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수단이자 조선관리 ‘와인’에 매혹되며 특혜 제공
포도주는 포도나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대표적인 과실주인데 영어로는 와인(wine). 프랑스어로는 뱅(vin)이라 한다. 포도주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있었고, 그 발견은 유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의 단맛은 포도당이고, 과피(果皮)에는 천연(天然)이스트가 생식하고 있으므로 포도를 터뜨려서 방치하면 자연적 발효하여 술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할 때부터 이미 제조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아의 10년간에 걸친 모험담을 그린 작품인데, 한번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여정 중에 외눈박이 거인 괴물에 잡혀 동굴에 갇히게 된다. 그는 궁리를 한 끝에 커다란 통에 포도주를 가득 채운 뒤 부하들과 함께 발로 짓이겨 포도주를 만들어 준다. 그림책은 괴물이 만취한 틈을 타서 뾰쪽하게 깎은 통나무로 눈을 찌르고 모두 탈출해 나오는데 결국 포도주 덕에 살아난 것이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강풍을 만난 오디세이아는 표류를 하게 된다. 그때 바다의 요정 칼립소는 오디세이아에게 음료를 건네주는데 이 때 건네준 음료가 포도주였고, 깎은 듯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는 또 다른 요정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나눠준 것도 붉은색 포도주였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와인이야말로 표류한 사람에겐 생명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멜과 와인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 서기인 하멜(Hendrik Hamel)을 비롯한 36명이 1653년(효종 4) 제주에 난파하여 1666년까지 조선에서 살았다. 특히 하멜은 전라도 병영에 이속되어 6년간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강진에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하멜은 1653년 1월 배를 타고 바다비아를 지나 타이완에 도착한 다음, 7월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64명의 선원과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 산방산(山房山) 앞바다에서 표착하였다. 승무원 64명 중 살아남은 36명 중 한 사람이 ⌜하멜 표류기⌟로 유명해진 헨드릭 하멜이다. 그들은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하멜 일행을 구한 것은 와인이었다. 8월 19일 하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 통의 붉은 포도주를 들고 가서 우리가 바위틈에서 발견한 회사용 은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은 포도주를 맛보더니 좋아라하며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고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정작 그들을 처음 만난 관원은 현장에 급파한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이었는데, 최초로 와인을 마신 사람은 권극중과 노정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유럽을 여행했을 때 마시게 되는 와인의 맛은 한국의 소주나 막걸리와는 전혀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달착지근하고 독하지 않아서 술술 들어가는 와인은 은근히 취기를 느끼게 하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 맛본 권극중과 노정 역시 그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죽 그 맛이 좋았으면 특별한 숙소를 제공받는 특혜를 누렸을까. 그들이 제공받은 숙소는 광해군이 제주 유배생활에 사용했던 집이었다.
이렇듯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 불시착하자마자 와인을 조선인에게 와인을 건넸고, 그 와인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암연기’에 나타난 와인
‘일암연기’는 이기지가 경종의 왕위 계승을 알리기 위해 청나라로 떠난 아버지 이이영을 수행해 북경에 갔다가 160일간의 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이기지는 조선시대 문사로서 청나라의 문화예술·과학·종교 등과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일암연기’는 훗날 북학파의 박지원, 홍대용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기지는 식견이 탁월해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다. 중국을 제대로 보았다“고 했다.
이기지는 선교사로부터 서양 빵 카스텔라를 접대를 받았는데, 그 맛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양 떡 30개를 내왔다. 모양이 햇가지와 비슷했다. 빵을 입에 넣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기이하고 감미로운 맛이었는데 재료가 설탕과 계란, 밀가루 등이었다. 이기지는 베이징에 머물면서 그곳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와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신부들의 호의로 카스텔라 맛을 본 것이다.
이기지는 카스텔라 뿐 아니라 수차례 와인을 접하게 된다. 1720년 10월 10일 일기에는 “포도주 색이 검붉고 맛은 매우 방열(芳㤠)하여 상쾌하다”고 했고, “포도주 세 잔이 나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했다. 입에 들어갈 때눈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는데 선인(仙人)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지가 와인을 마시면서 그 맛을 표현하고 있는데, 선인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서 와인의 맛이 얼마나 훌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희(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소설 ⌜하멜 : 2007년 중앙북스⌟을 읽어보면 하멜이 제주도에 도착해서 건넨 와인의 얘기가 있다.
--제주도 판관 노정과 대정현감 권극중은 다음 날도 현장에 나타났다. 천막 세 개를 세워놓고 가운데 천막을 임시 지휘본부로 썼다. 스페르베르호의 난파와 그 선원들의 표착이 그들에게는 엄중한 사건인 것 같았다. 병사들은 부지런히 물품을 수습하고 물목을 만들었다. 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온 목재를 태워 쇠붙이를 가려냈다. 안스와 하멜이 판관과 현감에게 망원경과 포도주 세 병과 은제 술잔 두 개를 가지고 갔다. 망원경을 선물로 바치고 은제 술잔에 포도주를 따라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올리면서 마셔보라는 손짓을 했다. 판관과 현감은 색깔이 고운 붉은 포도주를 한참 들여다보고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길게 자란 수염을 쓸었다.
“거 맛이 희한하구나.” 판관이 얀스와 하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좋다는 말이려니 싶어 웃으면서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얀스가 ‘최곱니까?’ 라고 묻는 시늉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머리만큼이나 치켜들자 판관 뒤에 서 있던 장교가 쏜살같이 달려 나와 총대로 얀스의 손을 내리쳤다. 얀스가 비명을 질렀다. 판관과 현감이 큰 소리로 웃었다.
막걸리와 와인 잔
우리나라 대표적 술은 뭐니뭐니 해도 막걸리일 것이다. 특히 강진은 60년 전통의 병영주조장(대표 김견식 : 병영면 하멜로 407)의 병영 막걸리의 유명세가 크다. 병영주조장의 ‘만월막걸리’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61호 김견식 명인이 빚어낸 막걸리다. ‘만월막걸리’는 해남 해창주조장(대표 오병인·박미숙 : 화산면 해창길)의 해창막걸리와 함께 전남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창막걸리’는 쌀과 누룩 외 첨가하지 않은 무첨가 막걸리 대표주자이다. 따라서 도시의 막걸리와는 다르게 맛이 달지 않다. 재료가 지니고 있는 맛과 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두 막걸리는 지난 12일부터 18일까지 롯데백화점 광주점에서 판매행사를 했었다. 지역 우수 특산품 홍보와 판매 촉진을 위해 기획된 행사인데, 고유의 맛과 향을 자랑하는 남도의 우수막걸리를 선정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막걸리를 마실 때 큰 대접에 담아 마셔왔다. 그러나 최근 도시에서는 와인 잔에 막걸리를 마신다는 소문이다. 와인 잔에 담겨진 막걸리 빛깔도 와인 색깔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강진에서 <하멜 와인 막걸리>라는 상표와 함께 막걸리를 와인 잔에 마시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간다면 어떨까? (글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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