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장편역사소설 <깨달음의 빛, 청자>8
등주 신라방
김시방의 장삿배는 등주 신라방이 관할하는 포구에 정박했다. 배가 포구에서 닻을 내리자마자 신라방의 부총관 설전이 달려왔다. 설전은 장보고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벌써 부총관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라방의 우두머리 총관의 잔심부름을 하는 비서에 불과했다. 등주 신라방 총관은 나이가 든 중늙은이로 지병이 심해 거동을 못했기 때문에 설전이 왔을 터였다. 배에 오른 설전이 김시방을 보더니 달려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김시방이 말했다.
“방정께서는 잘 계신가?”
“총관님은 요즘 치소에 나오지 못하십니더.”
“신라방을 잘 이끌어온 분이데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몬 하믄 큰일인기라.”
김시방은 총관을 방정(坊正)이라고 불렀다. 틀린 호칭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총관을 방정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총관이란 말이 다소 권위적이라면, 방정은 재당신라인들에게 존경 받는 어른이라는 뜻이 강했다. 김시방이 옆에 서 있는 장보고를 소개했다.
“행수 궁사데이. 나이가 쪼매 위일끼라.”
장보고와 설전은 통성명을 했다.
“설전입니더. 지 고향은 서라벌이고예.”
“장보고요. 지는 탐진에서 살았지라.”
장보고의 키가 설전보다 한두 뼘 정도 더 컸다. 설전이 장보고의 체격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눈을 바로 뜨지 못했다. 정년도 설전과 이름을 주고받았다. 김시방이 설전을 소개시켜주는 데는 의도가 있었다. 서로 알고 지내면 손해 볼 것이 없을 터였다. 등주 신라방에 올 때마다 부총관 설전과 잘 협의해 일하라는 뜻이었다. 김시방은 등주에 내릴 선원들을 설전에게 알려주었다.
“복인과 배수리 목수 선공 그라고 노잡이 멫 명이 내린데이.”
“노잡이덜은 얼마든지 대줄 수 있십니더. 점쟁이 복인은 구해보겠십니더.”
“노잡이덜은 심이 좋고 어깨가 짱짱헌 장정으로 바꽈주그래이.”
“신라방에는 배를 탈라꼬 지에게 부탁헌 장정덜이 많십니데이. 금방 델꼬 오겠십니더.”
“알았네.”
“촌장님 배는 언제 떠납니꺼?”
“오늘은 등주에서 쉬고 낼 떠날끼다.”
“하역할 기물은 없십니꺼?”
“이번 배에는 등주 토기는 없데이. 선원들을 멫 명 바꿀라꼬 온 것뿐인기라.”
“알겠십니더.”
설전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번에는 신라소의 군관 장영이 군사 두 명을 데리고 와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라소는 신라방과 신라촌의 자치기구인데, 그 우두머리를 대사(大使)라고 불렀다. 대사 휘하에서 실무적인 일은 압아(押衙)가 했다. 압아는 군관과 군사를 거느리고 소임을 보았다.
군관 장영은 과묵했다. 할 말만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부총관 설전과 달리 김시방이 묻는 말에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황제께서 압아 나리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카대.”
“예.”
“무슨 벼슬이가?”
“좀 깁니다.”
“허긴 당 벼슬이 본래 길데이.”
“평로군절도동십장 겸 등주제군사압아(平盧軍節度同十將 兼 登州諸軍事押衙)입니다.”
산동반도를 다스리는 평로군 절도사 휘하의 무관 십장인데 여러 군관과 군사를 거느리는 압아라는 뜻이었다. 장영은 압아의 지시를 받고 배에 올랐던 것이다. 장보고보다 대여섯 살 어려 보였지만 장영에게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김시방은 장영을 장보고와 정년에게 소개해 주려고 하다가 말았다. 장영은 검문을 하고는 바로 배를 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장영이 가고 난 뒤 정년이 말했다.
“성님, 무자게 건방지그만요.”
“잘 봐두드라고잉. 막대기멩키로 뻣뻣헌 사람이 오래 가는 벱이여.”
“성님은 으째서 저로코름 거만헌 사람을 좋아헌게라?”
“입이 무거운 사람은 신의가 있당께. 잘 기억해두드라고잉.”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행동은 40대처럼 진중한 장영에게 장보고는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김시방은 장영의 행동에 기분이 개운치 않은지 한 마디 했다.
“신라소에는 가끔 저런 군관이 있데이. 신경 쓰지 말그래이.”
“지는 믿음이 가그만이라우.”
“그래? 맴이 맞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겄나. 허긴 장 군관은 뭣을 주어도 다 거절한데이.”
