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 햇발
김현임 수필가모란촌회원
병상편지
H, ‘지금은 이미 먼 곳에 계신 당신을 불러내어.....’였다고 기억합니다. 작중 화자인 여주인공은 이승과 저승의 확연한 거리에 있는 그에게 말을 붙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방 안에 놓인 화병의 白梅를 상대로 여기며 말을 하는 것이 낫겠다했지요. 한 때 제가 너무도 좋아하여 몇 번을 베껴 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서정가 아니던가요. 그 첫 구절을 흉내 내어 편지를 쓸 수 있는 당신이 있음에 먼저 감사합니다.
지천명 넘긴 여자에게 그 누구를 향한 열정이 남았겠습니까. 다만 요 며칠 전 옛집 근처를 서성이다가 不老橋라는 다리의 명칭에서 무언가 울컥 명치를 치받는 느낌, 그리고 검은 뿔테 안경의 스물넷 청년의 얼굴과 우체국 창가가 등장하던 청마의 싯귀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녀를 버리고 딴 여자와 결혼한 소설 속 상황과는 반대로 이 지상에 머무는 순간 H, 당신처럼 저를 속속들이 이해해 준 이가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당신께 자꾸 변덕이 일어 어느 날은 일시에 소식을 끊자 제가 다니던 여학교를 찾아가 학적부를 뒤졌다지요. 그리고 호적주소로 저를 수소문함과 동시에 당신 아버님께서 제 부친께 정중한 청혼편지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문구가 가물가물한 싯귀처럼 그도 아득한 옛일이지요.
3주간의 휴가는 뜻밖입니다. 무엇인가 범하지 않곤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상태의 아슬아슬한 날들의 연속이었지요. 주홍컵, 언제나 아침커피를 마시던 머그잔이 까닭 없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것이 징조였습니다. 오른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의 신경파열, 전신마취와 현미경 수술, 하여 기브스에, 링거에 양 손 붙잡혀 병원에 눕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며칠은 병원의 이름조차 변변히 대지 못하고 어리둥절, 이후에도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골방의 늙은 영사기사처럼 부질없이 옛 필름을 돌린다고나 할까요. 불현듯 서른 해 가까이 천관산 자락에 누워있는 당신께 편지를, 아니 얘기를 걸고 싶어진 것입니다.
어쨌든(참, 되도록 안 쓰려 해도 이 낱말처럼 자질구레 늘어놓는 제 넋두리를 단번에 정리해 주는 말이 없어서), 어쨌든 잘 쉬고 계시지요? 솔직히 당신의 그 안식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녁 무렵 어깻죽지 짓누르던 질매를 벗고 마구간에 누워 상처를 혀로 는 가축처럼 생이 고단한 순간, 지금이 제 생 통틀어 최악의 노동에 시달리는 날, 하루의 신새벽, 바로 환부의 통증에 輾轉反側 잠조차 들지 못하는 바로 그 시각인 듯합니다.
고질이 도졌습니다. 당신을 만나기가 무섭게 장탄식 쏟는 부끄러운 버릇이지요. 지리멸렬한 제 신변잡기는 이제 그만 두렵니다, 대신해 H, 당신이 글 쓰는 데 참조하라며 두툼하게 묶어 건네시던 신문의 코너가 떠올라 펼친 동종 신문입니다.
‘뙤약볕에서도 그의 쓸쓸함은 한기가 들 정도다.’ 이는 ‘텅 빈 공간, 그 쓸쓸함에 대하여’란 제목이 붙은 전람회 소개기사의 첫 문장, 유난히 햇살 뜨겁던 날 치러진 국장, 나라 큰 어른의 영결식 후유증인가요. 8월 염천에 불현듯 돋는 소름입니다. 제 쓸쓸함에 떠난 분이 남긴 빈자리의 불안이 덧쳐 텅 빈 회랑을 배회하는 바람처럼 헛헛합니다.
구름 떠난 하늘 빈자리
바람 떠난 숲의 빈자리
꽃 져버린 들의 빈자리
너 가버린 내 맘의 빈자리
오래 전 만나 나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의 작사자가 점층법 표현 중 가장 마지막에 사람을 둔 이유가 뭘까요. 구름과 바람과 꽃과는 달리 눈 사무치게 그리운 이는 결코 다시 올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 아닐까요.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하게 아름다운 상처가 그리움이며 사람의 마음은 과거의 경험이 가득 찬 거대한 도서관이니 그곳의 한 칸을 차지한 우리의 지독한 슬픔도 결국 아름다운 목록 중 하나. 하지만 이 말들도 서럽고 신산한 날의 우리에겐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 망연한 것 중 가장 부피 큰 사람잃음의 후유증을 혹독히 앓으면서 곰곰 생각해 봅니다. 잃음과 잊음에 대하여.
천하에는 원만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결함이 일상입니다. 천하에는 이로운 일이 없습니다. 손해가 일상입니다. 이런 사실을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 우리 생의 완성 단계라지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사람에 대한 망실 또한 우리의 일상이겠지요. 다행히 우리에겐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완벽한 보완장치를 갖춘 기억이라는 창고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는 그리움의 실체들을 여느 보석에 비할까요.
H, 누군가에게 잃어버린 존재가 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종착은 동시에 시발, 졸지에 놓아버린 아쉬운 손으로 시작되는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일 테니까요. 잎사귀 동그랗게 파먹은 벌레의 흔적도 따지고 보면 무지렁이 벌레가 제 힘을 다해 한 세상 깊이 통찰했다는 증거라 했습니다. 가신 이 남기신 자취 새삼 눈부시지요. 바라건 데 남은 생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저그저 살아가지 말자 다짐합니다. 지상의 어느 인연치고 영원한 것 있던가요. 언젠가 잃어질 저라는 존재가 진저리 치며 누군가의 기억에서 떨치고 싶은, 잃음과 동시에 서둘러 잊고 싶은 이가 되지 않기를 기원해 봅니다.
‘J씨는 늘 중요한 말을 장난같이 하는 습관이 있었지요. 그렇다고 J씨의 진의를 내가 가볍게 일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꼭 그런 편지를 한 번쯤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해요. 그렇지만 J씨,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정말 그런 편지의 적합한 수신자인지를 말이지요.’ 오늘 우연히 마주친 소설 속 이 구절이 제게는 H, 당신의 답신 아닌 답신으로 읽힙니다. 아마도 담임선생님께서는 별다른 특징도, 장기도 없는 제자에게 덕담 삼아 적으셨을 겁니다. ‘문학에 소질있음’ 그 기록에 제 앞길 적극 뒷감당하겠다던 당신 눈에서 발하던 그날의 광채를 아직도 제가 믿는 건가요. H, 당신과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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