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이제 막 새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 심정이 될 때가 있다. 살면서 만난 어떤 말이 주는 큰 충격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그래서 속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된 귀한 말, 아끼는 이들에게만 살짝 귀뜸 해주고 싶은 말들이다. 나마스테가 그렇다. 지금은 너무 알려져 불교국의 인사어 정도로 흔해진 말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수 년 전 그 말이 내게 다가와 주던 감격, 한 밤중 잠 깨어 달빛 아래 드러난 눈 쌓인 마당을 보았을 때의 경외감 섞인 그 눈부심의 느낌은 여전하다.
타국에서의 에티켓을 다룬 책의 한 구절이었다고 기억한다. 법당 바깥에서 절할 때도 신발을 벗고 엄숙한 자세를 갖춰야한다고 했던가. ‘나는 당신께 온 몸을 바쳐 충성을 다 한다’는 오체투지의 경배어가 마치 내 온몸으로 흡입되는 것 같았다. 오늘 책을 읽다가 나마스테에 나는 다시 감격한다. ‘나마스테는 인도문화권에서 ‘당신에게 깃들여 있는 신께 문안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는 구절이 주는 서늘한 감회에 책장 가득 낙서를 하고 말았다.
내게 신탁된 운명, 그것에 대해 곰곰 되새김하는 날이 많다. 잘 짜 내리던 스웨터를 풀어 다시 되 짜기 하듯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경로를 샅샅이 살펴 뜯어보는 시간이랄까. 생의 등판도 앞판도 어지간히 완성되는 시점이다. 한데 잘 이어붙이기만 하면 되는 생이란 스웨터를 두고 나는 자꾸 조바심하고 있다. 애초 빚으려던 문양과 빛깔에서 어긋난 자책이다.
나는 고운 성품 지니고
그 위에 훌륭한 재능 더하여
맑은 물가의 향기로운 풀을 몸에 걸치고
연보라 난초꽃 꿰어서 노리개 만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어라
굴원이 노래한 유년의 회상이다. 하지만 굴원처럼 자신의 능력에 만족한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도 나는 책에서 건 또 사는 동안 만나는 몇 몇 사람, 그들이 갖는 인생너비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적이 많다.
‘당신께 깃들여 있는 신께 문안드립니다.’ 바꿔 말하면 나마스테는 그러니 ‘네게 주어진 명운에 순응하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남아선호가 팽배하던 시절, 세 번째 딸로 태어나 ‘그만이’라는 내리 칠년 을 불릴 유년의 이름을 얻었으니 출발부터 환대받지 않은 셈이다. 지나치게 허약해 ‘네 발치에 걸려 걷지를 못 하겠다’는 핀잔을 들었던가. 상대의 팔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습성 탓이었다. 그 버릇은 학창시절 내내 이어져 단 한 사람의 친구를 택해 그 애와 동행하지 않으면 화장실도 못 갔다. 미처 자라지 못한 채 어른의 세계로 떠밀려난 듯 거리에 나서면 의지처 없어 자꾸 허방거리는 발걸음을 하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바람의 딸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세계의 오지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한비야씨가 그랬던가. 자신은 자신이 자랑스럽단다. 작고 알맞은 키, 오동통한 체격, 그리고 천성적으로 밝아 잘 웃는 것 이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그러고 보니 내게도 감사할 요소가 많다. 나 같은 눈을 지닌 사람은 절대로 악한 일을 못한다는 좋은 평을 들은 적 있는 내 눈도 자랑거리요, 평소대로 손수 화장하고 있는 한복 입고 치룬 아들의 결혼식 후일담으로 어느 분 그랬다. 영락없이 곽 속에 든 한국인형 같았노라고. 약삭빠르지 못함, 내가 너무 짠해서 감히 나를 이용하려던 상대의 계획을 철회하게 만드는 내 어리숙함도 사실은 내 생의 큰 무기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얼렁뚱땅 누비고 기운 테 역력한 잡문일망정 글을 향한 순정을 못 버리고 자꾸 끄적대는 나다.
나마스테가 ‘나는 당신께 온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합니다’ 건 ‘당신께 깃들여있는 신께 문안을 드립니다’건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라고 인정하라는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어다. 굽이굽이 자랑거리 없는 인생에 뒷덜미 붉어지는 순간이 많지만 모자람은 내 운명이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두어 번 되풀이하는 사이 내게 새겨진 신의 섭리를 비로소 해득한 듯 생의 결이 유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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