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영랑시문학상 수상 소감>
제7회 영랑시문학상 수상 소감
영랑선생님 전 상서
허형만 (목포대학교 교수)
선생님. 선생님 존함의 시문학상 수상 소식을 지난 크리스마스 전전날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극적인 상황이었는지 모릅니다.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한참 동안 아득하더니, 멍해지더니, 시술이 끝나고 병실로 옮겨와서야 비로소 수상 소식을 맨 처음 전해주신 이가림 시인과 재차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병실 창밖으로 오랜만에 흰눈이 휘날리기 시작하더군요. 창 밖을 한참 바라보다가 지난 해 11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선생님의 금관문화훈장 추서 기념 <김영랑 시인의 시와 사상>학술 세미나에서 좌장을 맡아 진행했던 감격스러운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작품과 삶 전반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기 위해서 선생님의 생가를 얼마나 많이 드나들며 선생님을 찾아뵈었는지 기억나시는지요. 언젠가는 돌담 중간 허리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방치되어 있는 게 안타까워 요로에 호소해서 즉각 보수했던 것도 기억하시는지요. 선생님 생가 복원사업을 위해 당시 전남도지사로 계신 가형을 졸라 신속하게 복원사업이 진행되었을 때 선생님 기분은 어떠셨는지요. 1993년이던가요. 벨기에 루벤가톨릭대학에서 개최된 제2차 국제 한국학 및 비교학 학술회의에서 논문 ｢한국의 민족시인 김영랑｣을 발표했을 때, 선생님을 ‘민족시인’으로 존경할 수 있었음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어느 햇살도 고운 가을날,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적에 옥양목 두루마기를 걸치시고 뒷짐을 지시며 뜨락을 거닐고 계셨었지요. 그때 저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이런 시 한 편을 써서 제 아홉 번째 시집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사, 1999)에 수록했었습니다.
가을의 무게에
은행나무 가지들이 지상으로 쏠린다
유난히 햇살도 고운 날
조용히 뒷짐 지고 거니시는
옥양목 두루마기
감잎 날러 와 머무른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가을 바람 깊은 숨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신다
차마 인사말도 건네지 못한
나도 따라서
숨죽여 귀 기울이고 있다
-｢永郞 생가에서｣ 전문
선생님. 선정위원들께서 선생님의 시와 명예가 걸린 귀한 상을 주시니 받긴 받습니다만, 선생님의 이름으로 남도문학의 맥을 이어갈 역량이 저에겐 없습니다. 저는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는 읽을 줄 모르며, 유현금有絃琴도 뜯을 줄 모르거늘 감히 어찌 무현금無絃琴을 뜯는단 말입니까. 오로지 이곳 남도에서만 육십 평생을 시와 더불어 살아오면서 인기와 경향과 패거리와는 본시 거리가 멀었습니다. 단지, ‘시안詩眼’이나 ‘자안字眼’에 눈 뜨고자 했으며, 사람 앞에서나 풀잎 한 촉 앞에서도 허리를 최대한 구부릴 수 있는 데까지 공처럼 둥글게 구부리며 하심下心껏 일자사一字師로 섬기고자 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앞으로 어찌 해야 합니까. 김영랑 시어 사전도 내야하고, 범우사와 계약한지 오래된 김영랑도 출간해야하는데 저의 힘은 미력하기 그지없고 정년은 코앞입니다. 꼭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기왕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들이 불러주는 것처럼 ‘영랑박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다 해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제라도 선생님께서 저를 토닥거려주시고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특히 황주홍 강진군수님께서 선생님의 3남 현철씨를 한국으로 부르시어 ｢한국시문학파기념관｣을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하셨다 하니 저 또한 수시로 그곳에 들러 선생님을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선생님. 유종호 교수님이 “위대한 영랑의 절창을 유행가처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아울러 세계로 퍼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동아일보> 2008. 4. 28일자) 뜻을 실행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국문학 한가운데 선생님의 시가 있어 한국문학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종호 교수님 말씀처럼 선생님께서 “투박한 정치시편과 부박한 모더니즘이 풍미하던 시대에 자기만의 길을 갔기 때문”에 한때 비록 과소평가를 받으셨을지라도 이제는 선생님을 그 누구도 함부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것도 저는 잘 압니다.
선생님. 겨울 햇살이 다사롭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고마워할 일로 가득 넘칩니다.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꽁지를 치켜들며 아직은 덜 녹은 땅을 헤집는 모습이 저리 아름다울 수 없는 아침입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알맞게 세워야 바로 서는 기기敧器와 같은 삶과 문학을 위해 제 스스로에게 다짐해보는 아침입니다. 이 겨울 아침이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묵주를 돌리는 손끝이 서늘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정위원님들께도 더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고개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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