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낮춰 국민 속으로
정부도, 내각도 국민 속에 있어야 합니다. 국민과 함께 숨쉬며,
국민과 함께 울고 웃는 내각이어야 합니다. 정부 각 부처는 소관 업무에
대해 국민께 항상 최적의 설명을 해드리고, 소관 업무와 관련해
고통이나 불편을 겪으시는 국민과 함께해 주기 바랍니다.
2017년 5월 31일 제45대 이낙연 국무총리 취임사
지난 정부의 유례없는 국정농단에 항의하며 추운 겨울 날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국민이 문재인 정부에게 요청한 시대적 사명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정부의 총리에 내정되었을 때 이낙연은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내각다운 내각이 되어야 함을 장조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유능과 소통과 통합이었다. 그리고 취임 후 가장 먼저 소통에 솔선수범하기 시작했다.
첫째, 이 총리는 자신을 낮추었다. 총리란 직책을 두고 수많은 이들을 거느린다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는 한 TV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을 수 없는 표현이죠. 이 시대에는 맞지도 않고요. 저 자신이 아무리 봐도 그렇게 훌륭한 물건도 아니고요. 그래서 일인지하(一人地下) 만인지하(萬人地下)다. 이런 마음을 진심으로 가지고 있습니다.”(YTN 호준석의 뉴스) 2017.8.16.)
그는 어디를 가나 신기할 정도로 깍듯하게 인사에 정성을 다한다. 강원도 고성 산불 피해현장을 찾았을 때 국군 장병에게 90도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념촬영을 할 때도 주변을 돌아보며 무릎을 구부리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다. 국회를 방문했을 때 정세균 국회의장이 “나보다 키가 크시다”고 하자 한껏 키를 낮춰 사진을 촬영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끌어냈다는 얘기도 전한다. 행사장에 가서 볼 수 있는 총리의 모습에 대해 오랫동안 총리를 수행해 온 S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 총리는 아이들이나 여성들과 사진을 찍게 되면 꼭 가운데 자리를 내줍니다. 키를 맞추려고 무릎을 많이 구부리면 힘들 텐데도 참 즐거워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시민들이 다가와 셀카를 찍자고 하면 서슴없이 스마트폰 앞에 얼굴을 맞대고요. 상대적으로 얼굴이 작아 보일 거라며 농담을 던지기도 해요.”
실없는 듯 정겨운 농담은 이 총리 특유의 소통법이다. 그는 공무원과 보좌진에겐 호랑이같이 엄하지만 국민을 만나면 다양한 ‘아재개그’로 웃기려고 애를 쓴다. “총리님 만나서 영광입니다”하는 시민에게 “저야말로 영광 출신입니다.” 한다든가 “다이어트를 우리말로 뭐라는지 아세요?” 낮은 목소리로 눈을 끔벅이며 무표정하게 묻고 반응을 살핀다.“내일부터래요.”
둘째, 국민 높이기를 최우선으로 했다. 기본은 말에서 시작했다. 연설문 등 그에서 존경어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김없이 짚어냈다. 총리실에서 만드는 보도자료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어온 문체도 이 총리의 문제 제기 이후 바뀌었다. ‘-했음’처럼 명사형으로 문장을 종결하는 이른바 ‘음슴체’의 어미는 핵심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장점이 있지만 친절하거나 겸손하지 않다. 이 총리는 “보도자료는 기자들에게 배포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국민이 보게 되니 겸손한 문장을 써야 하지 않느냐”며 ‘습니다’ 식의 공손체로 바꾸라고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1월 25일(토) 주말에 조류인플루엔자(AI) 방역 추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처럼 친절하게 설명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 더 공무원에게 새로운 의무를 강조했다. 이른바 설명의 의무였다.
“공직자는 5대 의무가 있습니다. 국방 근로 교육 납세 외에 설명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걸 충분히 못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 진실을 말하되 국민들의 의심이나 불신을 한방에 최소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가장 쉬운 말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설명의 관건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차관급 임명장 수여식)
이 총리는 작은 사안이라도 기관이나 얼론 국민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드리라고 당부했다. 2019년 연말에 포항시를 찾아갔을 때 일이다. 포항 지진 발생 2주년이 지났지만, 당시 2백여 명의 이재민들은 아직도 포항 흥해 실내체육관에 쳐놓은 텐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실무진은 이곳을 이 총리의 동선에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직접 가겠다고 했다. 현장으로 향하던 총리실 k씨의 이야기다.
“이 총리는 차분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그것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고,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의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 답을 줄 수 있든 없든 그걸 넘어서 그분들 이야기를 듣지 않고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무슨 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인가, 내내 골똘히 생각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총리가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현장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주민들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과거의 어떤 정부 당국자는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총리 이낙연은 달랐다. “자, 자, 여러분!”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면서 민심을 달랬다. 그러면 아수라장 같던 분위기가 일순 차분해졌다. “흥분하지 마시고, 한 분씩 말씀해 보세요.” 총리의 말에 안성을 높이던 이재민들은 사정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그 말을 경청한 이 총리는 “저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포항시장님이 답변해 주세요.” “저분의 의견에는 차관이 설명을 해주세요.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면서 중앙 정부에서 책임져야 할 일과 지자체에서 담당해야 할 일을 나누면서 앞으로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불과 몇 십 분 만에 이재민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주민들의 표정에 안심한 눈치가 역력해졌고, 마지막에는 박수까지 터져 나왔다. 이 현장을 지켜본 한 시민은 이런 말을 우리에게 전했다.
“끝까지 상황을 주도하면서 국민들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시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힘을 과시하지 않는데 힘이 느껴지는 거잖아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지도자였습니다.”
‘공손하게 말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라.’ 이 총리가 공직 사회에서 유도한 변화는 몸을 낮춰 백성과 함께 가겠다는 ‘유약겸하 여민동락 柔弱謙下與民同樂’의 시작이었다. 총리의전실의 한경아 비서는 이 총리가 말한 ‘총리의 역할은 국민 위에 있는 것도, 국민 아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 속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새기고 있다고 했다.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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