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정신의 민족사적 의의
이숭원(문학평론가·서울여대 교수)
김영랑 시의 출발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영랑 서정시의 특징은 내면의 순결성과 외면적 운율미의 일치에 있다.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나온다.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외부의 정경보다는 그의 내면 상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말하자면 자연 정경과 마음의 상태가 일치되기를 꿈꾼 것이다. 자연미에서 출발한 그의 순결성 지향은 언어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거기 호응하는 운율미와 형식미를 갖추게 된다. 의미구조와 음성구조가 완벽하게 결합한 외면과 내면의 정연한 일치에 의해 전에 보지 못한 김영랑 서정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전문
이 시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는 중심 내용은 아름다운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내 마음’이라는 시어를 앞세워 봄 하늘을 우러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심정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마음의 어떤 상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맑고 고운 상태로 시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자연의 양태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돌담에 온화하게 비추는 햇살, 풀 아래 흐르는 샘물, 색시 볼에 떠오는 부끄러움,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적시는 물결 등, 이 시의 소재들이 환기하는 것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천진한 순결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시의 화자는 봄날의 맑은 하늘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낸 것이다.
시인의 천진한 시선은 자연 대상을 모두 의인화한 데서도 드러난다. 햇살이 돌담을 비추는 것도 햇살이 돌담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으로 표현했고, 풀 아래 샘물이 흐르는 것도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돌담과 햇발, 풀과 샘물은 이처럼 서로 공존하고 친화하는 다정한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아름답고 천진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마음’과 ‘봄길’이라는 유성음을 반복하고, ‘고요히’와 ‘고운’이라는 양성모음을 반복하여 부드러우면서도 밝은 느낌이 두드러지게 했다. 원본에는 이 시행이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로 되어 있어 네 마디로 율독하도록 표기되어 있고, 그 다음 행도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로 되어 의도적으로 양성모음과 유음(流音: ‘ㄹ’음)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오월의 밝고 경쾌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2연에서 마음을 나타내는 대상은 1연보다 내면화된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러움이라든가 시의 가슴을 적시는 물결은 돌담의 햇발이나 풀 아래 샘물처럼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 미묘한 움직임이다. 특히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적시는 물결은 시정신의 순수한 원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추상적인 차원에 속한다. 1연에서 가시적인 상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김영랑은 2연에서 이런 추상적인 상태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두 시행은 1연의 끝 두 시행처럼 운율감을 고조하는 방향으로 시어를 선택하고 배치하였다. 초록빛 보석인 ‘에메랄드’의 미묘한 색감과 ‘실비단’의 섬세한 촉감을 결합하여 오월 하늘의 신비로운 자태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순결한 심혼을 병치시킨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이렇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오월 하늘을 우러르기 위해서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이란 구절이 선택된 것이다.
김영랑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진술하거나 그것을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바나 생각의 지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말하자면 자연은 그의 순결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다. 그의 시에 반복되어 제시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세계를 표상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혼탁한 세상에서 순결한 마음의 상태가 분명한 윤곽으로 드러날 수가 없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제4회 영랑문학제 영랑시문학 심포지엄 이숭원 교수 주제발표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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