 세상에 양소유로 다시 태어나 진채봉을 만나는 장면, 낙양 기생 계섬월을 만나는 장면, 여장하고 정경패를 만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자객 심요연을 만나는 장면, 남해용왕의 딸 백능파를 만나는 장면, 난양공주와 정경패의 칠보시 장면, 낙유원에서 기예를 겨루는 장면, 육관대사가 찾아오는 장면, 꿈에서 깨어나 불법에 귀의하는 장면 등 8명의 여자들을 차례로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많지 않다고 본 저자는 그림은 종이 위의 이야기라고 하며 그림 읽기를 통해 구운몽도를 차분하게 살펴본 내용을 담고 있다. 구운몽을 그린 그림들은 각각의 장면을 똑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고 그린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표현방법을 쓰고 있지만 내용이 제시하는 방향성은 다 비슷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본다. 사용의 용도에 맞게 병풍이든 민화풍의 그림이든 구운몽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은 꿈속의 세상과 현실세계가 중첩되게 나타나고 있는 소설의 이야기를 반영하며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구운몽은 결국 남녀 간의 사랑이 중심이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의 흐름이지만 그 속이는 것에 악의가 배재되어 있어 흥미와 재미를 준다고 파악하며, 익히 알려진 구운몽의 중심사상인 인생무상이라는 무거운 텍스트로만 읽지 않고 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옛 선인들의 삶이 보여주는 활달함과 자유 그리고 낭만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구운몽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 직한 당대의 그림과 이야기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구운몽과 구운몽도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또한 키워드 속 키워드는 구운몽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자료와 그 근거들을 비롯하여 당시 구운몽과 관련되어 있었던 이야기를 다양하게 알 수 있어 책 속의 또 한권의 책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특정한 사물이나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찾아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확인하는 키워드 한국 문화는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찾아가는 계기로 작용하기에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야기는 말로 그린 그림이요, 그림은 종이 위의 이야기다. 이야기와 그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림은 살아 있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죽은 이야기를 살리는 묘약이다.그림은 이야기의 핵심을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다. 동시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독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은 이야기를 만나 살아 있는 화제畵題를 얻고, 이야기는 그림을 만나 전달의 동력을 얻는다.
유럽의 미술관을 둘러보면 태반이 성경이나 희랍 신화 등에 나온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 많은 그림 가운데 「수태고지(受胎告知)」가 인상적이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그것을 알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했을 뿐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은 처녀였다. 이런 처녀 앞에 웬 사람이 나타나 임신 사실을 알렸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더욱이 당시 유대교의 율법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다.
동양으로 가보자. 당(唐) 황제의 명령에 따라 토번(吐藩, 티베트)을 물리치려고 출정을 나간 양소유는 연전연승하지만, 반사곡이라는 골짜기에서 그만 적에게 에워싸이고 만다. 적을 물리칠 계교를 고민하던 양소유는 문득 잠이 들고, 꿈속에서 동정호 용왕의 딸인 백능파를 만난다. 백능파는 자신과 늑혼하려고 하는 남해 용왕의 태자를 피해 토번까지 왔다고 말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해 태자가 백능파를 빼앗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그러나 기세등등했던 남해 태자는 양소유에게 져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남해 태자는 백능파를 포기하게 되고, 동정호 용왕은 이를 기뻐하며 사위가 된 양소유를 환영하는 잔치를 연다. 잔치를 마치고 양소유는 동정호 가까이에 있는 남악 형산을 구경하러 가는데, 그곳에서 한 노승을 만난다. 노승은 양소유를 맞으며, 양소유에게 아직 돌아올 때가 아니라며 아리송한 말을 남기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소유는 잠에서 깨어난다. 모든 것은 그저 꿈이었던 것일까요? 양소유는 자신이 머물던 백룡담 위쪽으로 갔다가 깜짝 놀란다. 냇물에는 고기비늘이 가득하고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벌어졌던 남해 태자와의 싸움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소유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실은 양소유 자신이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 양소유가 꿈속에서 만났던 노승은 양소유가 현실에서 불제자인 성진이었을 때 스승이었던 육관대사다.
