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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역사의 그 날 – 정순왕후

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역사의 그 날 정순왕후

 

정순왕후, 조선의 몰락을 부추긴 수렴청정

세도世道는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들은 바르지 않는 일을 했다. 사돈의 팔촌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나눠 갖고 권력을 마구 휘드른 세도勢道를 부렸다. 그는 대제학, 병초판서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조순은 임금의 장인으로서 19세기 조선의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다. 세도정치라 함은 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임금보다 더 많은 권력을 취하게 됨으로써 처음엔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란 뜻으로 조광조가 처음 사용하였다.

 

조선의 몰락을 부른 수렴청정 정순왕후, 조선의 몰락을 부른 한풀이 정국의 서막이 열린다.

1800, 조선의 22 대 임금인 정조가 재위 24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보위를 이었다. 이 경우 왕가의 가장 웃어른이 대리 청정을하는 것이 관례였다. 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조모인 정순 왕후 김씨가 그 적 임자였다.

정순왕후는 15세 때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다. 영조의 나이 66세 때였다. 외척의 세도를 경계 한 영조는 몰락한 양반가 문의 딸 김씨를 왕비로 맞아들여 왕실의 잡음을 사전에 차단하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영조의 오판이었다. 정순 왕후의 조부 김홍옥은 인조와 대립하던 소현 세자비를 감싸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이후 가문의 벼슬길이 끊겼고 그녀의 부모는 입에 풀칠도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 오죽하면 엄동설한에 처가에 아이를 낳으러 가다가 허허벌판에서 출산을 했을 정도였다. 이때 태어난 딸이 정순왕후였다. 그녀가 영조와 가례를 올렸을 당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나이가 25세였다. 10년 연상의 아들과 며느리인 셈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이 났어도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성심을 다해 그녀를 어머니로 모셨다. 그러나 일찍이 권력욕에 물들어 있던 정순 왕후는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음

1776, 영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순 왕후는 32세였다. 18년간 국모의 자리에 있으면서 궁중의 사정을 훤히 꿰뚫게 된 정순 왕후는 이때 이미 조정의 막강한 배후 인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손 시절부터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왕위에 오른 정조도 만만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전후하여 조정은 벽파와 시파로 양분되었다.

벽파의 영수인 김귀주는 정순 왕후의 오라비였고, 시파의 영수는 사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었다. 김귀주는 정후겸 등과 합세하여 홍봉한을 무고하고 세손 시절 정조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온갖 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정조는 그가 자신의 즉위 후 홍국영에게 아부하여 과거의 허물을 은폐하려 한 사실이 알려지자 가차 없이 흑산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 후 김귀주는 1784, 왕세자 책봉 때 조정의 특혜로 비교적 생활이 수월한 나주로 옮겨 갔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정순왕후의 정치적 기반인 벽 피는 김귀주의 실각과 더불어 거의 와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그 공백을 시파와 남인, 실학자들로 채웠고 아직 젊은 정순 왕후는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벽파의 재기를 꿈꾸며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냈다. 마침내 기회는 오고 말았다. 정순 왕후보다 불과 7년 연하인 정조가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노론 벽파의 등장과 천주교 박해

정순 왕후의 집권과 동시에 조 정에는 대대적 인 인사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먼저 노론 벽파의 거두 인 심환지를 영의정에 앉혔다. 심환지는 영의정이되자 정조가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모두 파괴 해 버렸다.

제일 먼저 정조의 친위 부대였던 자영이 철퇴를 맞았다. 심환지는 자영을 혁파하는 대신 군대를 인조반정 이후 서인 주도로 창설된 오군영 체제로 되돌려 놓았다.

또한 정조의 개혁 정치에 동참했던 노론 시파와 서학파 관료를 모두 제거하고 북학파에 대해서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한편, 정순 왕후는 김재찬을 이조 판서, 김조순을 형조 판서로 삼고 자신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를 동부 승지에 임명하여 육조를 재편성하는 등 노골적인 벽과 중심 정권 수립에 매진했다. 이 와중에 죽은 김귀주를 복권시켜 이조 판서로 추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로써 정조의 탕평책을 보좌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모든 원칙은 임금의 안전을 꾀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라.“

정순 왕후가 정사를 주관하면서 내건 두 가지 원칙이다. 이 가운데 의리란, 과거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두고 시파와 벽파가 대립했을 때 벽파의 행동은 정당했으므로 이제 그들을 중용하는 것은 마땅히 의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그녀는 임금의 즉위를 선포하는 교지를 통해 '척사'를 천명한다.

"선왕은 매양 바른 도리가 빛나도록 힘쓰면 사악한 도리는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고 말하셨다. 허나, 지금 들리는 말로는 선왕의 말씀을 벗어난 도리가 횡행하며, 도성에서 지방 군현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날로 퍼져 간다하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교를 믿는 자들을 단단히 가르치고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의 큰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열렸다. 정순 왕후가 천주교를 박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천주교를 믿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파와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순조 2년인 1802, 정순 왕후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이 사람 다운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요,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파괴하고 교회를 배척하여 스스로 이적 금수로 돌아간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빠져들어 마치 어린아이가 샘물로 빠져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측은하고 상심 되지 않겠는가?

