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53회)
옴천면 영복마을
신감순할머니(86세)
“가스나들을 막 잡아간다고 한때여 그때가.”
친정에서는 딸을 위안부로 보내지 않기 위해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16살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던 나이, 그나마 신할머니는 키꼴이 있어서 앳된 모습은 벗었지만,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돼아지도 껍닥을 뱃겨서 소금에 간해갖고 다 가져가고 그런 시대여.”
옴천면에서 태어나 가까운 이웃 마을로 시집온 신할머니는 가난했던 일제시대의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 시대였기에 시집간다고 좋아할 마음도 없고 싫어할 마음도 없었으며, 그저 부모가 정해준대로 와서 살았을 뿐이란다. 9살 위였던 남편 또한 가난에서 허덕이며 살 수밖에 없는 시대에서 맘대로 할 일조차도 없었다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19살에 딸을 낳았는디, 남편한티 이놈 한번 보둠아 보쇼 허들 못해, 그것이 숭여.”
시집은 가난했다. 방 한 칸에서 식구모두가 생활해야 할 정도로 없는 살림살이어서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조차 없었다. 저녁이면 시아버지는 큰집에 가서 잠을 잤으며, 남편은 사랑채에서, 신할머니는 시어머니와 시아제와 한방에서 잤다.
남편하고 온 밤을 자본적이 없다는 신할머니는 먹고 살기도 바빠서 산 것도 만 것도 없이 지나온 세월이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신다. 그래도 6남매나 나았으니 알콩달콩 재밌는 때도 있지 않았느냐고 기자가 살짝 물어보았다.
“애기 날라먼 언제 잔지도 모르게 자 불고 사랑채로 가불어. 남편하고 한 번도 온밤을 잔적이 없어롸알,”
그때 옆에 있던 동네 할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나 같으먼 영감도 못 본디, 다른 데로 시집가부렀어.”
방안에 있던 동네 할머니들이 모두 폭소를 터트리자 신할머니가 또 한마디 덧붙이신다.
“도란도란 그런 시상 없었어. 아침까지 자보들 못 허고, 그랑게 어매 없을 때 어찌게 허고는 가부러.”
가난은 부부간의 정을 가질만한 여유도 주지 않을 만큼 고통이었을까. 남의 논에 보리를 갈았던 어느 해, 신할머니로 하여금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다. 논에 갈았던 보리를 베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모를 심겠다고 논에 물을 넣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보리를 베로 가자고 했지만 신할머니는 너무나도 서글픈 마음에 따라 나서지 않았다.
“밥을 안묵으먼 그 보리 베로 안 갈롸알, 시상에 그 논에다 쟁기질을 혀롸알. 보리도 베어내도 않은 논에 쟁기질을 헌다요. 시상에 혀도 너무허요.”
그 뒤부터 돈을 사야한다는 생각밖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먹는 것조차 아껴 한푼 두푼 모았다. 아이들이 배고파 칭얼대도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밖에는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식들 밥 째까씩 주먼 칭얼대어도 논 살랑게 어쩔 수 없었지롸알.”
남편과 하루 종일 가마니를 짜면 하루 7장 정도였다. 밤을 새고 짜면 하루 10장도 짰다. 손끝에서 피가 찡찡하니 나와도 돈을 만들어 논을 살 생각뿐 짤랑짤랑 가마니치는 소리는 오히려 신나게 만들 정도였다. 가마니는 근대가 제대로 나와야만 빨리 팔리고 제 값을 받기에 정성을 들여야만 했다.
“가마니치고 누에키고, 질쌈질치고, 넘 일허고 다 그러고 살었재. 넙덕지가 다 달아져불고 손바닥이 솔나무 껍질같이 돼재. 그래도 젊은 맛이라 덜래덜래 살었어. 보통 설렁설렁 살어부러.”
보통일은 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는 신할머니다. 살림이 늘어나는 재미를 알게 되니 웬만한 힘든 일도 거뜬히 헤쳐 나가게 되었으며, 논을 늘리는 재미는 그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땅 한 평 없던 살림에서 자기 논을 갖게 되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으랴.
“논 세 칸에 한 칸만 내 것이면 빚을 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었재.”
빚을 3년 내에 갚으면 반드시 논을 사는 일로 논을 늘렸다. 뿐만 아니라 18년간 풍으로 누운 시어머니의 수발을 했으며, 3년간 누워 지내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수발도 했다.
“이녁부몬게 숭 없어롸알. 부몬디 당연하게 생각허고 살재. 구식에는 다 어쩔 수 없재. 지금은 어디로 보내불기도 허더만.”
가난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일념으로 살림을 일으켰던 여장부의 모습이 지금도 신할머니에게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치가 바르고 밝은 지혜로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헤치며 살아온 신할머니다.
“지금도 서너방구는 내가 갖고 있재. 뼈빠지게 해가고 내 맘대로 못허먼 되겄소.”
신할머니는 막내아들 내외(황성채56, 김금희54)가 잘하니까 함께 살고 있다며 밝게 웃으면서 두 손바닥을 펼쳐보여 준다. 평생 일속에서 살아온 손 같지 않은 고운 손이다.
“그리 고생을 했어도 원래 손바닥이 이리 깨끗허니 좋아요. 근디 우리 자식들도 손이 그렇게 좋읍디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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