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장편역사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4
탐진바다 봄바람
봄이 탐진바다 뱃길을 따라 싸목싸목 올라오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면서 어깃장을 놓던 삭풍도 시나브로 순해졌다. 천개산 산자락에 자생하는 동백나무 붉은 꽃들이 어느 새 뚝뚝 지고 있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동백꽃 낙화도 붉기는 마찬가지였다. 연둣빛 동박새들이 동백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와 노란 꽃술을 쪼며 쓰쓰쓰 우짖었다. 동박새 날갯짓에 동백꽃 서너 개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궁복은 작은 동박새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다가 정년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성님, 거그서 뭣허요?”
“동백꽃은 필 때나 질 때나 꽃 모냥이 똑같어, 삘건 색깔도 변함이 읎고. 가리포 동백은 여그보다 더 볼 만허제.”
“여그 동백이나 거그 동백이나 뭐 같겄지라.”
“어차든지 우리도 동백꽃멩키로 변함이 읎었으믄 좋겄네.”
“성님, 걱정 마소. 나는 죽을 때까정 성님을 믿어불고 따를 텐께.”
“동상, 근디 현 치소에서 여는 활쏘기대회 날짜는 정해졌는가?”
“향리 어르신헌테 들었는디 메칠 후 연께 잘 준비허라고 헙디다. 그라고 이번에는 말타기대회도 겸헌답니다.”
겨울철 검술과 승마훈련은 해동머리에 끝났으므로 대구소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궁복은 정년에게 빌린 말을 타고 골짜기 산길을 달리거나 향리 정씨의 개인 활터에서 정온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면서 탐진현 치소의 활쏘기대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동상, 쌍계사나 가보고 올까?”
“볼 것이 읎어라. 인자 막 터를 잡고 전각을 한 채 짓기 시작했응께라.”
“활쏘기나 말타기대회에서 실수가 읎을라믄 부처님께 빌어불자고.”
“그라믄 그래야겄소잉.”
두 사람은 산길을 타고 천개산 쪽으로 올라갔다. 얼음이 녹은 개울물은 돌돌돌 소리치며 흐르고 있었다. 생강나무 노란 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먼저 피어난 오리나무 새잎들은 귀엽고 싱그러웠다. 가까이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올라가자 정년의 말대로 일꾼들이 한쪽에서는 기둥을 다듬고 또 다른 쪽에서는 축대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쌍계사는 두 개울이 하나로 합수하는 산자락에 있었다. 천개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여러 개울물들은 쌍계사 앞에서 만나 탐진바다로 빠져나갔다. 궁복과 정년은 징검다리를 건너 절을 짓고 있는 작업현장으로 들어섰다. 억새풀을 지붕에 얹은 띳집이 임시 대웅전이었다. 띳집 안에는 청동불상이 하나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었다. 궁복은 엎드려 빌었다.
“시합에서 실수가 읎게 해주씨요.”
정년도 소원을 빌었다.
“오늘 우리 가마에서 굽는 토기덜이 잘 나오게 해주씨요.”
띳집을 나온 정년이 말했다.
“성님, 여그까지 왔은께 절 일을 쪼깐 도와줍시다요.”
“와서 직접 본께 불사가 끝날라믄 십 년도 더 걸리겄그만.”
“그래도 우리가 잠깐이라도 머시기헐 일이 읎을까?”
“우리가 시방 뭣을 도와주겄는가? 지대로 머시기헐라믄 크게 시주해부러야제.”
“아이고메, 고것은 우리가 성공헌 뒤에야 가능허겄지라.”
“동상, 도공덜이 댕김시로 기도허는 절이 될 거 같은께 잊지는 말어.”
“지가 어처케 잊어불겄소. 성님도 출세허믄 잊지 마씨요.”
“내 고향은 여그가 아닌디?”
