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2019 제 47회 강진청자축제 국제학술심포지움
HOME 회사소개 이용약관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기자회원신청
로그인 회원가입
기본스킨 오렌지스킨 보라스킨 연두스킨 그레이스킨
2019년 12월 07일 토요일
뉴스홈 > 문화/예술
2019-10-09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2019 제 47회 강진청자축제 국제학술심포지움
< 중세 韓·中·日 陶瓷 窯場의 구조와 생산체제 >

-·宋代 越窯 窯場의 구조와 생산체제 ( 黃松松, 中國 慈溪市博物館)-

越窯東漢 말기에 시작되어 당·송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상림호는 당시 월요의 모든 가마 중에서도 핵심으로, 생산품의 특징 외에 요장의 분포, 생산 문제, 생산체제 등 요업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띤다. ·송시기는 월요 발전사에 있어 번성한 시기로 특히 당 말에서 북송 초까지 가장 발전하였다. 당대 중국 자기 제작업은 소위 남청북백(南靑北白)’의 구도로 월요는 남청의 대표였다. 상림호는 당·송시기 월요의 핵심 생산지역이며, 上虞의 조아강 중류 지구와 鄞洲 동전호 역시 중요한 월요 생산 구역이다. 통계에 의하면, ·송시기 월요 유적은 모두 294곳으로 집계됐는데. 이 중 慈溪 경내는 172곳으로 58.5%를 차지하고 있다. 월요가 위치한 紹興, 寧波 주변의 절강성 동쪽 지역은 자연지리와 인문환경에서 유사성이 확인되므로 본문에서는 당·송시기 상림호와 그 주변 월요 유적을 연구대상에 포함하고자 하며, 요장의 분포와 구조 및 생산과 판매체제를 대략 간략하게 정리하여 논술하고자 한다.

. 상림호(上林湖) 월요(越窯) 窯場의 분포

상림호 월요 유적은 주로 상림호, 고은정호, 백양호, 이두호 등 호수와 가까운 저산 구릉지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그 밖에 주변의 상오호, 촉계호, 매호 등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 상림호 가마터 구역은 삼북(三北)의 군집된 산 최고봉에 해당하는 고로산 북쪽 기슭이며, 상림호에서 20km 떨어진 호수의 남반부인 특히 목작만, 오석령, 황당산, 황선산, 하화심, 피도산, 심가산, 구두경, 후사오, 우각산, 오가계, 황피오에 밀집되어 있다. 고은정호의 가마터 구역은 상림호 남서쪽 2.5km 지점으로 일찍이 폐요하여 현재는 양전이 되었다. 요지는 주로 석당산, 목양산, 와편탄, 야묘동, 왕가평, 대평리, 치계산, 개도산, 소고령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석마농, 대면산, 완편산, 소농구 등에소 가마터 12곳을 발견하였다. 이두호 가마터 구역은 이두호 서쪽 기슭 중부에 위치하며, 주로 완요산, 율자산, 댜황산 등 호수를 따라 완만한 산비탈에 밀집되었으며 모두 15곳이 확인되었다. 오늘날 유적의 분포는 옛 요장의 입지와 귀결된다. 요장의 입지는 주로 도자기 제조에 필요한 지질조건, 수륙수송과 연료자원 등 제반요소에 달여 있으며, 그 중에서도 자기 제작 원료에 대한 수요는 매우 중요하였다.

자원(資源)

연료(燃料)

지형(地形)

수계(水系)와 교통(交通)

. 상림호(上林湖) 월요(越窯) 窯場의 배치

일반적으로 요장의 배치는 지형, 통풍, 채광 등 자연적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되며, 형이상학의 풍수학 이론도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능에 따라 요장은 주로 원료 제조 및 보관 구역, 성형 및 건조 구역, 번조 구역, 완제품 저장 구역 및 기타 부속 구역 등 다섯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 상림호(上林湖) 월요(越窯) 窯場의 생산과정

요장은 일반적으로 원료의 제조와 성형 제작, 번조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명대 송옹성은 [천공개물]에서 자기 제작 공정에 대하여 한 개의 잔에 드는 공력을 계산하면 일흔 두 번의 손길이 지나야 비로소 그릇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사이의 세세한 순서는 더욱이 아루어 말할 수 없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월요의 제작 공정은 비록 경덕진요와 같이 ‘ 72번의 과정 은 없지만. 일부 장식 기법 외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자기 제작 공정이 상당히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생산주기(生産週期)

