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 꽃으로 피어난 흔적과 세상사는 이야기.
40여년의 공직생활에서 묻어나는 마음의 소리.
<작가의 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시냇물은 강을 지나야 바다를 이룰 수 있습니다. 꽃처럼 강물처럼 흘러온 세월, 누구나 그렇듯 돌아보면 아쉽기 마련입니다.
모두들 누군가에게 꽃이 되고 싶어 합니다. 지난 온 삶의 언저리에는 추억으로 변한 소박한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 있습니다. 벗어나고 싶었던 그 자리가 꽃자리였고 사랑이 묻어 있음을 뒤늦게 느낍니다.
대학 졸업 후 ‘너도 면 서기나 한번 해봐라’ 하시던 아버지 말씀에 이끌려 시작한 공직생활, 남들보다 많은 곡절도 겪었습니다. 경북에서 시작해 장흥과 강진군을 두 번씩 오가며 농업에서 임업, 다시 행정으로 직렬변경. 그 과정에 한 계급씩 낮춘 두 번의 강임을 하면서도 일곱 번이나 승진하는 호사를 누렸으니 이보다 축복받은 삶은 없을 것입니다.
1983년 16만6천원의 녹봉으로 시작한 머슴살이. 박봉 속에서도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준 사랑하는 아내. 착하고 심성 곱게 자라 준 아들과 딸.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믿고 따라 준 형제들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과없이 공직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상사와 동료들도 잊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가면서 삶의 흔적을 책으로 남기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다행입니다. 많이 알아야 친절할 수 있고, 이왕 하는 일이면 성과를 내자는 뜻으로 ‘공무원, 알아야 친절해진다’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라’는 글을 쓴 적은 있지만 책다운 책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삶은 강물처럼 고요히 흘러 언젠가는 잊혀지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겠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잊혀지는 그 날까지 문득 문득 떠올려지며 작은 웃음이라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
너도 면 서기나 한번 해보라<전문>
70년대 후반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마을 이장을 하고 계셨다. 고향 마을은 60여 가구 100여명에 불과하지만 이농현상이 있기 전 125가구에 750여명이 거주하던 시골치고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강진에 인문고가 있지만 당시에는 강진에 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밖에 없어 인문고에 진학하기 위해 인근 군인 장흥고에 진학했다. 1-2학년 때는 1시간 정도 소요되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통학했지만 3학년이 되면서 지금은 대도시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 누나 집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당시는 토요일 1시까지 근무하던 때다. 3학년 때 매주 토요일 오후 집에 오는데 주로 걸어 다녔다. 월요일에 장흥으로 다시 갈 때는 일주일간 생활하면서 입을 옷가지를 챙겨 가야하기에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지만 토요일 시골에 올 때는 20분이면 오는 버스를 타지 않고 두 시간여를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그 차비로 친구들과 장흥과 강진의 군계의 사인정에서 붕어빵과 국화빵을 사먹고 오는 재미로 말이다. 친구들과 빵을 사먹고 해찰부리다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대개 서너 시 쯤 되었다.
당시 시골집은 위 아래채가 분리된 큰 집이었다. 원래 큰어머니 댁이었는데 직장생활 하던 큰집 형이 도시로 발령이 나면서 큰어머니를 모시고 가게 되어 내놓은 집을 마을사람들이 헐값에 사려하자 조상대대로 살던 집을 그럴 수 없다며 빚내어 들어갔던 집이다. 마당이 꽤 넓어 동네 아이들이 공차고 놀기도 했던 곳이다. 소 마구간과 연결된 사랑방은 낮이면 면사무소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기도 했는데, 밤에는 동생친구들이 모여 놀기도 하고 시험을 앞둔 때에는 내 친구들과 공부방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당시 면 직원들이 일찍 출장업무를 마치고 우리 집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화투를 치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일들이 많았다. 이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토요일에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당시 면 직원들의 일과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새마을 모자를 쓰고 마을에 출장을 가는 것이 주된 일과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행정이 전산화되지 않아 이장이 파악하고 작성해 준 자료에 의존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면 직원 도장이 여러 개 있었다. 마을담당 직원이 이장에게 맡겨둔 도장들이다. 공무원이 조사해야 할 사항을 이장에게 맡기고 날인만 해간 증명이기도 했다. 마을에 출장은 가지만 이장이 작성한 지료를 받아오는 게 일이었으니 남은 시간은 방면별로 모여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사랑방은 늘 면 서기들의 휴식처였고 그들이 먹고 간 막걸리 주전자가 뒹굴고 시중들던 아버지가 취해 계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70년대 초에는 마을가게가 없고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집에서 보름간씩 새마을구판장을 운영했다. 1말짜리 플라스틱 막걸리 통에 2병 분량의 물을 부어 판 수익금을 모아 부녀회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어떤 집에서는 물을 많이 부어 누구네 집 막걸리는 싱겁다는 얘기도 나오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들에 일하러 오지 않고 면 직원들 시중이나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신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밖에서 일하다 말고 들어와 밥 차려 줘야하는 고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식구끼리야 맹물에 밥 말아 먹어도 되지만 소위 관청 입을 함부로 대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일주일 만에 집에 오는 토요일 저녁이면 ‘얘들 먹이려고 키운 닭을 면 서기에게 잡아 주고, 공부하다 온 아들한테 술심부름이나 시키면 되겠느냐’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다툼 할 때가 많았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도착한 나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킨데 대한 불만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토요일 날도 늘 그랬던 것처럼 오후 쯤 집에 도착하니 아버님이 술에 취해 계셨고 사랑방을 열어보니 술 냄새가 풍겼다. 면 직원들이 또 사랑방에서 놀다갔다는 걸 직감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더니 대뜸 “너도 면 서기나 한번 해보라”라고 하셨다.
취중에 하신 아버지의 한 마디는 나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들이야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리장집 사랑방에 죽치고 잇지만 그 시중을 들어야 하는 아버지는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들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들에게 너도 면 서기라도 하면서 저런 대접 좀 받고 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대학졸업 후 검찰사무직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실패하고 머리도 식힐 겸 포항 누나 집에 있다가 그곳에서 농림직 시험공고를 보고 대학에서 농촌지도를 전공한 인연으로 응시해 결국 면 서기가 되었다.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드린 것이다. 동생들도 내 뒤를 따라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4형제가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근무분야는 다르지만 아들 넷이 아버님 소원을 풀어드린 것이다.
명절 때 형제들이 모이면 동생들에게 늘 얘기한다. ‘공직생활하면서 민폐 끼치지 마라. 이는 아버님의 유언과 같다’고. ‘너도 면 서기나 한번 해봐라’던 아버님의 말씀 이면에 숨은 뜻을 오늘날의 공직자들이 새겨들었으면 한다.
<저자소개>
1959년 강진의 농촌마을에서 5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진중·장흥고와 순천대를 나와 강진군청 기획홍보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83년 경북에서 9급 공채로 공직에 입문, 85년 장흥군에 전입, 92년부터 고향 강진에서 근무하였으며 98년부터 강진군청에 재전입하여 근무하고 있다.
비서실장, 군동면장, 강진읍장, 미래산업과장, 지역개발과장, 총무과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군민장학재단 설립. 프랑스 유네스코본부 <강진전> 개최. 전남공무원교육원 강진유치 등 굵직한 현안을 해결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 모범공무원 표창, 장관·도지사 표창 등 30여 차례 수상했다.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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