"교지 반포와 동시에 오가작통 법이 가동되었다. 오가작통법이란 본래 백성들 스스로 강도 나 절도 등 범법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치안 유지법으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하는 방법이다. 만약 어느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 모두 화를 입게 된다.

이 악명 높은 법으로 인해 전국은 삽시간에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전국적으로 오가작통 법에 걸려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에는 진짜 천주교도들도 있었지만 무고하게 척사에 연루되어 희생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시파나 남인들 중 많은 인사들이 귀양을 가거나 처형되었는데 정약용 형제를 비롯하여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박해'라고 한다.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순조는 1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2년 만에 왕비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이때 왕비로 간택 된 순원 왕후는 시인 김조순의 딸이었다.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 벽파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조순은 병자호란 때 척화의 상징이었던 김상헌의 후손이며 노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김창집의 4대손으로 안동 김씨 가문의 기둥 같은 존재였다. 그는 시파계의 일원이었으나 절대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왕의 주변을 감싸고 돌면서 왕실의 신임을 얻는 데 주력했다.

정조는 김조순의 성품이 원만한 것을 보고 왕세자의 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겼다. 벽파의 세상이 된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이렇듯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 덕분이었다.

김조순에 대한 후세 사가들의 시각은 두 가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우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선 그가 숙적인 벽파세력의 정권하에서 고의적이고 교묘한 포석을 깔아 임금의 주변을 맴돌면서 안 동 김씨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본다. 특히 그가 나이 어린 임금의 장인 인 국구의 신분을 활용하여 조정에서 벽파가 물러난 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결국 안동 김씨 일가에 의한 60여 년 세도 정치의 구조적 불행을 초래했다는 평이다.

반면에 김조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런 평가를 내린다. "그는 성품이 밝고 공명정대하여 정조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또 한 조정의 요직이 주어질 적마다 매번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신중하고 근신하던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이 꼭 체면치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시파라는 당색에 머물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결코 자신의 부귀영달을 도모 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조선 왕조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요컨대 김조순의 출세가 비록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발판으로 작용 했더라도 그것은 조선의 정치적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일 뿐, 개인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는 과정은 가례를 올리기 두 해 전인 1800, 정조 2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종적인 간택을 앞둔 시점에서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될 기회는 무산될 수도 있었다. 정조가 죽자 김관주, 권유 등 정순왕후 측근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김조순은 정조의 유언을 받든 규장각 각신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딸이 초간택, 재 간택을 두루 거치고 합격점을 받은 상태에서 정조는 어린 순조를 부탁한다는 유언까지 남겼다. 결국 반대 세력의 방해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정순 왕후는 4년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조정에 서 물러났다. 그 대신 김조순이 국구로서 섭정의 바톤을 이어 받게 된다. 정순 왕후는 그 이듬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정순 왕후의 친정 일가들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관주는 귀양지로 가던 중 병사했고 김귀주에 대한 복권은 철회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제 세상은 안동 김씨의 세상이 되고 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한 안동 김씨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공정한 인재 등용의 통로였던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을 때였다. 순조 11년인 1811, 서북인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 혁파를 외치며 발발 한 홍경래의 난은 부패한 안동 김씨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이 표출된 결과였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농민들과 몰락한 양반층, 재야 지식인들 그리고 서민 지주층이 결합하여 궁극적으로는 체제의 전복을 도모하는 정치적 쿠데타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는 국경 지역인 평안도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벼슬에 등용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서북 출신인 홍경래는 몇 번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로 벼슬을 포기하고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로 돌 아 다니며 반란에 합세할 세력 규합에 나섰다. 그러던 중 만주의 도적단 두목 정시수와 반란 자금을 감당해줄 대부호 이희저를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리고 1811, 마침내 2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산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스스로 평 서대원수라 칭하고 광산노동자, 빈농, 유민들로 구성한 선봉대를 앞세운 홍경래는 각지에 격문을 띄워 자신의 출병을 알렸다. 제일 먼저 가산 군청을 습격한 반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청천강 이북의 10여개 지역을 완전장악했다.

조정에서는 양도 순무사이요 현과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 등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부군과 반군은 안주 송림리에서 일대격전을 벌였다. 홍경래의 반군은 수적으로 워낙 열세인데다가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관군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급속히 약화 된 반군 부대는 정주성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모든 보급로가 끊긴 채 4개월에 걸쳐 관군과 대치하면서 반군을 이끌던 홍경래는 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끝까지 관군에 대항하기도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홍경래의 난은 그 당시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선 홍경래의 난은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의 수립을 기치로 내 세운 대규모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파장을 몰고 왔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농민층을 비롯한 소외 계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의 붕괴를 가속화 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 21년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10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순조가 재위한 34년 동안 무려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도 끊이질 않았다. 순조는 친정을 하게 된 이후로도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세도 정치의 폐단을 절감 한 순조는 풍양 조씨 집안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다 풍양 조씨라는 또 다른 세도 정권을 불러들인 장고 끝의 악수에 불과했다.

정조임금의 개혁정치와 백성을 유난히 사랑했던 애민정치가 실종되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정조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조선은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최고 강대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정관웅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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