자토 및 자석에서 자기에 이르기까지 원료 채취와 가공, 성형 제작과 번조 등 일련의 생산 과정마다 시간이 걸린다. 그 중 자기 원료의 숙성은 몇 달에서 심지어 더 오랜 시간까지 걸린다. 이미 준비된 자토로부터 성형, 장식, 시유, 번조 그리고 마지막 완제품이 가마에서 나오는 데 걸리는 이 모든 시간은 오늘날 도자기 제조 종사자들의 생산 주기를 참고할 수 있으며, 고대 문헌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 번조시기(燒窯時節)

육구몽(陸龜蒙)의 시 [비색월기(秘色越器)] 에 의하면, “ 9월이 되어 가을바람 불고 서리 내리면 월요가 문을 연다 의 구절을 통해 당시 월요의 번조 시기는 가을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 과학적인 근거에 의하면, 가을에는 기압이 높아지고 수분 증발이 빠르며 공기가 건조하여 연소가 더 쉽고 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듬해 가을에 이르면 마른 풀과 마른 가지들이 증가하여 가마를 태우는 데 많은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다. 용천지역은 지금도 번조하는 것에 대해 正九從十 이라는 말이 전하는데, 그 뜻은 매년 음력 9, 10월이 때우기가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이다.

. 상림호(上林湖) 월요(越窯)의 생산 체계

가마터의 생산체계 논하려면, 먼저 요장의 속성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요장의 속성은 그 경영주체와 상품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는데, 만약 관방이 경영하고 상품의 사용이 궁중 황실이나 관청에 한정된다면, 그 요장은 바로 관요라 부를 수 있으며, ·청 시기에는 황실에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가마를 어요(御窯)라고 불렀다. 반면 민간에서 경영한다면, 그 상품의 사용처가 관 혹은 민이라 할지라도 그 속성은 민요이다. 그러나 가끔 궁정이나 관청 소용 자기 소조 임무를 맡은 민요를 공요(貢窯)’라고 부르기도 했다.

貢窯貢瓷

1977년 상림호 오가계(吳家溪)에서 당 광계(光啓) 3(887)명의 관()형 묘지 한 점이 출토되었다.

이는 오늘날 언급되는 貢窯의 유일한 실증으로 당대 말기 상림호 요장에 貢窯貢瓷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당대의 월요 貢瓷는 토공(土貢) 제도와 관련이 있다. 토공은 각 주부(州府)가 시장에서 지방 특산물을 구입하여 조정에 진상하는 것으로, 공물의 가치가 명주 50필을 넘을 경우 조정에 상납해야 할 조세로 충당할 수 있었다. 당대 중기, 월요 자기는 이미 주부(州府)의 토공 물품에 포함되었는데, 이 공자(貢瓷)들은 주부가 조정의 관련 품질 기준에 따라 시장에서 사들이거나 월요 요장에서 매수하여 구득한 것이었다.

오대에 이르러 고품질의 월요 청자는 오월국(吳越國)에서 중원 왕조에 진상한 토공(土貢)의 하나가 되었다.

2. ‘官坊官窯

상림호 월요 요장의 관방(官坊)은 남송관요와 명·청 시기 경덕진(景德鎭)의 어요(御窯)와 구별된다. 어요는 황실과 관청을 위해 진상되었지만, 남송관요는 비록 조정이 경영주체이긴 했으나 공자(貢瓷)나 관청용 자기 외에 일반 상품용 자기도 생산했기에 오늘날의 국영 기업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관요(官窯)라 칭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관요의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가 필요하다. 즉 소비자가 요장의 성격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3. ‘置官監窯省瓷窯務

요업 생산에 관청이 직접 관여하는 형식 이외에 또 다른 중요한 산업은 요업을 감독, 관리하는 것으로 이는 일찍이 주대(周代)부터 행해졌다. ·송시기의 월요 요장은 현재의 자계, 상우, 은주, 여주, 영해, 봉화, 상산, 진해, 소흥, 주지, 신창, 승주 등의 여러 지역에 빽빽이 들어 서 있다. 특히 자계시 상림호을 중심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생산량도 많았는데, 이 사실은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치르본(Cirebon) 침몰선이 뒷받침한다.

월요는 이처럼 방대한 규모로 운영되었고, 생산품 역시 지배층의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이며, 요업에 부기되는 공물 또한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요업에 대한 관리 강화가 불가피했다.

치관감요(置官監窯)에 관한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으나, 늦어도 오대에는 이미 요업을 전업으로 관리하는 기관인 성자요무(省瓷窯務)가 설치되었다.

