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이형문의 창가에서 57) 이창건 노 원자력 과학자가 국립묘지에서 올린 4잔의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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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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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의 창가에서 57) 이창건 노 원자력 과학자가 국립묘지에서 올린 4잔의 술

<이 창 건>노 원자력 과학자가 국립묘지에서 올린 4잔의 술

 

1945815일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과학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점은 큰 업적이며 당시 한국 사회를 자유화하는 기틀의 역할과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불러왔고, 불합리하고 인습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해방자 역할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때 당시 1875년생으로 이미 80세를 넘긴 나이였다. 그럼 에도 그는 자신의 생애를 초월한 20년 뒤 한국을 부흥시킬 수단 매체로 원자력을 선택하고, 사후 한국형 원자로 모델까지 개발하여 한국을 세계 원자력 경쟁의 선두에 서게 했던 업적을 남겼다.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눈물의 햄버거를 먹고 배워 APR1400이라는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원자로를 개발하였다. 이는 세계 최고 최강의 안전 기술이 탑재되어 있다.

 

이창건(93)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1950년대 초반 이공계 엘리뜨 중에는 공군소속 기술 장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산업기반이 전무하던 시절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사람이 제대하면서원자력 공학 입문이란 책을 선물 받았는데, 이 교재를 갖고 물리학, 공학전공의 공군 장교 출신 12명이 스터디 그릅을 만들고 매주 한 차례 문교부 창고건물에서 세미나를 했다.

6,25 때 특수 공작부대인 KLO부대 출신인 이 박사도 학과 선배의 권유로 이 모임에 가담했다.

원자폭탄은 알지만, 아무도 원자력발전소는 생각지도 못한 시절, 스승도 없던 상태에서 언제 어떻게 써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1956년 이때가 원자력 창시 원년으로 삼는다.

일은 늘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그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은 <워커 시슬러>라는 미국 전력협회 회장을 만났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과학고문으로 국내 화학 발전소 건설에도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워커 시슬러>에게 전력난 해결방안을 묻자 그는 갖고 있던 나무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 속에 자그마한 막대기 하나와 석탄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리 프레시던트! 이게 핵연료봉이란 겁니다. 같은 무게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300만 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시슬러 회장! 그걸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너지는 땅에서 캐는 게 아니라 머리로 개발하는 겁니다. 헌신적인 과학기술자를 훈련 시켜야 합니다.

이승만이 원자력 엔지니어 양성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문교부 창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하던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당신들은 미국에 유학 보낼지도 모르니 공부를 더욱 가열 차게 하라!”는 전갈이었다. 국무회의에서우리도 원자력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물리학 박사인<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즉석에서 답변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고 보고한 것이다. 당장 데리고 오시오 세상은 늘 순수하게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유학생이 선발됐다. 10년간 236명의 엘리뜨(엘리뜨 교복이 아닌 군복 단벌을Always 일상화한 이들)가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원자력을 공부했다. 그 속에 스터디 멤버들도 포함됐다. 스터디 그릅의 좌장을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조교수였던 윤세원이었다.

윤 선배는 문교부 원자력과 과장으로 옮겨갔는데 원자력 관련 법률 제정 등으로 국회를 포함 여기저기 신발 문수가 안 보이게 뛰어다녔다. 예산이 부족 하자 훗날 광주광역시청 물봉처럼 서대문 집과 용인 고향 땅까지 팔았다. <이창건> 박사는 윤세원 선배가 그립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1인당 연간소득 40달러이던 시절, 1인당 6,000달러가 드는 해외연수에 10년간 236명을 보냈다. 시슬러는 20년이 지나야 그 혜택을 볼 수있을 것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때 이 대통령의 나이가 80을 넘었다. 그러나 자기 당대에 덕을 보려 한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이 외국으로 출발에 앞서 이 대통령에게 인사차 갔다. 이 대통령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국으로 싸우러 가는 용사를 격려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여러분들의 몸은 여러분 가족이나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원자력으로 국민의 밥을 만들어 주십시오.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한국을 살릴 여러분들을 키우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책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5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41달러 정도로서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문교부에 원자력 과를 만들었고, 1959년에는 당시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돈인 35만 달러를 들여서 교육용 원자로를 만들었다.

외환 기근으로 당시 한국으로서는 단 돈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의 결제를 받아야했던 시절이다.

19564월 이창건 학생을 비롯한 한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국비 원자력 연구원으로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에 파견되었다. 아르곤 연구소의 학비는 10개월 연구기간 동안 6천 달러로 비쌌다.

1956년에 보낸 1기 유학생 이후 4년 동안 8차에 걸쳐 200여명이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들이 한국 원자력원과 원자력 연구소를 세우고, 한국형 원자력 시대를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90세로 세상을 마감하셨지만 이미 80줄에 나라의 20년 뒤 앞날을 바라보시고 원자력을 선택하신 위대한 공을 세우셨다.

 

한국형 원자로 모델까지 개발하여 한국을 세계 원자력 경쟁의 선두에 서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생애를 초월한 나라의 먼 훗날을 부흥시키는 수단 매체로 원자력을 선택하고 끈질기고 적극적으로 기다림을 펼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원자력 인력들은 사후 한국형 원자로 신모델로까지 개발하여 세계 원자력 나라들을 놀라게까지 만들었다. 그 기술을 우리나라만이 갖고 있었던 세계 최고 최강의 안전 기술이 탑재되어 있다. 그런 위대한 업적과 원자로를 현 정부 문재인 대통령이 판도라 영화한편을 감상하고 난 후에 씻을 수 없는 원자로 발전소를 없애고 있는 이 안타까운 실상을 목격하면서 아직 생존해 계시는 <이 창건>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무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잔을 올렸다.

UAF바라카 원전건설 입찰에서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준 나라들을 꺾고 당당히 승리하던 날!! 볼 위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북 고창으로 인촌 김성수 선생 탄신 130주년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급히 출발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이제 우리는 나라 밖으로 떠나보낸 기술자들을 다시 불러모아 원자력 건설을 서둘러야 할 엄청난 책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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