“가리포에는 절이 읎담시로요. 글고 가리포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여그서 어처케 살아갈지 눈을 떠부렀다고 말했은께 여그도 고향이겄지라우.”
“동상 말이 맞네. 내 몸이 태어난 곳은 가리포지만 내가 장차 뭣이 되겄다고 다짐헌 곳은 여그 마실이여.”
“긍께 헌 말이랑께요.”
“방금 쌍계사 부처님헌테 빌었는디 배은망덕해서는 안 되겄제.”
정년이 화제를 돌렸다.
“성님, 오늘 우리 집 토기 굽는 날인디 한 번 구경해볼라요? 시안에 맹글었던 기물덜을 올 해 첨으로 굽는다고 허그만요.”
“얼릉 가보세.”
해마다 봄이 되면 정 족장 토기가마부터 불을 때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미산포 양민들까지 올라와 정 족장의 토기가마 주변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마을 아녀자들은 가마에서 떨어진 공터에 여러 개의 솥을 걸어놓고 음식 만들기에 바빴다. 어제 잡은 돼지는 이미 삶아져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노비 두어 명이 삶은 돼지 몸통을 앞에 놓고 살코기를 능숙하게 발라냈다. 돼지머리는 또 다른 노비가 가마 봉통 앞으로 옮겼다. 술독 소래기를 들어 올리자 막걸리의 시큼털털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불대장 최씨가 토기술병에 막걸리를 한 가득 담았다. 고사상에 돼지머리와 토기술병, 술떡이 놓이고 흑산도에서 가져와 겨우내 볏짚 속에서 삭힌 홍어가 올라가자 사람들이 봉통 뒤로 몰려들었다. 마치 마을의 공동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정 족장이 양민들을 향해서 말했다.
“올해도 우리 탐진에서 좋은 토기덜이 나와불기를 천지신명님께 빌겄소. 그라고 내 가마에 들이는 첫 불이 여러분덜에게 복을 주었으믄 좋겄소. 술과 음석을 푸짐허게 장만했응께 배불리 묵고 가씨오.”
토기가마를 가지고 있는 아랫마을 중늙은이 조씨도 양민들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참말로 올해는 탐진의 모든 가마에서 최상품덜이 소나기멩키로 겁나게 쏟아져부렀으믄 좋겄소. 서라벌은 물론 흑수(黑水)바다 건너 큰 나라에 많이 폴아부러 부자가 되붑시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들에게 토기를 많이 팔지 못하는 것은 탐진 땅에 최상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구들의 해적질 때문에 당나라에 함부로 갈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시야가 탁 트인 황수(黃水)바다나 흑수바다를 가로질러 당나라 산동반도나 절강성으로 마음 놓고 가지 못했던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려면 신라 땅 해안을 따라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흑산도, 당진, 연평도를 거쳐 발해만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도 안개가 자욱하거나 여름철 장대비가 쏟아질 때는 암초나 섬 사이의 급류를 만날 수 있으므로 안전한 포구에서 기약 없이 기다렸다.
봉통에 불쏘시개와 장작을 가지런히 넣고 있던 불대장 최씨도 한 마디 했다.
“바람이 읎고 비도 안 와서 날씨가 무자게 좋그만요. 상품이 나왔으믄 쓰겄소.”
불대장은 봉통에 불들이기 전후에는 항상 말수가 적어졌다. 속병을 달고 사는 데다 긴장한 탓인지 말을 짧게 하고는 굵은 장작 몇 개를 봉통 앞으로 옮겼다. 정년이 불대장 최씨에게 말했다.
“성님, 고상이 많그만이라우.”
“잘 나와야 헐 것인디.”
