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윤재준(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⑥
모범생
TV, 전화, 라디오, 냉장고, 세탁기 등 문화 생활이 없던 시기였다. 물론 전기가 없으니 가전 제품이 있을 리 없다. 컴퓨터는 미국에서 태동하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배운 것은 대학 졸업 후 1970년 KIST에 근무 할 때다. 지금은 인터넷과 mobile phone이 생활 필수품이 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신문도 없었다.
그래도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면 소재지를 지나가곤 했으니 내가 사는 곳이 깡촌은 아니라고 하겠다. 상가가 없었으므로 공책 연필 등 학용품도 5일만에 돌아오는 재래시장에서 구입했다. 공책은 재생종이로 만들었는지 색깔이나 질이 좋지 않았다. 연필은 페인트칠이 되어 있지 않은 나무 재질 그대로이고 지우개도 어떤 때는 생고무를 사용했다.
생활 환경이 이렇다 보니 저절로 외부 세계와 단절이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도암 자연 속에서만 지냈다. 학교에 다니는 것과 산과 들과 내에서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때때로 농사 일에 끼어 들었다. 논두럭에 콩을 심고 모내기를 도왔다. 고구마를 캘 때는 쟁기가 지나가면 고구마를 주어 담으면 된다. 방학 동안 시간이 좀 있으면 마당에 화단도 꾸몄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동안은 병아리 부화기를 만들어 닭과 오리를 부화시켜 길렀다. 애들에게 개구리를 잡아오라면 수십 마리씩 잡아 왔다. 이것을 삶아주면 닭들이 사죽을 못썼다. 냄새가 고소해서 나도 입맛이 다셔졌다. 이렇듯 사춘기에 나쁜 생활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자연히 나는 모두들에게 모범생이 되고 말았다.
l 큰 댁
큰 댁은 기와집으로 집도 크고 뜰도 산자락까지 포함하면 넓었다. 집 앞뒤 좌우 사방에 여러 가지 감나무가 있어 우리들이 자랄 때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6~7월에 태풍이 오면 땡감이 떨어지고 그것을 된장물에 우려 먹었다. 지금은 크고 맛있는 단감도 많아 잘 먹지 않지만 그 때는 된장에 우린 땡감도 맛있었다. 할아버지 함자는 윤정식인데 건넌방 마루에 오뚝이처럼 나오신 배를 불리며 긴 담뱃대를 물고 앉아 계신 것이 내 머릿속에 남겨진 인상이다. 큰 할아버지 댁은 나중에 인현이가 살고 있었는데 뜰은 아름다웠지만 큰 댁 아래쪽으로 초가집이었다. 두분 모두 농사일을 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셨고 큰 할아버지는 가난했다고 한다.
큰 아버지는 서울 배제 중학교를 다니시고 아버지께서는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기 전까지 광주 농업 학교에 다니셨으므로 시골에서 일찍부터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에 힘을 기울이신 모양이다. 고모님들도 부잣집으로 시집들을 가셨다고 하니 농사를 지어 가계를 일구어 가신 듯싶다. 할머니는 아버지께서 대구에서 옥살이를 하실 때 돌아가셨다고 하니 만나 뵌 적이 없다. 아버지는 고모님들로부터 아주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성전 고모님 댁에 가면 도착하자마자 등물을 시켜 들이고 닭을 잡아 칙사 대접을 하셨다. 고모가 고숙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셨으므로 자식들 보다 동생을 더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다.
큰 아버지께서는 딸 셋에 아들 둘을 두셨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두 분이 자식 욕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형님들은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밑에 두 누님은 전남욱고녀 (전남여고 전신)를 다니었다고 한다. 큰 형님은 키와 손발이 크고 미남이셨다. 농구선수셨다니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던 듯싶다.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에 출마하셨다가 큰 집 재산을 많이 축내셨다. 작은 형님은 해방 후 통역 학교가 해안경비대로 바꾸어 지는 바람에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안경비대 출신 해군 장교였다.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감옥에 있다가 출옥 되려는 때에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터져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영어도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는데 큰 집에서는 여러 해 동안 아쉬워하셨다. 내가 둘째 형님을 닮았다고 나만 보시면 형님을 그리워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두 형수님을 무척 따랐었다. 도시에서 시집 오신 새댁들이었으므로 내 눈에는 무척 아름다우셨다. 그래서 항상 곤아짐 (고운 아주머니) 이라고 불렀다. 큰댁에는 아들들보다 딸들이 더 잘 풀린 것 같다. 큰 누님은 남편이 여러 해 동안 경찰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광주 경찰서장 전남도 경무 국장을 지내셨으니 여유 있게 사셨다. 둘째 누님도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집안이다. 셋째 누님은 의사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중 의사가 7명이나 된다고 하니 의사 집안이다.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 있게 사셨지만 남에게 너무 인색하다고 주위에서 흉을 본다. 그래도 그 인색한 사람이 나는 좋게 평가하셨던지 1984년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할 때 2000만원을 빌려 주셨다. 오늘에 내가 사업체를 갖게 된 것도 그 매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