성자요무의 직책은 공자(貢瓷)를 징수하고 요업생산을 감독하는 것 외에 세를 거두는 것도 업무 중 하나였다. 이 점은 동시기의 다른 가마에서도 나타난다.

·송 시기에는 월요 청자 생산량이 막대하여, 국내외 시장에서 모두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오대의 성자요무에 이어 北宋시기에는 월주에 자요무(瓷窯務)’를 설치해 고액의 과세를 받았다. ‘자요무는 요장 소재지에 요서(窯所)를 설치하여 요업생산을 보다 잘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가마터의 생산 경영 모델

당대 말기에는 월요의 생산 조직 구조가 변화하여, 원래 기물을 성형하고 소조하였던 일체화의 생산 조직 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분업이 더욱 세분화되었다. 이에 점차 전문적으로 자기를 성형하는 작업장과 번조를 담당하는 작업장이 생겨나고 이를 각각 배호(坯戶)와 요호(窯戶)의 명칭으로 구분하였다.

자토 채취와 가공, 자기를 성형 후 번조하고 나아가 자기를 파는 운송에 이르기까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고리가 서로 맞물리는 산업 사슬을 형성하였다. 산업 사슬의 형성은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각각의 고리를 더욱 전문적이고 세밀하게 함으로써 월요의 높은 기술과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 결론

월요는 東漢 말 처음 자기를 구워낸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은 물론 세계 도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가마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한반도 고려청자의 흥기와 발전도 월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시기는 월요 발전의 절정기였고, 상림호는 당시 월요의 핵심 산지로서 기술적 수단과 예술적 표현 양식 외에 요장의 분포와 생산 체계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더욱 깊은 연구 가치가 있다.

高麗靑瓷 窯場構造特徵 (권혁주, 민족문화유산연구원) -

. 머리말

우리나라 가마터 발굴조사는 가마와 출토유물 뿐만 아니라 이를 제작했던 작업시설과 건물지, 장인들의 주거 공간 등 요업 시설을 함께 조사하여 최대한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窯場陶瓷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生産(공방과 가마, 폐기장 등)住居(생활), 資源(원료) 등의 공간이 갖추어진 곳이다. 따라서 요장은 기본적으로 원료를 채취하는 採土場과 수비·건조·성형·시문·시유 등을 실시하는 工房’, 번조를 담당하는 가마()’, 실패한 도자와 가마 찌꺼기 등을 버리는 廢棄場을 비롯한 여러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高麗靑瓷는 고려왕조(918~1392)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제작되었고 이를 생산한 요장 또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 초기에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요장이 분포하여 초기청자 생산을 주도한 반면, 12세기 이후에는 남서부 지방의 강진과 부안이 청자생산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청자 요장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지금까지 57개소 요장이 조사되었다.

필자는 2019년 강진 사당리 청자 요장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당리 8호와 40호 요장, 그 반대편 사당리 10호 요장에서 고려시대 기와건물지를 조사하였다. 유구가 형성된 고고학적 층위양상을 고려하였을 때 사당리 요장의 생산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범위와 규모 또한 동시기 국내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이다.

강진 사당리와 같이 가마 주변에서 확인되는 건물지, 공방지 등 각종 시설에 대한 구조와 성격에 대한 해석은 청자 자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청자문화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 발표의 주된 목적은 고려청자 요장의 구조와 생산체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 高麗靑瓷 窯場構造

初期(10~11세기)

배천 원산리

용인 서리

용인 서리 상반

여주 중암리

고창 용계리

진안 도통리

2. 中期(12~13세기)

용인 보정리

여주 안금리

여주 부평리

진천 구암리

음성 생리

부산 녹산동

칠곡 봉계리

부안 유천리 3구역

강진 사당리 23

<!--[if !supportEmptyParas]--> <!--[endif]-->

3. 後期(14세기 이후)

강진 사당리 40

강진 사당리 10

칠곡 학하리

.靑瓷 窯場生産體制

監造 施設設置運營

고려청자는 출현 초기 중국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 중서부 지방의 전축요를 중심으로 청자생산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1세기 이후 점차 그 요장들이 대부분 소멸하면서 남서부 지방의 토축요로 이동하였고 12세기 이후에는 강진과 부안이 양질의 청자생산을 주도하는 가운데 강진 유형을 수용한 요장들이 전국에 걸쳐 분포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청자의 큰 흐름에 있어 가마구조, 생산품의 종류와 특징 등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어느 정도 그 성과가 축적되었다고 여겨진다.