“신라소에서 나온 군관덜에게 선물을 주기도 헌게라우?”
“포구에서 장삿배를 지켜주니 고마운기라. 그때는 신라에서 가져온 접시 한 개라도 줘야 한데이. 근디 장 군관은 다 거절한기라. 차갑기가 얼음땡이 같데이.”
“촌장님, 장 군관 같은 사람은 무신 일을 하드라도 변치 않겄지라우.”
“그럴 수도 있겄지만 당장에는 따땃헌 디가 읎데이.”
김시방은 고개를 저으며 선실로 내려가 버렸다. 정년이 말했다.
“가만히 지켜보믄 성님은 참말로 맴이 넓어부러라.”
“동상이 날 고로코름 보는 모냥인디 맴이 좁을 때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읎당께. 하하.”
장보고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노잡이 어른이 참 좋았는디 아숩다야. 으떤 선원덜이 배를 탈지 궁금허그만.”
“신라방에서 오는 사람덜인께 모다 신라사람덜이겄지라.”
“탐진에서 온 사람도 있을까?”
“그러고 본께 당구덜에게 잡혀갔다가 도망친 탐진사람도 있을지 모르겄소잉.”
“가리포에서도 흑수바다로 괴기 잡으로 나갔다가 당구덜에게 붙잡힌 사람덜이 있은께 말이여잉.”
“성님, 우리가 은젠가 당구덜을 바다에서 청소해붑시다.”
“동상, 내 소원은 두 가지여. 부자가 되는 것이고, 당구덜을 바다에서 깨깟이 청소해부는 것이여.”
닻잡이와 키잡이 선원들은 배에서 내려 술집을 찾아갔지만 장보고와 정년은 그러지 못했다. 당나라 등주 포구에도 도적이나 해적이 장삿배를 급습하는 사고가 종종 있어 왔던 것이다. 다른 선원들은 휴식을 취했지만 궁사들은 더 긴장했다. 장보고는 이물과 고물, 그리고 좌현과 우현에 경계궁사를 배치했다. 대구소 향리와 별장에게 배운 대로 경계병을 내세웠다. 장보고의 행동을 본 김시방이 아주 만족해했다.
“내가 잘 보고 있데이. 포구맨치 위험헌 곳도 읎는기라. 방심했다 카믄 가져온 기물들 다 도둑맞을 수도 있데이.”
“촌장님, 지덜을 믿고 뭍에서 쉬시지라우.”
“신라방에서 보낸 선원덜을 지달리고 있는기라. 선원덜이 새로 와야 맴을 놓을 수 있데이.”
“알겄그만요. 선원덜을 지달리고 겨시그만이라우.”
“부총관이 갔으니 곧 올끼다.”
김시방의 말대로 잠시 후 설전이 몇 명의 선원들을 데리고 왔다. 정보고와 정년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탐진 출신은 한 사람도 없는 셈이었다. 김시방은 점쟁이 복인이 오지 않았다며 몹시 아쉬워했다.
“복인이 와 없노. 복인이 없으믄 선원덜이 모다 불안해한다 카이.”
“구하지 몬했십니더.”
김시방은 복인을 구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노잡이만 해도 힘이 센 사람이면 되지만 복인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므로 아무라도 시킬 수 없었다. 김시방이 배 난간을 툭툭 치면서 아쉬워하자 장보고가 말했다.
“촌장님, 심지스님이 겨신디 뭣을 걱정허신게라우. 배가 인당수를 지날 때 심지스님이 독경을 해서 무사했그만이라우.”
복인은 점을 치고 제사를 지냈지만 심지는 관세음보살 명호을 외우기만 했는데 배가 미친 듯한 풍랑을 무사히 견디었던 것이다. 위도바다에서 배가 밤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고 빙빙 돌 때도 심지가 있었더라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심지는 위도바다와 마도바다를 지난 당은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 궁사 말이 맞데이. 내 눈으로 확인한기라. 근데 심지스님은 양주에서 개원사로 간다 카지 않았나.”
“그거야 명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양주로 와도 되고, 아니면 명주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믄 되지 않겄는게라우.”
“아하! 그라믄 장 궁사가 심지스님에게 말해보그래이.”
“에러운 일이 아니지라우. 심지스님도 촌장님께 엄청 고마워허고 있그만요.”
“심지스님도 선실에 남아 있는기고?”
“아니그만요. 노잡이를 따라서 배에서 내렸그만요. 곧 오겄지라우.”
