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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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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문의 창가에서 58)
삶이 힘들 땐 다산 정약용선생을 배우자

이형문글

삶이 힘들 땐 다산 정약용선생을 배우자

  

필자는 강진에 살러 온지도 어언 18년을 맞는다. 이 노년에 남이 잘 때 글 쓰며 공부하고 사색하여도 이제 겨우 10권의 저서를 남긴 것이 전부인데, 강진에 귀양 오신 다산 정약용선생께서는 18년의 세월동안500여권의 책을 남기셨다. 귀양 오셔서 처음 제자로 삼았던 이가 치원 <황상>으로 황상은 다산선생께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했을 뿐 아니라 귀양살이 18년 동안 내내 섬김과 존경으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깊이 명심하여 스승의 과골 삼천을 그대로 따랐다.

필자는 공교롭게도 다산선생이 처음 오셔서 4년간을 귀양살이를 하시며 머무셨던 사의재(四宜齋)와 제의 집 거리가500여 미터인 곳이라 자주 들려 다산선생의 그 정기(正氣)와 정신을 받기위해 자주 들려보거나 때로는 아내와 둘이서 그때의 삶의 흔적을 그대로 판박이 해둔 동문 밖 주막에 들려 다산선생이 많이 좋아하셨다던 아욱된장국이나 다산밥상 차림을 먹고 오는 때도 더러 있다.

남도유배 길을 모두 답사하려면 온 하루(65,7km)가 다 걸린다. 주악산 휴양림 길에서부터 다산 오솔길 다산초당 백련사 솔치재 넘어 금당마을, 고성사 보은 산방을 지나 대월 달빛 맞이마을 무위사를 거쳐 백운동 안운 마을을 지나 강진다원(茶園)녹차 밭과 월남사지 석탑까지 돌다보면 하루해가 다 저문다.

필자는 최근2022101일 국군의 날에 강진산악회주관 제4회 월출산국립공원 둘레 길 다산선생의 유적지에 일부러 참여, 3시간30분이 넘도록 최고령자로 완주하자<김정은> 산악회장님과 많은 산악동호인들의 격려를 한 몸에 다 받았다.

 

#다산의 어록 중에 아래의 다산선생의 저서<목민심서> 말씀을 항상 생각해 본다.

1) 인생이 힘들다고 하지마라. 다산은 경상도 포항 장기와 강진에서 18년 동안 삶과 죽음이 오가는 유배지에서 살았다.

2)공부가 어렵다고 말 하지마라.

한 생애500권의 책을 읽기도 어려운데 다산선생은 500권의 책을 저술했다.

3)사람을 사귀는데 나이를 묻지 마라.

다산은 20살이나 어린 혜정선사, 초의선사와도 학문의 친구가 되었다.

4)성공에 집착하지마라.

다산은 벼슬길에 있던 때보다도 벼슬에서 멀어졌을 때 크게 이루는 것이 있었다. 인생의 깨달음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크게 배운다.

5)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너무 믿지도 마라.

다산은 같은 조정에서 국사를 논하던 사람들에 의해 유배되었다.

6)전문성이 없다고 말을 하지마라.

다산은 배우지 않았어도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당대 최고의 기술인 거증기와 농도를 발명했다.

7)인생에 여유가 없다고 하지마라.

다산은 사약이 언제 배달될지 모르는 유배지에서 차를 즐겼다. 그래서 호도 다산(茶山)이다.

 

필자가 걸어온 길을 이따금 기억을 더듬어 볼 적이 있다. 태어난 곳이 경남통영 해방다리 동내에서 태어났고, 자라던 서너 살 땐 맨데(정양동)해변에서 날만 세면 한여름에 깨 벗고 놀던 때 깨어진 사금파리에 오른쪽무릎을 다쳐 약이 없던 시절이라 된장으로 어머니의 정성으로 완치됐으나 그 상처가 지금까지도 남아있고, 청소년시절엔 급성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으나 수술 잘못으로 장이 중첩되어 재수술 받았고, 이후 대장암과 췌장 쪽 물혹제거 수술과 옆구리늑막염자리수술까지 배를 다섯 번이나 쨌다.

60을 접어들며 더 살아야겠는 의지하나로 몸을 걷기부터 시작해 이민 갔던 FIJI에서부터 고국에 돌아와 강진에 사는 동안 산행을 했던 탓으로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모든 질병을 완치시켰다.

필자가 선친께서는 여수에서 크게 사업을 하던 당시 필자에게 대학을 경제과로 추천했으나 필자는 글쓰기가 좋아 기어이 국문과를 선택했음이 나이든 오늘 날에 생각해보니 잘 선택한 것이라 여겨졌다.

선친께서 여수에서 사업을 크게 하시던 당시, 배우지 못한 것을 한하여 (초등학교3학년이 전부) 자식들에게나마 배우게 하여 필자의 아래 여동생만 5섯 모두를 시골에서 대학에까지 진학시켰다.

선친께서는 유류업, 미곡상, ()업 해산물위탁상까지 대상으로 바쁘시던 때인데도 자식들에게 남겨 주기위해 직접 붓글씨로 통학경편 상하권을 (1955년 필자가 고등학교1학년시절) 쓰셔 남겨주셨다. 그 선친의 유산으로 필자는 지금까지도 보관하며 그 정신을 본받아 수필부문 작가로 등단하여 이번까지 10권의 저서를 남겼다. 참고로 선친의 <통학경편>책을 나의 책속에 실어본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어린 때 부모를 읽고 작은 조부님 슬하에서 자라며 일본인 정미소에서 일하시며 독학하여 그곳에서 인정받아 서기로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통영우체국에 우편배달부를 하시던 때 정양동(멘데)에 대농을 하시던 외가 할아버지의 큰 딸과 인연을 맺은 어머님(趙甲先)이시다. 필자가 느끼는 어머님께서는 배움은 없었으나, 가정에 모범적이셨고, 선친의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10여년의 기간 동안, 아낌없는 당신의 뒤 바라지의 숨은 열여(烈女)분이심을 자식들에 모본을 보여주셨다.

필자의 형님은 6,25직후 밀항으로 일본에 숙부님(이 금옥)이 경영하던 일진초자공장을 찾아가 그곳 동경에서명치대학 전기공학부 대학원까지 졸업이후 동경전력 설계부에서 5년여 재직 중일 당시 그 기술을 고국에 헌신하기 위해 귀국했으나 군 미필 때문에 한국전력에 입사치 못하다가 국제전기회사의 애자생산 공장 중역과 건설회사 중역진에서 재직이후 퇴직 하셨다.

필자의 집안에는 공학박사를 비롯해 예술분야까지 박사를 셋이나 내 놓았고, 여동생 다섯은 전국에 다 흩어져 살고 있으나 남편들 넷을 먼저 떠나보내고, 막내 여동생의 남편인 <김 수근>매제만이남아 필자는 이따금 통영에 가 4촌 동생<이 상돈>과 깊은 인연의 관계를 아직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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