반면 청자요장을 설립하고 운영한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 다. 국가 또는 왕실이 통제했다는 설, 官窯라는 설, 체제로 운영되었다는 설, 豪族 또는 寺刹 등 지역의 토착 세력이 운영한 私窯라는 설, 貢納窯라는 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12세기 이후에는 국가에 貢納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있던 특수한 지방행정단위로 강진 大口所七良所와 같이 와 같은 새로운 생산시스템이 도입되어 요장을 관리·감독하였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필자는 이러한 청자요장의 운영주체를 논함에 있어 장을 통해 정리한 기와 건물지 조사 현황을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시대별 건물지 조사현황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려 초기 전축묘 또는 전축요계 토축요로 알려진 요장은 대부분 기와건물지가 확인되거나 폐기장에서 기와가 공반 출토되고 있다. 반면 고려 중기 이후에는 청자 생산을 주도한 강진과 부안에서만 기와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둘째, 기와건물지 주변 유물의 츨토양상이다. 건물지 기단 외측으로는 많은 양의 기와가 퇴적되어 있으며, 사당리 23B, C 건물지와 같이 기와가 보도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셋째, 기와건물지의 등장 시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청자를 가장 먼저 생산한 곳으로 알려진 시흥 방산동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아 청자 발생 시점부터 있었는지는 말 수 없다. 더불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초기청자 요장 대부분이 폐기장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주변 건물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와건물지의 등장 시점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고려 후기 이후 기와건물지 조사사례는 14세기 운영된 것으로 사당리 10호가 유일하며 고려 말~조선 초로 편년되는 청자 또는 분청사기 요장은 물론이거니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재된 瓷器所, 조선시대의 官窯에서도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 본 고려청자 요장에 조성된 기와건물지의 조사현황과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 기와건물지는 초기 요장과 중기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3구역 요장에서만 조성되었다. 둘째, 건물지는 초기 청자 운영과정에서 신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위상은 고려 조정의 결정이 상당히 신속히 반영될 수 있는 위치이다. 셋째, 건물지 주변으로는 2차 폐기된 자편퇴적층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와건물지를 조성한 주제가 누구이며, 요장의 운영, 생산에 대한 감조에 어느 정도 관여했을까?

2. 工房址 造成方法特徵

고려청자의 제작이 이루어진 공방지는 고려 초기와 고려 중기가 그 구조와 조성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초기청자 공방지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조성방법과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토가 섞인 점토로 성토한 기단토와 갑발을 활용한 벽체의 조성이다.

갑발을 활용한 공간 분할 양상이다.

온돌이 L자 형태로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고려 중기 공방지는 일부 시설만 확인되고 있어 아직까지는 구조와 조성방법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강진 사당리 23호와 부안 유천리 3구역은 공방지가 조사되지 않았다.

. 맺음말

고려청자 요장의 생산체제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기와건물지가 요장 내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현황을 고려하였을 때 이 기와건물지는 고려청자가 출현한 어느 시점에 등장하였고 전축요 또는 전축요계 토축요의 성격을 띠는 초기청자 요장에서는 대부분 확인된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청자 생산을 주도한 강진과 부안에서만 기와건물지가 확인되어 고려 초기와 고려 중기 강진과 부안의 청자 생산체제가 유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청자 요장의 구조와 생산체제, 전개과정을 파악함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강진 사당리 요장이다.

-일본 중세 세토(瀨戶) 窯場 연구 현황)( 타시로 유이치로, 獨協大學 )-

. 머리말

한반도에서 고려청자가 제작될 당시 일본에서는 청자는 제작되지 않았으나 시유도기(施釉陶器)는 제작된 바 있다. 이 시유도기는 바로 아이치현(愛知縣) 세토시(瀨戶市) 주변에서 제작된 고세토(古瀨戶)이다. 중세 일본에서 유일한 시유도기인 고세토는 당시 무역 도자로 수입된 중국, 한국 도자의 조형적 요소를 받아들인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영향관계도 활발히 논의되어 있다. 세토 가마에 보이는 특징적인 공방지 형태인 건조장 유구를 소개하고 , 공방지 유구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 세토 지역의 중세 요업

세토 가마의 범위는 현재 아이치현 세토시를 중심으로 동서 15km, 남북 10km에 걸쳐있다. 여기서 가마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로, 야마자완(山茶碗)을 비롯한 무유도기(無釉陶器)를 생산한 가마이다. 둘째로, 중세 일본에서 유일한 시유도시인 고세토를 생산한 가마이다.

현재 무유도기 가마가 약 200, 고세토 가마가 약 300곳 확인되어 있다.

