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장편역사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7
밤안개와 풍랑
“비상!”
장보고는 눈을 번쩍 떴다. 갑판 쪽에서 ‘비상!’ 소리가 들려왔다. 선실 안은 동굴보다 더 어두웠다. 장보고는 웅크린 채 짐승처럼 자고 있는 정년을 깨웠다. 그러나 정년은 꿈쩍을 안 했다. 장보고는 정년의 어깨를 크게 흔들고는 저고리를 입었다. 그제야 정년이 일어났다.
“성님, 무신 일인게라우?”
“뭔 일이 생긴 것 같네. 얼릉 밖으로 나가보세.”
장보고가 정년을 재촉했다. 장보고는 정년을 깨워놓고 선실 밖으로 먼저 나왔다. 선실 밖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밤안개가 자욱했다. 별빛은 물론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점쟁이 복인을 선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장삿배가 뱃길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선장이 복인을 다그쳤다.
“여기가 어디고? 황수바다로 나온기 아이가?”
“안개 땜시 알 수 없십니더. 용왕님께 빌고 있으니 쬐깐 지달려 보이소.”
복인은 두 팔을 휘휘 저으며 빌고 있었다. 장삿배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갈팡질팡 가고 있었다. 섬이나 뭍이 가깝다면 불빛이 보일 텐데 사방은 칠흑 같았다. 밤안개의 냉기가 얼굴을 스칠 뿐이었다. 선장은 돛잡이 요수에게 지시했다.
“돛을 다 내리그래이!”
“바람이 읎은께 다행이그만요.”
돛잡이 요수의 말은 바람이 잔 덕분에 배는 아주 엉뚱한 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위험천만했다. 늙은 우두머리 노잡이가 말했다.
“암초가 많은 충청 마도나 물살이 급헌 강화 손돌목에 들어 와 있다믄 큰일이여.”
마도 바다와 손돌목도 울돌목 못지않게 조류의 흐름이 소용돌이치는 곳이었다. 다만 자정까지 썰물 때여서 황해 인당수가 가까운 곡도(백령도)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점쟁이 복인은 쉬지 않고 점을 치고 있었다. 그는 악귀가 사는 곳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중이었다. 선장은 닻잡이 정수에게 지시했다.
“닻을 내리그래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항해했다카는 큰일 난데이.”
“알겄그만이라우.”
선장의 지시를 받은 닻잡이 정수가 닻을 내렸다. 그러나 닻은 바다 밑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장삿배가 수심이 얕은 흑수바다 밖으로 나와 있다는 증거였다. 선장은 키잡이에게 장삿배가 신라 땅 해안으로 근접하도록 키를 잡으라고 한 뒤, 돛잡이에게는 두 개의 돛을 모두 올리고, 노잡이 방인들에게는 노를 저으라고 지시했다. 선장으로서는 위험한 결단이었다. 당나라의 황수바다로 나가 당구를 만나는 것보다는 신라 땅 해안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에야 돛에 마파람이 안기기 시작했다. 점쟁이 복인이 소리쳤다.
“악귀 소굴에서 벗어났십니더! 선장님, 인자 안심해도 될낍니더!”
점쟁이 복인의 말대로 장삿배는 북서쪽으로 움직였고, 밤안개는 마파람에 밀려 물러가고 있었다. 시야가 시나브로 트였다. 늙은 우두머리 노잡이가 소리쳤다.
“쩌그, 불빛이 보잉마!”
밤안개가 멀리 밀려가면서 신라 땅 해변이 거뭇거뭇 보였다. 선장이 불빛과 섬들을 보더니 김시방에게 보고했다.
“촌장님, 우리 배가 위도 부근에 있십니데이. 마도까지 안 간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더.”
“천우신조로 무사한기라.”
김시방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삿배가 북진하지 못한 채 위도 바다 부근에서 빙빙 헤맸지만 그래도 무사했으므로 선원들에게 내린 비상상황을 해제했다. 키잡이 타공과 돛잡이 요수만 갑판에 남고 다른 선원들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장보고는 갑판에 남은 채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를 응시했다. 그러자 늙은 우두머리 노잡이가 다가와서 말했다.
“안개 땜시 영광바다부터 위도까지 이리저리 술취헌 거멩키로 돌아부렀그만.”
“안개가 무섭그만요.”
“안개허고 풍랑은 점쟁이 복인도 어처케 못해불제.”
“풍랑은 으디가 센디요?”
“황해 인당수라고 있제. 거그만 가믄 배가 심을 못 써부러. 긍께 요새는 당은포 쪽에서 당나라 등주로 바로 가분다고 허대.”
당은포는 마도와 당진을 지난 경기 해변에 있었다. 당은포에서 등주까지는 거의 직선 뱃길이었다. 당의 군사나 신라군사의 경비선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당구들이 가끔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장보고가 말했다.
“행수 방인님도 영파까지 가시는게라우?”