불대장 최씨가 봉통 불쏘시개 관솔에 불을 붙였다. 이에 정년은 집사처럼 토기잔에 술을 따랐다. 제사 순서로 말하자면 초헌(初獻)이었다. 그러자 정년의 아버지가 고사상 앞에서 큰절을 했다. 그런 뒤 토기잔을 들고 음복한 뒤 가마 위에 술을 공손하게 부었다. 정년은 또 다시 토기잔에 술을 채웠다. 아헌(亞獻)이었다. 이번에는 아랫마을 조씨가 큰절을 한 뒤 가마 위에 고수레를 했다. 마지막으로 불대장 최씨가 조씨와 같은 순서로 종헌(終獻)하면서 장작에 붙은 불을 확인했다. 봉통의 참나무 장작불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소나무는 처음부터 넣지 않고 봉통 안이 뜨겁게 달구어진 뒤에 넣었다.
초봄이라고 하지만 가마 주변은 냉기가 감돌았다. 양민들이 술을 마시면서 곁불을 쬐다가 하나 둘 뒤로 물러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통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훅훅 뿜어져 나왔다. 고사상에서 내려온 돼지머리는 즉시 잘게 잘라져 양민들의 안주거리가 되었다. 불대장 최씨와 동막에서 며칠 동안 숙식을 함께 해온 이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동막 쪽으로 물러나 있던 정 족장이 궁복을 불러 말했다.
“시방 우리 집으로 올랑가?”
“예, 어르신.”
궁복은 몹시 궁금하여 봉통 옆에 있는 정년에게 가서 물었다.
“어르신께서 날 부르신디 무신 일일까?”
“모르겄는디라.”
궁복은 가마굴뚝에서 폴폴 솟구치는 검은 연기를 구경하다가 자드락길을 내려갔다. 지게에 진흙을 진 질꾼 두 명이 궁복을 보고 아는 체했다. 모두 초면이 아니었다. 작년에 동막에서 보았던 하씨 성을 가진 마을사람들이었다. 궁복은 바로 정 족장 집으로 내려갔다.
“어르신, 겨신게라우?”
“들어오게.”
정 족장이 궁복을 따로 조용히 부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현 치소에서 벌어지는 활쏘기대회를 앞두고 아들 정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또 아들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우리 마실에서 지낼 만헌가?”
“향리 어르신께서 편허게 대해 주십니다요.”
“실은 내가 자네를 부른 까닭이 있네.”
“네, 말씸허시지라우.”
“자네가 볼 때 아들놈 활 실력은 으쩐가?”
“탐진현 장정덜 가운데서는 으뜸이지라우.”
“자네가 친동상멩키로 잘 갈쳐준 덕분일 것이네.”
정 족장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궁복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굽이 높은 토기잔을 내밀었다. 술잔에 길쭉한 굽이 달린 것은 아주 특별한 토기였다.
“내가 애끼는 술잔인디 자네에게 주겄네. 가마 숯불에서 오래 구운 잔이라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네.”
“아이고메, 고맙그만요.”
정 족장이 일부러 대나무 젓가락으로 토기잔을 툭툭 쳤다. 그러자 토기잔에서 쇳소리가 땡땡, 하고 났다. 정 족장이 다시 말했다.
“연이 말타기 실력은 으쩐가?”
“말타기도 마찬가지그만요. 다리심이 짱짱헌 말만 만나믄 우승도 가능허지라우.”
정 족장은 궁복의 말을 듣고는 매우 흡족해했다. 궁복 역시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연이가 뭣이 되기를 바라는디요?”
“나는 원래 연이가 우리 집 토기가마를 물려받고 당(唐)을 오가는 아조 큰 상인이 되기를 바랐네. 근디 연이는 무장이 되고 잪어허네. 그러니 애비라도 으쩌겄는가. 인자 그 짝으로 잘되기를 빌어야제.”
“그래서 동상 활쏘기 실력을 듣고 좋아허셨그만요.”
“뭐, 그런 셈이네.”
그제야 궁복은 정 족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 족장은 자신의 기대와 달리 무술에 관심이 많은 아들에게 늘 아쉬움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궁복이 말했다.
