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뙤약볕에 풀잎조차 숨죽이고 선 한낮이다. 파란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연못엔 너울 좋은 연잎들과 분홍색 연꽃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작열하는 태양 빛이 너무도 현란하여 연꽃은 살며시 눈을 감고 수줍은 듯 꽃봉오리를 오므린다. 볼수록 단아하고 순결해 보이는 꽃이다. 별난 미색도 향기도 없이 그저 수수하고 뜯어볼수록 고운 자색이다.
하고많은 대지에 하필이면 진흙 구덩이 속에 뿌리를 뻗어 내렸는가. 더럽고 추한 진흙탕 속이라도 탓하지 않고 더러운 곳을 정화시키고 순화시켜가며 한 송이 깨끗한 꽃을 피워보는 너그러움이 속세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성품을 닮았다.
범상한 듯 하면서도 대범하고, 대범한 듯 하면서도 범상한 태깔이며 크고 널따란 잎이며, 고운 꽃이 하나같이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기도하는 어느 수녀 같기도 하고, 헤프게 웃거나 함부로 촐랑대지도 않고 어느 한군데도 흐트러짐이 없이 정갈한 모습이 가히 현숙한, 조선의 여인네만 같다.
문득 잔잔한 수면 가득히 번져 가는 그의 정기가 저 찬란한 태양 빛처럼 밝은 빛으로 다가든다. 그리고 뭔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건네주는 것만 같다. 첨벙 물속에 뛰어들어 저 물고기처럼 연잎 그늘에 잠시 쉬면서 저 연꽃을 통해 다 밝히지 못한 진리를 깨우쳐 보노라면 극락세계가 정녕 거기 있을 것만 같다.
예로부터 연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구중궁궐 한적한 비원 연못에서 제왕의 사랑도 받아 보았고 심산유곡 외진 산사의 작은 연지에서 고승의 사랑도 받아왔다. 또한 대갓집 사랑채머리 연당에서 선비들의 시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연꽃은 불가의 꽃이요 불도들의 존중을 받아온 성화(聖花)가 아닌가 싶다. 절에 가보면 불상을 떠받들고 있는 연꽃대좌며 벽이며 기둥이며 천장까지도 연화무늬로 장식했고 서까래 끝에도 연등초를 그려둔 걸 흔히 볼 수가 있다. 그 중에 법주사 석연지(石蓮池)의 돌 조각이나 대흥사 천불전의 연화문 조각(彫刻)은 가히 일품이다.
애당초 연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인도에서부터인데 연꽃은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피었다고도 하며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신으로 태어난다고 하니 불자들에게 있어서 연꽃은 곧 극락정토요 죽은 후에 연화왕생하는 게 그들의 서원이라고도 하리라.
또한 연은 불가에서만 사랑을 받아온 것만은 아니다. 불교의 영향 때문인지 연은 예로부터 우리 생활 곳곳에 이용되어 왔다. 연뿌리로는 연근전이나 연근정과 등 우리네 전통음식을 만들어 큰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랐으며 연실로는 연밥장아찌며 연밥죽을 만들고, 연꽃으로는 누룩을 빚고 연잎으로는 술을 빚어 연엽반상에 연엽대접이나 연엽주발 연엽바리때 등의 그릇에 담아 마시기도 하고 또 연잎쌈을 싸먹기도 했다.
음식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막 피려는 연꽃 봉오리를 본떠 만든 장식품인 연봉잠을 머리에 꽂고 연꽃빛깔처럼 끝만 붉게 물들인 연봉무지기를 입었으며, 남자들은 처음 상투를 짜고서 연잎 모양의 연엽관을 쓰기도 하고 대통을 연밥모양으로 만든 연실죽에 담배를 피워 물고 연밥모양의 구슬에 꿰어 만든 갓끈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에도 연꽃을 그린 그림이 꽤 많았다. 관세음보살도나 연화관음도 연화책가도 등의 불교화나 민화에서도 연꽃을 볼 수 있고 혜원의 그림에서도 연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혜원 신윤복의 그림 <연상의 여인>이나 <연당>에서는 천박해 보이는 기생이나 기생을 희롱하는 양반들의 작태와는 대조적으로 연의 초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연꽃의 그림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연화도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연화도는 대개 내방을 장식했던 10 곡 병풍이나 8곡 병풍그림으로 그렸는데 조선 후기부터는 화조도에 끼어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게 되었다. 연화도는 볼수록 운치가 있어 좋다.
이렇듯 연은 우리네 생활 속에서 늘 떠나지 않고 선조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연은 또 청순한 아름다움과 고아한 품성을 지녔다. 어찌 보면 그는 또 입산수도하는 수도승을 닮았다. 그는 늘 지혜와 자비를 지닌 부처님을 닮은 듯 증오나 원한을 가지지 않고 관용과 평등을 펴 보이며 늘 무상무념의 공(空)의 사념에 젖어 조용하고 편안하다.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착하고 깨끗해지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청정 자연을 그 본질로 한다. 나무에 꽃이 피어 정법안장이 되고, 잎이 무성하여 여반묘심이 되고, 열매가 무르익어 실상무상이 된다. 열매는 참이요, 잎은 선이요, 꽃은 아름다움이요, 싹은 깨끗함이다. 이것을 진선미성이라고 한다. 동양사람은 진선미성을 나무에서 찾는다.'
정말 연을 가까이에서 보노라면 진선미성을 한 눈에 보는 듯싶어 늘 큰 감동을 준다. 그것은 곧 말없는 스승이요, 부처의 가르침과 같은 자비의 꽃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한 송이의 연꽃을 보기 위해선 우리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찬바람이 불고 하얀 눈이 내리면 꽃대 위엔 연실만 남겨두고 잎은 져서 연은 아예 물속에 잠기고 만다. 그렇게 한 겨울을 물속에서 지내고서도 그는 봄을 시새워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4월이 가고 5월이 되어서야 연은 수면 위로 잎을 쏙 내밀고 6월이 가고 7월이 되면 그제서야 참하고 깨끗한 꽃을 피운다. 그리고 8월이면 연못은 온통 진록의 널따란 연잎들과 분홍색과 흰색 꽃들이 어우러져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한 여름 내내 계속된다.
그때쯤이면 나는 또 무엇에 홀린 듯이 연을 찾는다. 연을 대하면 그 수수하고 소담스러운 태깔에 취하고 그 은은한 품과 격에 반한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저 무심한 하늘만큼 텅 비어가고 겸손해진다
장생주(전 모란촌 회장)
월간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장 역임
현재. 월간「삶을 가꾸는 사람들」편집인 겸 편집장. 저서 : 수필집 「허공을 지나는 한 점 바람」외 2 권. 전기집 「다산 정약용」외 공저 수필집 다수. 수상 : 전남문학상 수상.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