“멫 사람은 등주에서 내리고 대신 다른 사람덜이 탈 거그만.”
행수(行首)란 우두머리란 뜻이었다.
“지는 월주까지 내려갔다가 일조로 올라온다고 허드그만요.”
“나는 촌장님이 등주 신라방에 와서 구헌, 임시로 일허는 사람이그만. 등주 신라방 사람덜은 촌장님 배를 서로 탈라고 허제.”
“무신 이유로 그런다요?”
“고귀허신 촌장님께서 미천한 우리덜을 잘 보살펴주신께 그라제.”
등주 신라방에는 선원이 되고 싶어 하는 신라인들이 많았다. 당구에게 납치되어 노비로 팔려왔다가 겨우 탈출한 사람도 있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진해서 당나라로 건너온 사람도 있고, 당나라로 장사를 나왔다가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배를 만드는 기술이 있는 목수는 당나라에서도 대접이 후했다.
“자네는 어처케 배를 탔는가?”
“촌장님 배 궁사로 탔지라우.”
김시방의 장삿배를 지키는 우두머리 궁사 자격으로 정년과 함께 미산포에서 출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우두머리 노잡이처럼 임시로 배를 탄 것은 아니었다. 김시방의 사군(私軍) 궁사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보고나 정년은 언제까지나 김시방의 사군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당나라에 도착한 뒤에는 김시방과 상의한 뒤 새로운 직업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배는 위험헌디 계속 탈 생각이여?”
“선원이 될라고 탐진을 떠난 것은 아니지라우.”
“당나라에서도 신라 궁사덜은 인기가 좋아. 절도사덜이 서로 달라고 허드랑께.”
“당인 궁사덜도 있지 않는게라우?”
“신라 궁사보다 못해. 근디 산동반도 절도사는 신라사람덜헌테 인기가 읎어. 고구려 사람인디 당나라 황제허고 사이가 안 좋고 게다가 당구덜이 납치헌 신라사람덜을 노비를 매매허는 것을 묵인허고 있어. 긍께 신라인덜이 손구락질허제.”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한 뒤 절도사가 된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이었다. 당 황제의 권력이 흔들리자 이정기는 독자세력을 키우면서 때로는 당 조정을 위협하기도 했다. 당 조정에서는 이정기 절도사를 위험인물로 보고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 조정에서 파병할 군사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산동반도 일대에서 이정기 세력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당 황제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군사가 바로 산동반도의 무령군(武寧軍)이었다. 무령군에는 백제계와 신라계 유민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선실로 들어온 장보고는 토막잠이라도 자려고 눈을 붙였다. 그러나 늙은 우두머리 노잡이 말이 귓등에 맴돌았다. 장보고 역시 당구들의 해적질을 방관하거나 묵인하고 있다는 이정기에게 분노했다. 그래서인지 이정기 군사를 토벌하려고 조직한 무령군에 호감이 갔다. 더구나 무령군에는 백제계와 신라계의 유민이 많다고 하니 낯설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정년이 말했다.
“성님, 안 자고 뭣허요?”
“방금 행수 노잡이 얘기를 들었는디 산동반도에 무령군이 있다는디 으쩐지 맴이 끌려분다야.”
“무령군이라고 했소? 머시기 백제 무령왕 군대 이름 같그만요.”
“그럴 리는 읎겄제. 동상, 우리 거그로 들어가볼까? 시방 군사를 모집허고 있다고 헌께.”
“성님, 말씸 조심허씨요. 선원덜 중에 우리 말을 듣고 촌장님께 일러바치믄 우리는 어처케 되겄소?”
“동상 말이 맞네, 행수 궁사로 대접해주고 있는디 다른 디로 간다믄 섭섭허시겄제. 긍께 당에 갈 때까지는 비밀로 허드라고잉.”
“성님, 지는 걱정헐 거 읎어라우.”
해가 뜨자 안개는 더 빠르게 걷히었다. 김시방의 장삿배는 당은포로 들어가서 닻을 내렸다. 포구에는 김시방의 장삿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갈 승려가 있었다. 헌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실에서 살지 않고 출가한 심지가 당은포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김시방은 서라벌을 떠날 때 자신을 찾아온 심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심지는 큰아버지가 되는 김시방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김시방은 그때를 떠올리며 장삿배에서 내렸다. 포구를 관장하고 있는 별장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촌장님, 스님이 보름 전에 오셔서 지다리고 있구먼유.”
“탐진을 들렀다가 오느라고 쪼매 늦었다네. 스님은 서라벌에서 바로 이곳으로 오셨을 것이네.”
별장은 김시방에게 지나칠 정도로 굽신거렸다. 김시방이 왕의 이복형인 줄 알고 있을 터였다. 심지도 왕의 아들이므로 보름 전쯤 당은포에 도착했지만 치소의 객사에서 편히 머물 수 있었다. 치소에서 나와 포구를 포행하던 심지가 장삿배에서 내린 김시방에게 다가와 합장하며 말했다.
