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상상하는 인간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 상상력은 무엇일까?
상상력을 재생적 상상력과 생산적 상상력으로 나눈다.
- 가능한 것으로서의 문학적 상상력 -
상상이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을 마음속으로 그려 내는 일이다. 인간이 상상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항상 무언가를 새롭게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인간은 현재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없는 것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창조는 인간적 삶의 중요한 본질이 되는데, 상상력은 이와 같은 창조를 이끄는 중요한 정신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증진하는 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문학은 있는 그대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 있을 법한 것을 다룸으로써 무궁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창작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독자들의 수용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삶의 가치를 창조하고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창조적 바탕에 상상력이 표현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을 모방한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상상력은 억압에서 해방으로의 역사를 거쳐 왔다. 문학은 현실을 다르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문학이론의 원조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문학이란 가능한 것을 모방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문학적 상상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의 양태는 시대에 따라서 작가에 따라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의 역사는 곧 상상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럽 문학사에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의 양태를 바꾼 몇 개의 분수령이 있었다. 문학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상상적인 글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아주 오랫동안 어떤 특정한 규칙에 의해 창작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문학은 기승전결, 특정한 어투,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시간 · 장소 · 사건의 통일 등 여러 가지 틀에 박힌 규칙에 따라 쓰여졌다.
그런 전통이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낭만주의에 이르러서였다. 그제야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해 문학이 창작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문학적 상상력의 해방이 있기 전 이를 가능하게 한 전조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분수령이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논쟁이었다. 18세기 중엽 독일에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 고트셰트와 보드머, 브라이팅거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고트셰트는 당시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던 이론가로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문학 이론을 집대성한 학자였으며,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던 문학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단순히 독일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창작의 개념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던 논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트셰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 입각한 문학론을 계승하는 전형적 이론가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Mimesis) 이론에 입각하여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대원칙을 그대로 따른다. 자연모방론은 엄밀히 말해서 자연을 대상으로서 모방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연에 따라서 모방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고트셰트가 살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은 신이 창조한 자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아름답고 완전하고 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신적인 것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질서와 조화 절도가 이미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자연은 이성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예술이 이 완벽한 자연을 모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했다.
시인이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때의 상상력이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머릿속에 받아들인 개념을 다시 불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상상력은 결코 자연을 초월하여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아직 이성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력은 어떻게 이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까?
고트셰트는 문학이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것'을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거짓된 것'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성이 절대적 규준으로 작용하고 있던 계몽주의 시대에 고트셰트는 거짓된 상상을 '개연성'이라는 개념으로 한계를 지웠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상상적 사건이 어떻게 개연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고트셰트는 당대의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프 철학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가장 좋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유일무이한 세계는 아니며 이 세계 외에 다른 '가능한 세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볼프 철학의 전제였다. 즉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세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능한 세계들에서는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들이 지배하고 있을 수 있다. 컴퓨터가 만들어낸 사이버 공간이 볼프가 말하는 또 다른 세계 중의 하나가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모든 것이 가능한 디지털 세계야말로 현실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볼프가 제시했던 가능한 세계를 오늘날 첨단 테크놀로지가 인터넷으로 구현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트셰트는 문학적 상상력을 바로 이 '가능한 세계'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가능한 세계들을 묘사하는 것이 시인이며 시인을 '가능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곧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동물들이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세상에 대해서 상상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한 세상은 비록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볼프가 전제한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적인 일이다. 고트셰트에게 있어 문학적 상상력은 단지 가설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다. 그것은 상상력이 개연성의 법칙에 묶여 아직은 이 현실의 경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가설적으로 설정된 세계 안에서만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다. 신들과 정령들에 관한 상상력은 분명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연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종교들에서 신의 힘을 인정해왔고 모든 민족들이 신의 힘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신적인 것은 그것 자체로는 상상적인 것이지만 가능한 세계를 전제로 할 때에는 개연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 이론의 틀 안에서 창조적 상상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고트셰트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단지 재생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무의식적인 연상 작용 행위' 정도로 파악되었을 뿐이다. '가능한 것'이라는 철학적인 개념이 문학적 상상력을 정당화시키고는 있으나 상상력이 결코 개연성과 인과율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고트셰트는 궁극적으로 이성과 자연과 같은 합리주의적 개념들에 너무 얽매임으로써 시적 상상력의 완전한 해방을 제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낯설게 하기로서의 문학적 상상력
반면에 스위스의 문학이론가였던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는 상상력에 관해서 고트셰트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그들 역시 자연모방론과 개연성의 시학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상상력에 대해서 더 관용적인 입장을 취한다. 브라이팅거 역시 '가능한 것'의 모방을 통해서 시인은 창조자가 된다고 했다. 그는 "창작이란 환상 속에서 스스로 새로운 개념들과 생각들을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새로운 개념들과 생각들의 원본은 실제 현실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가능한 세계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된 하나의 시는 바로 다른 가능한 세계로부터 끌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시인에게만 오로지 창조자라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사물에 눈에 보이는 윤곽을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사물들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이게 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창조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묘사하는 힘으로 정의되고 있다. 가능한 세계를 묘사하되 가능한 것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나타낼 때 시인은 비로소 창조자가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그릇 ＜수필 문학적 상상력＞ 송복련
싱크대 맨 아래 문을 여니 잠자던 그릇들이 부스스 깨어나 조그맣게 말을 건넨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를 대하듯 잠시 서먹한 분위기와 함께 아득해 진다. 어느 날 내게로 와 한때
주빈의 자리를 차지하다가, 어느 덧 눈길에서 멀어진 것들이 웅크리고 있다. 살림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여실하다.