이 중에서 고세토는 12세기 말부터 15세기 후반에 걸쳐 약 3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는데, 대체로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며 여기소 세분되어 기부터 가까지 나뉘어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전기는 사이호(四耳壺), , 주전자와 같은 항아리, 병류가 중심적으로 생산된다. 문양에 관해서는 인화(印花)와 빗살기법으로 시문한 문양이 일부 제품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 제품의 대부분은 막부(幕府)가 위치한 가마쿠라(鎌倉)애 운반되는 고급 시유도시의 성격을 지닌 것들이었다.

중기는 처음에는 사이호(四耳壺)와 같은 대형 제품이 중심적으로 생산되었지만, 전기와 달리 흑갈색으로 발색하는 철유(鐵釉) 제품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철유는 새로 생산되기 시작하는 덴쿠모(天目) 다완을 비롯해 전기부터 주된 기종으로 생산된 사이호(四耳壺)나 병에도 씌워졌다. 또한 전체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고, 그릇 표면에 장식된 문양도 주걱이나 정을 사용해 문양을 그리는 획화(劃花) 기법이나 형틀로 모양을 만든 점토를 그릇 표면에 붙이는 첩화(貼花) 기법도 등장한다.

항아리, 병이 주요하게 생산되었던 전기 및 중기와 달리, 후기에는 완, 접시, 발을 비롯해 냄비, 절구와 같은 생활 용품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위치에 대해서도 시기마다 분포지역이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세토 가마는 고대 이후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된 지하식(地下式) 가마, 즉 경사면을 파서 가마를 축조한 아나가마(窖窯)였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들어서 고세토 가마의 입지가 충적지로 변화한 이후로 오가마(大窯)라 불리는 지상식 가마가 등장하게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건조장 유구에 관한 논의

요체개조시설(窯體改造施設)

요체개조시설(窯體改造施設)이란, 2~3기의 가마로 구성되는 가마터에서 1기의 번조실 바닥면을 평평하게 깍은 흔적이다. 그 사례로는 아카쓰기() 3·4·5, 고요(伍葉) 가마터, 니시야마지(西山路) 가마터 등에서 확인되었다.

아카쓰키 3·4·5호 가마터 : 미즈노(水野區) 동부

고요(伍葉) 가마터 : 아카쓰구 북서부

니시야마지(西山路) 가마터 : 아카쓰구 남서부

<!--[if !supportEmptyParas]--> <!--[endif]-->

2. 방형탄류유구(方形炭溜遺構)

요체개조시설이 확인되는 것은 고세토 중기에 해당하는 가마들이지만 후기에 해당하는 가마에서는 다른 형태의 건조장 유구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가마를 개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건조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구축된 시설이며, 언덕의 경사면을 깍고 방형(方形)으로 평평한 면을 일부러 조성한 방형탄류유구(方形炭溜遺構)이다. 각 사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구이스() 가마터 : 니나노구 중남부

하자마(巡間) E 가마터 : 아카쓰구 중서부

오로시 니시야마(下石西山) 가마터 : 기후현 도키시

. 맺음말

시유도기(고세토) 가마에서 확인되는 요업개조시설과 방형탄류유구는 공방지라는 개념과도 좀 더 다른 독립된 기능을 가진 시설로 주목된다. 또한 일괄적으로 공방지로 간주하는 유구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지역의 독특한 요업 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 발표는 공방지를 주제로 한 것이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으나, 고세토는 고려청자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서 활발하게 제작된 매병, 13~14세기 전반에 보이는 모란무늬는 당시 고려청자가 중국도자와 함께 가라모노(唐物)로서 일본에 수입된 양상을 대변한다. 이러한 도자들이 수입도자의 대체품으로서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된 고세토의 조형에 자극을 준 셈이다. 일본이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 이후지만, ‘자기’, ‘도기의 개념을 넘어서 고려청자의 비교대상으로 고세토는 앞으로 주목할 만한 존재라 생각된다.  객원기자 임승렬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뉴스스크랩하기
기자이름없음 
문화/예술섹션 목록으로
편지, 다산(茶山)의 마음을...
실학사상의 산실 강진 다산...
제37회 강진청자축제 행사 ...
다산이여 다산이여!
2014 다산시민강좌
다음기사 : 강진의 하늘과 크라운해태가 함께하는 ‘견생조각전’ 개최 (2019-10-09)
이전기사 : 고려청자의 생산 시스템 규명하는 심포지엄 개최 (2019-10-09)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合理的思考(합...
조직폭력배 이제 ...
선거와 프로야구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게시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알립니다 독자투고 기사제보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