“큰아버님, 소승 심지입니더.”
“탐진에서 토기를 가져오느라꼬 늦었데이. 불편허지는 않았십니꺼?”
“치소 향리께서 민망헐 정도로 극진했십니더. 별장께서도 군사를 보내 편의를 봐주셨습니데이.”
“포구에서 한 나절 휴식한 뒤 떠날 것이니께 천천히 승선해도 됩니더.”
“큰아버님, 알겠십니더.”
선원들은 장삿배에서 내려 각자 휴식을 취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김시방은 치소 향리를 찾아가 쌀과 보리를 구해 선원들 편에 나르게 했다. 김시방과 향리는 이전에도 그랬듯 신의가 있었다. 김시방은 향리가 요구하는 당나라 물건을 나중에 가져다주기로 하고 쌀과 보리를 쉽게 얻었다. 향리는 당나라 물건 중에 절동 월주가마에서 생산하는 청자 그릇을 부탁하곤 했다. 탐진 땅의 가마에서는 아직 청자를 생산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비록 탁한 빛깔이 도는 조악한 청자였지만 신라 땅에 오면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은포 치소 향리는 월주가마의 청자접시나 항아리가 들어오면 제법 비싼 값으로 부근 토호들에게 팔았다.
“촌장님, 당은포는 또 은제 오셔유?”
“가을에 올낍니더.”
“월주 청자접시가 탐진 토기맨치 입술이 얍실얍실헌 처녀멩키루 이쁘다믄 구해 달라고 허는 사람덜이 훨씬 더 많겄쥬.”
김시방을 호위하던 장보고와 정년이 당은포 향리의 말을 듣고는 웃었다.
“내가 보기에도 월주 청자는 탐진 토기보다 멋이 없십니더. 아직도 명주 장사꾼덜은 탐진 토기를 서로 차지할라 칸다, 아입니꺼.”
그러나 기물에 유약이 입혀진 월주 청자가 탐진 토기보다 실용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탐진 토기에도 나무재가 유약처럼 녹아 흐른 경우도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김시방은 당은포 치소 향리를 안심시켰다.
“가을에 올 때도 월주 청자 그릇을 가지고 올 낍니더, 나를 믿어 보이소.”
“이번에 올 때는 모냥이 괴안찮은 걸루 골라 와유.”
“맘대로 안됩니더. 월주가마는 굽기가 무섭게 금방 팔려버립니데이. 최상품은 장안 황실로 올라가삐리고 장삿배에 올라오는 것은 중품입니데이. 중품 구허기도 운이 좋아야 합니더.”
“그라겄쥬.”
김시방은 향리와 술을 서너 잔 미시고는 느긋하게 승선했다. 장삿배는 정오가 조금 지난 뒤 마파람을 불기 시작하자 강화 쪽으로 올라갔다. 황해 인당수에서 바로 등주로 서진하려고 했다. 당은포에서도 등주로 갈 수 있지만 인당수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했다. 인당수만 지나면 황수바다가 나타났던 것이다. 황수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황하의 진흙탕물이 바다를 황토빛깔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정년이 말했다.
“성님, 인자 당이 가차운 모냥이요. 가심이 쪼깐 벌렁벌렁해라.”
“동상, 나도 그러네. 나도 내 운명이 어처케 될지 모르겄당께.”
“시방 불어오는 마파람을 받고 가는 배멩키로 잘 풀리겄지라?”
“바람이 마파람만 있는가? 하늬바람도 있고, 샛바람도 있고, 삭풍도 있고, 돌풍도 있는 것이제. 동상이나 나나 인자부터는 맴을 단단히 묵어야 써.”
“근디, 성님. 당은포 향리가 치소에서 보여준 월준가, 뭔가 거그 청자사발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보석 같습디다.”
“나도 욕심이 나드라고. 이 배가 영파까지 간다고 헌께 촌장님을 따라가서 월주가마를 보고 잪네.”
“사발이 두꺼와서 무거운 것이 흠입디다만. 글고 모냥이 쬐깐 비틀어져 조잡헙디다.”
“우리 토기사발은 이파리멩키로 얇아서 들기가 가볍고 모냥은 기가 막히게 이쁘제.”
“최상품은 안 그러겄지라?”
“촌장님이 가져오는 것은 중품이라고 헌께 그런지도 모르겄네잉.”
두 사람은 탐진토기와 월주청자를 이야기하다가 점쟁이 복인이 무슨 말인지 중얼중얼 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인당수가 지척인지 갑자기 풍랑이 거세졌다. 점쟁이 복인은 인당수에도 악귀가 살고 있는데, 풍랑이 거센 것은 악귀들끼리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풍랑으로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당나라로 유학 가는 심지까지 나와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했다. 그러자 잠시 후 풍랑은 놀랍게도 기세를 누그러뜨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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