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일본 큐슈(九州) 기행 3 <본지 객원기자 임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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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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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큐슈(九州) 기행 3 <본지 객원기자 임승렬>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으로 가는 길

  

 

가라쓰에서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했다. 그러면 이곳저곳 둘러볼 수 있겠다 싶었다.

후쿠야 여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마음씨 좋은 일본청년 요시무라(吉村)에게 자전거 대여점의 위치를 물었는데, 그는 친절하게 자기 차로 그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대여점은 닫혀 있었다. 아직 영업시간이 안 된 것이다. 맘은 급하고 어떻게 할까 고심하고 있는데, 요시무라는 대뜸 자전거로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니 자기 차로 나고야성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도 지나치기만 했지 나고야성은 가보지 않았다 했다.

 

나고야성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크고 작은 고개를 여러 번 넘었다. 이런 길을 자전거로 가려했으니... 내 생각이 무모했음을 느끼면서 기꺼이 동행해준 요시무라가 무척 고마웠다.

한편 400년 전 풍태합(도요토미히데요시)의 집결 명령에 따라, 중무장을 한 채 이 험한 고갯길을 행군했을 일본 전역의 사무라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 표정이 왠지 불안해 보였는지, 요시무라는 내가 무섭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도로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무섭다고 했다. 우리와는 반대편 차도를 달리는 일본차들이 꼭 나에게 달려드는 느낌이드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亡靈은 또 다시 부활하고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1591년 이곳(옛 지명이 히젠이다)에 나고야성을 짓고 조선침략을 준비했다. 또 성 주변에 일본 전역의 영주와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그 당시 전국에서 모인 영주들의 진영(陣營)200군데가 넘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터를 발굴 중이라 한다. 이들 중 서일본의 무사들을 총출동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인 1598년 병사했다. 그의 가신들은 쿄토 방광사(方廣寺) 뒷산에 그의 유골을 묻고는 일체 비밀로 했다. 1599년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후에야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고 풍국대명신(豊國大命神)이란 신의 칭호를 수여했다. 그런 다음 묘소를 중심으로 거대한 풍국신사(토요쿠니진자, 豊國神社)를 건립했다.

그러나 그 후 에도막부(江戶幕府)을 연 쇼군(將軍)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 풍국신사를 파괴하고 풍국대명신의 호칭도 금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의 존재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의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60년 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성공하자, 임진왜란의 주범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토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전국에 일제히 세워졌다. 이들 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옛날 자신의 주군이었던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위상을 복원하였는데, 여기에는 260년 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당한 복수심 이상의 것이 숨어 있었다.

즉 토요쿠니신사의 재건은, 메이지 유신정부가 도쿠가와 막부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성립된 정권이라는 점에서 그 주도세력이 지향하는 방향과 정신적인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히데요시의 부활이자 임진왜란의 재현이다.

 

히데요시의 오동잎 문장(紋章)은 일본 수상의 문장(紋章)이 되고

  일본인의 옷이나 가게의 입구에서 자주 보이는 문장(紋章)은 가문이나 소속을 표시하는 상징물로서 우리 한국인들이 놓치기 쉬운 코드이다. 우리가 이런 상징물에 대한 전통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느낌이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배꽃(梨花)도 근래에 와서 일본 천황가의 문장에 대응하여 만든 것이다.

 

히데요시의 오동잎 문장인 고시치노키리(五七)는 석장의 오동잎에 5·7개의 꽃이 달여 있다. 이 고시치노키리(五七)가 조선총독부의 문장으로 똑 같이 사용되었다. 이로서 메이지유신 세력들의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현재 일본 수상(총리)과 수상관저의 문장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들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후계자인 것이다. 더욱이 현 수상 아베신조의 행태는, 자신이 히데요시의 적통임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1898, 풍신수길 300년제

  1890, 메이지정부의 주역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도로 풍국회(豊國會)결성되었다.

이 풍국회의 회장은 쿠로다나가시게(黑田長成),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앞장섰던 쿠로다나가마사(黑田長政)의 후손이었다. 1898년에는 히데요시를 기념하고 현창하는 풍신300년제(豊神300年祭)가 거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위상이 오늘날과 같이 국민적 영웅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복원하고 성역화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1941년에는 쿄토와 오사카의 풍국신사 앞에서 대규모 전승보고와 축하행진을 하였다. 이렇게 메이지정부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정신을 국가의 이념으로 재창출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제주올레는 일본열도 큐슈로 이어지고

  제주의 곳곳을 걸어서 여행하며 제주의 속살을 발견하는 제주올레처럼, 큐슈올레는 웅대한 자연과 수많은 온천을 가지고 있는 큐슈의 문화와 역사를 오감으로 즐기는 걷는 트레일이다.”

