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인문학으로 본 세상-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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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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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본 세상-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 2

진실 된 삶, 건강한 삶.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

군자와 선비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은 남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군자와 선비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불원천(不怨天) 하늘을 원망하지 마라, 불우인(不尤人) 남 탓하지 마라.’ 선비들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외쳤던 인생의 화두다. ‘내 탓이오철학은 남 탓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는 오늘날의 세태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데는 여러 가지 생각과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의라는 세상을 바라보고 건강한 삶을 진실 되게 살아가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사는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진실 된 삶을 만들며 사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정의(正義)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철학 영역에서는 정의의 올바른 뜻을 확립하고자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러나 응보적 정의는 목적이 '잘못한 사람 벌주기'이기 때문에, 막상 그 벌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죄의 무거움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붙여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통, 죗값이 되는 건지, 고통을 받으면 정말 죄의 무거움을 깨닫는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찰하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 그 결과, 목적 없는 공허한 벌주기만 남발하게 되어 응보적 정의에서 잘못한 자는 진짜 반성하기보다는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거나, '꼰지른' 사람들에게 복수심을 품는다. 응보적 정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처벌만 받지 않기 위해 법을 공부하면서 위법하지 않게 공격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꺾고 꺾이는 힘에 순응할 뿐 자발적인 책임감을 배우지 못해 힘의 지배 논리를 익히게 된다. 또한 피해자는 고통을 위로받을 방법이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엄벌주의를 외치게 되지만, 정작 가해자가 엄벌을 받아도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좋은 삶의 모습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각의 새로운 경험과 그에 바탕을 둔 상호 간의 토론을 통해서 늘 새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와 그 구성원이 자유, 평등, 우애에 기반을 둔 좋은 삶을 지향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미덕으로 개인의 삶에 각인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정의를 바라보는 방식을 행복의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로 정리하며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근현대의 이마누엘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까지 두루 섭렵한다. 샌델이 여기서 정의를 둘러싼 딜레마적 요소로 제시하는 것이 행복자유미덕이다.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냐,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냐, 아니면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냐? 행복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체의 미덕이 훼손될 수 있다.

  벤담의 논리는 전체의 행복을 위해 소수 개인들을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정의다. 인간이란 이성을 사용해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입각해 행위 할 수 있는 존재다.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자기가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인간은 누구나 이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200년 뒤 롤스는 칸트의 이 주장에 입각해 평등적 자유주의이론을 제시했다.

진실 된 삶, 건강한 삶.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

우리가 세상에 머물다 갈 삶의 시간은 짧다. 마음을 비우고 대자연의 순리 따라 즐겁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앞집 사람, 옆집 사람 누가 살아가는지 알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옛날에 담장으로 넘나드는 호박덩쿨 인심 같이 나눠먹던 시대가 그리워 질뿐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나라는 삼강오륜(三綱五倫)살아있다. 살아있는 오륜을 살피면 부자(父子) 사이의 친애(親愛),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 부부(夫婦) 사이의 분별(分別), 장유(長幼) 사이의 차서(次序), 붕우(朋友) 사이의 신의(信義)는 아직도 유효한 일면이 있다고 본다. 사악한 자들이 활보를 치는 사회가 되어 참되고 진실한 삶과 정을 찾을 수 없는 한심한 사회로 내몰려 버리고, 서로를 탓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효 사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 즉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하늘을 원망치 말고 남을 탓하지 말라하였는데 그 정과 삶을 이제는 찾아 볼 필요가 있는 시대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미국헌법을 기초한 나이 80줄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진심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비록 나이 때문에 죽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젊어서 죽는 것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진심으로 삶을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

                  <법구경>

 마음이 모든 선한 일의 전조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니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뒤따르리

영원히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법구경)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효를 태공(太公)은 이렇게 말했다. "효도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도 다시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을 것이요, 불효한 죄를 범한 사람은 자기도 다시 불효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저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수를 보라. 방울방울 떨어져서 조금도 어기거나 옮기는 일 없이 제 자리에 떨어 진다"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을 생각하면 우리 삶의 정을 심도 있게 생각하여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법구경에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착한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도 향내가 난다." 고 했다. 올바른 생각을 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고 진실한 삶이요 행복한 삶이라한다. 옛 사람들은 약을 정()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했다 한다. 즉 이러한 정의 원리에 근거 해 환자를 살폈으며 약을 처방을 할 때에도 이러한 원칙을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인삼이 좋다하여 인삼만 장기간 복용하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 인삼에 감초를 넣어 끓여 들면 부작용이 없게 하는 것이 정의 원리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비롯하여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공산품처럼 획일적으로 만들어 진게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체로서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화와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에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산업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머리가 좋고 우수한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 집단이 가장 효율적일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질 않다. 여러 악기가 모여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처럼 개성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잘 어울릴 때 서로에게 유익이 되며 엄청난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완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몸소 만드셨기에 서로에게 필요치 않은 존재가 없다. 이 세상에 필요치 않은 것이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에게 필요와 부족을 채워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효율적인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음()적인 성질의 식물이요 빛을 향해 왕성하게 자라는 것은 양()적인 식물이다. 분명 음적인 식물은 성질이 차고 수렴하는 기운이 있지만 양적인 식물은 성질이 덥고 발산하는 기운이 있다. 그래서 차고 수렴하는 음적 식물의 뿌리는 양적인 열성질병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생태를 유심히 관찰하여서 약도 얻고 건강의 지혜도 찾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음식의 재료들을 살펴서 궁합이 잘 맞는 음식과 해로운 음식의 배합상태를 찾아냈던 것이다. 즉 음식의 성분분석이나 칼로리 계산이 아니라 성질을 파악하여 멋진 조화를 창출했던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들이 먹는 음식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각종 농약 방부제 살균제 중금속 인공색소 화학조미료 정제된 소금의 과잉 사용 등으로 인해 우리의 식탁이 위협 받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우리의 식생활을 한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옆에 사람이 성가시게 굴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너무 멀어 적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활 쏘는 사수의 문제다. ‘내 탓이오!’ 라고 외치는 사수(射手)가 진정 군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운명(運命)이란 글자 그대로 나에게 다가온 상황()을 내가 통제()하는 것이다. 남을 탓하거나 원망한다고 그 운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가온 운명에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견뎌나갈 때 진정 운명은 내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운명을 이해하고 내 탓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 자득(自得)한 선비의 모습이 깃드는 것이다.

창문이 두 개로 존재해야 하나로 된 방보다는 습기가 덜 찬다. 두 개의 창문은 공기의 소통도 잘되게 한다. 어쩌면 두 개의 창문처럼 소통이 잘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서 들어오고 나가는 순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살아가는 것이 삶에 행복을 만끽하고 자연스럽게 받을 수 도 있는 것일 게다. 자연스러운 자연을 닮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 일 것이다.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거부하지만 받아드리는 조화 속에서 공존된 가치를 이루어 가는 조화 말이다.

원망하지 않는 삶 / 일타스님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며 금생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다음호에 계속)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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