낯익은 얼굴들을 더듬어 가노라니 내 곁에 들어온 날의 기억들이 쏟아진다. 선생님이 주신 통찻잔, 친구에게 받은 커피잔, 전시장을 돌다가 홀려서 산 화채그릇, 집들이 때 시누이가 들고 온 코렐 그릇,'흙 굽는 마을'에서 구완, 친구의 남편이 퇴임 기념으로 만들었던 작은 대접 등이다. 살면서 돈을 주고 산 것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지 모르겠다.
시집 올 때 해 온 그릇들이 깨지거나 이가 빠질 무렵 살림하는 재미가 나서 샀던 백자기 홈세트와 스테인리스스틸 냄비들도 윤기를 잃어 내 모습을 닮아간다.
맨 아랫단 구석에서 촌스런 사기 밥그릇이 보인다. 둥그런 아구리에서 밋밋하게
내려오다가 굽도 없이 마무리를 한 사발이다. 연둣빛 바탕에 초록으로 테를 두르고 청색 국화꽃 세 송이가 잎사귀 위에 연잎처럼 떴다. 안쪽은 희고 두툼하여 허리가 두루뭉실한 아낙네 같다.
밥을 담으면 어른 세 사람이 먹을 정도로 크다. 밥을 고봉으로 퍼담아 배불리 먹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기던 시절의 그릇이다. 배는 고팠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때다. 안팎으로 긁힌 자국에는 때가 끼고 어머니와 같이 나이를 먹었다.
어머님이 아버지를 위해 그릇 집 앞에서 꿈꾸었을 아름다운 밥상이 떠오른다. 소담스럽게 밥을 담아 뚜껑을 덥어 두었다가 퇴근하신 아버지와 밥상을 마주했을 때의 따스함이 전해온다. 투실 하지만 한때는 맵시도 났으리라. 예술가가 만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담았을 그릇이니 엄첨 큰 그릇이며 값을 매길 수는 없다.
그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다가 실수로 단명하거나, 화풀이로 억울하게 나가떨어진 그릇들도 있으리라. 취미로 사 모았던 그릇들에는 그때의 감동들이 숨어 있어 깊이를 더해간다. 밥을 먹는 햇수가 헛되지 않았는지 이제는 쉽게 사려고 덤비지 않는다. 오리려 종지가 되었다가 대접이 되었다 하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마음 그릇이 커야 덜 부대낀다. 마음이 비좁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담지 못할 때는 작은 그릇은 터지려고 한다. 언제나 넉넉하게 담으려고 갈망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평범한 것보다는 색다른 것을 찾으며 분별심으로 가려 가며 담으려고 했다.
그릇은 비워있을 때보다 채워졌을 때 그 그릇에 이름이 붙여지고 손길도 자주 간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요,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다. 담는 데 따라 이름이 매겨지는데, 담지 못해 텅 비어 있으면 이름을 얻지 못하고 빈 둥지처럼 허전하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아버지 앞에 올려졌을 때 가장으로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고, 부양하는 보람도 느꼈으리라.
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서 갈치 가시를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면 맛있게 받아먹던 내 아이들이 기분 좋게 씹던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다. 아침에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하면 점신 저녁은 대부분 각자 어디선가 해결하니 부엌이 날로 썰렁해진다.
나도 어머니의 밥 그릇처럼 맨 앞줄에서 밀려나 구석진 곳에서 낡아가는 것일까. 새 그릇으로 바꾸어 신혼살림처럼 생기가 도는 부엌으로 만들어 볼까 하다가도 망설이게 된다.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나와 같지 살았던 아이들이 있어서 버리지 못한다.
비록 오래 되고 간장종지처럼 속이 비좁지만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볼품없이 작기는 해도
상의 가운데에 자리해서 식성에 따라 알맞게 간을 맞추어 음식의 맛을 내지 않았던가.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간장을 커다란 대접에 담아 내 놓으면 웃음거리가 도리라. 음식의 종류나 성질에 따라 그릇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이고, 모양도 달리 하듯이.
위치가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에 있다고 소홀이 대할 일이 아니다. 시원한 물김치도 담아내고 된장뚝배기를 얹어 식욕을 돋우고, 모처럼 생선접시도 올라와서 식탁에 어울리지 않던가. 그릇에 갖가지 음식을 담아서 누군가를 위해 올릴 때 가장 행복하다.
식구들을 위하여 행복했던 시간을 어머니의 그릇에서 읽으며 싱크대 문을 닫는다.
* 소재의 형상적 발견 *
-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은 여러 가지다. 기본적인 상당의 교육도 밑받침이 있어야 하고 문학이라는 전문적인 일을 위한 훈련도 받아야 하고 특히 문학 훈련에는 문장법, 상상력, 구성문제 등 수없이 많은 조건이 있다. 그리고 무엇을 형상화 할 것인지,
소재로부터 창작하고자 하는 형상을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주제를 어찌 형상화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무리 높은 교육을 받고 문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소재를 형상적으로 인식할 줄 모른다면 창작 작가가 될 수 없다.
이작품의 소재는 어머니의 사발 그릇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잠자던 그릇들이 잠에서 깨어나 속삭이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속적인 인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속적인 인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상상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본지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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