윗글은 <큐슈올레 가라쓰코스(九州オルレ 唐津)> 안내지도 상단에 씌어있는 소개 글이다. 규슈올레의 로고또한 제주올레의 조랑말(간세)를 그대로 사용한다. 큐슈올레 안내지도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병기되어 있다. 의례 그렇듯이 일본의 관광안내 지도는 꼼꼼하기 그지없다. 빈틈이 없어 보인다. <큐슈올레 가라쓰코스>에 오는 방법이며, 출발점부터 종점까지의 11.2km 도보 구간 중의 15개 지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 낯선 한국관광객들도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있다. 실제로 큐슈올레를 걷는 관광객의 70~80%가 한국인 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큐슈올레를 한국인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올레가 큐슈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이제는 예전의 일이 되었다. 아베 정권의 경제보복으로 시작된 작금의 한·일 관계 영향으로 한국인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다. 실제로 나고야성터를 답사하는 필자도 올레코스를 잠깐 걸어보았으나, 한국인은 만나지 못했다. 대신 나와 동행한 일본청년 요시무라(吉村)오르레(올레의 일본식 표현)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서,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런 좁은 길을 가리킨다고 대답했다. 비록 한국인의 발길은 끊겼지만 여전히 일본 여행객들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도 요시무라(吉村)처럼, 비록 올레의 뜻은 잘 몰라도 큐슈올레가 우리나라 제주에서 건너온 것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큐슈올레 가라쓰코스(九州オルレ 唐津)>의 시작점은 나고야성박물관 앞이다.

 

나고야성박물관(名護屋城博物館)은 한·일 역사를 증명하고

  나고야성박물관은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주제로 한 사가현립 박물관이다.

나고야성 이전, 원시·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교류사와 일본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끼친 외래문활를 보여주는 고고·문헌·미술·공예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일 양국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교·전시하여 한·일문화의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패퇴하면서 쌓은 성()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가야문화의 지표 유물인 파형동기(巴形銅 器)는 가야세력의 진출을 확인시켜준다. 인근 마을에서 수습된 고려 상감청자 편()은 아주 흥미롭다. 고려도공이 750년 전에 일본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반증하는 듯하다(일본 작가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특히 임진왜란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시하여 한·일 양국의 관점에서 이 전쟁의 실상을 밝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 약탈해간 금속활자가 눈에 뛴다.

나고야성에서 발굴된 히데요시 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와당(瓦當)과 삼태극(三太極)을 형상화한 와당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 한민족의 삼수사상(三數思想)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히데요시가 백제계란 주장이 괜한 소리가 아닌가 싶다.

나고야성 파괴이후의 일본·조선의 국교회복과 교류를 조선통신사자료를 통해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일의 역사에는 수많은 왜곡이 있으나, 이 박물관은 학문적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 관계자는 한국인들이 근래 발길을 끊은 것에 대해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많이 방문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기에, 모두 아베때문이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더니 그도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과연 아베만의 문제일까? ·일 갈등은 역사의 골이 너무 깊다!

 

  가까이에는 가카라지마(加唐島), 저 멀리에는 쓰시마(對馬島)

  요시무라와 올레길을 걷다가, 나고야성의 혼마루(本丸)를 돌아 천수각 터에 이르렀다. 바닷바람이 제법 세게 분다. 여러 일본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가족여행객도 보이고... 역시나 연인들도 눈에 뛴다. 모두 즐거워 보인다. 우리는 천수각 터 기념비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고 있던 젊은 연인에게 다가가 커플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해서 우리 커플(?)사진도 한 장 찍었다.

과연 그들은 폐허의 나고야성 정상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이 文祿·慶長이라 부르는 임진왜란의 참상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까?

당시 조선의 백성이 겪은 수난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사이 나는 서쪽 현해탄이 바라보이는 곳에 섰다.

바다 풍경 안내판을 보니, 가까이에는 가카라지마(加唐島), 저 멀리에는 쓰시마(對馬島)가 표시되어 있다.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사마왕)이 태어났다는 섬이 코앞에 있는 것이다.

가카라시마 항구에는 <무령왕 탄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다. 멀리 현해탄(일본에서는 玄界灘이라) 끝에는 대마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가깝고도 먼 나라일본, 그 길고 질긴 애증의 세월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현해탄은 알리라. 2천년 한·일 역사의 영화와 질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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