심지는 배에서 내릴 때 큰아버지인 김시방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로운 것까지 큰아버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심지는 신라방으로 가지 않고 노잡이 안내를 받아서 신라원으로 갔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당에 오는 동안 정년과 가까워진 심지가 말했다.
“등주에도 우리 신라 사람이 세운 절이 있십니더. 거기 가서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물어봤십니더.”
“으디로 가는 것이 젤로 안전허다요?”
“양주에서 운하로 가는 방법이 있고, 명주에서 장강을 타는 방법도 있다 칸데 모두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십니더.”
“원래는 양주 개원사를 찾아가기로 했는디 방법이 하나 더 생긴 거그만요.”
“촌장님께 여쭤봐야겄십니더.”
그래도 양주에서 가는 방법이 더 까다롭기는 했다. 운하를 오가는 배를 한두 개 바꾸어 탄 뒤 장강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잘못 하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장강에서 배를 타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한 번 타면 장안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심지가 양주 개원사나 명주 천태사로 가지 않고 장안에서 가까운 종남산 운제사로 가고자 발원한 까닭은 그곳이 선덕왕 때 분황사 주지를 지낸 자장율사가 계율을 익힌 곳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의 구법의지는 확고했다. 15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진표율사의 가풍을 잇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 운제사로 가서 율장을 확실하게 배우고자 발원했던 것이다. 심지는 해시쯤 김시방에게 불려갔다. 김시방이 말했다.
“심지스님, 선원 중에 복인이 없는기 걱정됩니더.”
“인당수에서 제사를 지냈던 복인이 있지 않십니꺼?”
“등주에서 별 이유 읎이 내렸십니데이. 아마도 위도바다에서 시껍했던 것 같십니더. 제사를 지냈지만 배가 밤안개 때문에 이리저리 헤맸다 아입니꺼.”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복인에게는 속수무책이었겠십니더.”
“그래서 말입니데이. 심지스님이 명주까지 가몬 안 되겠십니꺼?”
“큰아버님, 걱정하시지 마이소. 신라원에 갔더니 한 스님이 양주에서 장안 가는 것보다 명주에서 가는 뱃길이 수월하다꼬 했십니더.”
“아이고, 한 시름 놓았십니데이. 배에 기도하는 사람이 읎으몬 선원덜이 엄청 불안해한다, 아입니꺼.”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독경하몬 어떤 재앙도 다 물리칠 수 있십니더.”
“인당수에서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었는디 우째 믿지 않겠십니꺼.”
김시방은 출가한 조카에게 존댓말로 깍듯하게 대했다. 출가한 스님을 우대하는 전통은 선덕왕이 의지했던 자장율사 대국통 때부터였다. 선덕왕은 자장율사를 흠모하여 분황사 주지로 임명했고, 통도사를 창건하도록 왕실 창고를 열어 정성을 다해 후원해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왕자나 왕실 자제들이 출가하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왕자 중에서는 당나라로 가서 지장왕보살이 된 김지장스님이 유명했다. 성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뒤 당나라 구화산 화성사로 가서 그곳의 민중들은 물론이고 당 숙종 황제와 시인 이백의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장보고는 정년에게 심지의 생각을 전해 듣고 안도했다. 심지가 인당수에서 기도하던 중에 거칠게 날뛰던 풍랑이 갑자기 순해지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장보고는 참지 못하고 선실을 나와 이물로 갔다. 그러나 심지에게 바로 다가서지는 못했다. 심지가 독경을 하고 있어서였다. 장보고는 심지의 독경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심지가 독경을 마치고 장보고에게 말했다.
“<법화경> 관음보문품을 외고 있었십니데이.”
“그것이 뭣인디 지도 쪼깐 알고 잪그만이라우.”
“궁사님도 오도가도 못헐 때 관세음보살님 명호만 불러도 에러운 처지를 벗어날 수 있십니더.”
심지는 관세음보살의 복덕은 바다와 같이 무량하므로 명호만 외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독경의 한 부분을 들려주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받드는 이가 큰 불길 속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불은 능히 그를 태우지 못하리라.
만약 큰 물결에 떠내려간다고 해도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면 곧 안전한 곳에 이르게 되느니라.
검은 바람이 일어 그들이 탄 배가 나찰, 아귀들의 나라에 이르렀어도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라도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는 이가 있다면 모두 나찰로 인한 재난에서 벗어나리라.
장보고는 심지의 짧은 법문에 감화를 받았다. 별점을 치는 복인은 밤안개 속에서는 능력을 잃어버리지만 스님은 기상 변화와 상관없이 관세음보살 명호를 외우면서 독경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보고는 선실로 내려가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정년은 이미 큰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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