꿈속의 꿈이 나오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함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흔히 소설 『구운몽』을 '현실-꿈-현실'의 구조로 설명하고는 하지만, 앞에서 살폈듯이 『구운몽』의 구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양소유, 아니 성진이 육관대사 앞에서 욕망에 흔들린 것을 반성하는 말을 하자 육관대사는 꿈과 현실을 명확하게 가르려는 것부터가 잘못이라며 성진을 일깨운다. "네 스스로 흥이 나서 갔다가 이제 흥이 다해 왔으니, 내 거기에 무슨 간여함이 있었겠느냐. 네 또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인데, 꿈으로 대신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 세상과 꿈이 다르다고 한 것 아니냐. 이것이 바로 네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나비가 혹 장자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쳤으니, 장자가 진짜인지 나비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느니라. 성진과 양소유는 어느 쪽이 진짜이겠느냐." 이처럼 꿈과 현실이 뒤섞인 환상의 세계를 그린 『구운몽』을 조선인들은 구중궁궐의 임금님부터 규방의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사랑했으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운몽도>는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이었던 셈이다.
<구운몽도>의 정경패 장면(문화일보)
오늘날 우리가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고 원작에 관심을 갖거나 반대로 원작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듯이, 조선인들도 『구운몽』을 읽은 다음에 <구운몽도>를 보며 소설의 감동과 재미를 음미하거나 <구운몽도>를 보고 소설을 찾아 읽었겠지요. 사실 조선 시대에는 소설 속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 흔치 않았는데, <구운몽도>는 꽤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조선인들이 『구운몽』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춘향전』에서 춘향의 방 안에 <구운몽도>가 있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정병설 교수의 『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관련 정보)은 <구운몽도>에 그려진 소설 속 장면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소설의 줄거리를 정리하고, <구운몽도>가 언제 만들어지고 어떻게 쓰였는지 추적해 갑니다. 그리고 소설이 고전으로서 지닌 가치와 미학을 설명합니다. 이미 『구운몽』을 읽어 본 사람이라도 <구운몽도>를 보면서 소설만 읽었을 때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책이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구운몽』에 중국 소설인 <유의전>을 패러디한 장면이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소설의 사상적 배경이 밀교일 수도 있다는 연구가 있음도 알았습니다."이처럼 『구운몽』은 밀교의 만다라 사상과 더 잘 맞아떨어지는 듯하지만, 명심할 점은 밀교가 사상적 배경이라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상이 작품 세계를 좀더 풍부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소설에 과중한 사상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소설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구운몽』은 사상서가 아니다. 사상서로 읽으면 오히려 소설로 읽히지 못한다. 서두와 결말 부분에 액자의 테두리처럼 조금 나오는 연화봉 도량 장면에 주목하여 작품의 사상적 가치를 높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소유의 일생을 중심에 놓고 작품을 읽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다.<구운몽도> 병풍을 한번 펼쳐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구운몽』의 중심은 낭만적 사랑이다. 고전으로서 『구운몽』의 위대한 점은 그 불교적 인생철학이 아니라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낭만적으로 보여준 데 있다. 종반부에 있는 육관대사의 의미심장한 불교적 계명은 낭만적 삶을 다시 진지하게 성찰하게 함으로써 소설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구운몽도>는 하나의 작품이 아닌 『구운몽』의 내용을 그린 여러 작품을 한데 아울러 가리키기 때문에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다릅니다. 아주 섬세하게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도 있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그렸든 <구운몽도>에는 조선인들이 꿈꿨던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그 그림 속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를 누비며, 잠시나마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았겠지요. 우리도 그처럼 <구운몽도>와 함께 양소유와 팔선녀의 낭만적 사랑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로 알려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4∼1344)의 「수태고지」를 보면,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건넨 첫 말은 “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이다. 그림에서 천사의 입에서 나와 마리아의 귀로 흘러가는 한 줄기 빛 위에 적힌 글이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 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말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제1장 28절에 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자 가브리엘은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며 진정시킨다. 그러고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했음을 알린다.
「수태고지」, 시모네 마르티니, 연대미상, 우피치 미술관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본지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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