“지가 한 번 연이를 설득해볼께라우?”
“말해봤자 뿌사리 고집이라서 소용읎응께 허지 말소.”
“지라믄 어르신 말씸대로 따르겄그만요.”
“자네는 탐진현 사람덜이 부러와허는 군관이 되고 잪지 않은가?”
“어르신, 지는 군관과 장사꾼 둘 중에 하나를 골르라믄 큰 장사꾼이 되고 잪그만이라우.”
“으째서 그런가?”
“가리포에 삼시로 굶기를 밥묵데끼 했어라우. 굶어서 죽은 사람덜도 많이 봤고라우. 배고픈 사람덜을 도울라믄 군관보담 장사꾼 부자가 되야겄지라우.”
정 족장은 궁복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장사꾼 부자가 되겠다는 궁복의 마음씨에 적잖이 탄복해서였다. 탐진 땅에서 두세 번째 부자이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궁복의 꿈은 달랐던 것이다.
“자네는 나보다 도량이 넓은 사람이네.”
“아이고메, 어르신. 무신 말씸입니까요. 어르신 땜시 묵고 사는 양민덜이 을매나 많은디요. 동막에 있는 도공덜만 해도 멫 사람입니까요.”
“그야 가마를 운영헐라믄 반다시 필요헌 사람덜이제. 노비덜을 빼고는 모다 이 마실 양민덜이네.”
실제로 토기를 만들고 불을 때는 사람들 대부분은 양민들이었다. 노비가 하는 일이란 고작 나무를 베어 와서 장작을 패는 정도였다. 산에서 토기 흙을 찾아서 파오는 질꾼도 힘이 좋은 친척뻘 하씨였다.
“사실은 자네를 내 옆에 델꼬 잪네만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읎네.”
“어르신, 무신 말씸입니까요?”
“자네를 불대장 일을 배우게 해서 맽길려고 했네.”
가마 불을 능숙하게 다루는 불대장 최씨는 지병이 있었다. 불대장 일을 앞으로 얼마나 맡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날은 불대장이 피를 토하기도 하여 정 족장을 몹시 놀라게 했던 것이다. 궁복은 점잖게 거절했다.
“지는 연이 동상과 함께 서라벌로 가든지 당에 건너가서 살랍니다요.”
“붙잡지는 않겄네. 자네가 가진 무술 실력이나 큰 도량으로 보아 여그 탐진 땅은 좁은 것 같네. 더 넓은 디로 가게나.”
정 족장은 궁복을 포기했지만 못내 아쉬워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탐진 땅에서 궁복 같은 젊은이를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정 족장은 어떤 식으로든 궁복과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장삿배에 토기를 가득 싣고 서러벌이나 당나라로 갈 때면 궁사 몇 명이 필요했는데, 문득 정 족장은 궁복을 염두에 두었다. 정 족장이 궁복의 성과 이름을 들먹였다.
“자네 성이 장씨라고 했제?”
“예.”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예, 여그서 삼시로 보고(保皐)라고 지어 봤는디 좋은 이름인지 으쩐지 잘 모르겄그만요.”
“보고라... 자네헌테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으째서 그런게라우?”
정 족장이 궁복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보(保)자는 ‘지킨다'는 글자이고, 고(皐)자는 넓은 웅덩이와 같은 못을 뜻했다. 그런데 못에 들어온 물은 재물을 가리키는바, 보고는 재물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궁복은 정 족장의 이름풀이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큰절을 했다.
“어르신, 앞으로는 궁복을 버리고 장보고라고 허겄습니다요.”
“허허. 궁복을 버리지는 말게. 궁복에는 무운(武運)이 있으니 나쁜 이름은 아니네.”
궁복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자신을 격려해준 정 족장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정 족장의 아들 정년을 친동생처럼 더욱 잘 이끌어주겠다고 맹세했다. 궁복이 사랑방 문을 열자 탐진바다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스쳤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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